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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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파란나라를 향하여
장르 : 미스터리 드라마
한 줄 소개 : 신을 믿지 않는 한 악덕 사채업자에게 성흔(聖痕)이 생겼다.
<이야기>
새로운 천년의 세 번째 봄.
한 달 뒤면 이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외국인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의 친선경기나 평가전이 있을 때마다, 거리는 연이어 붉은 물결로 가득 찼다. 붉은 색을 싫어하는 이 나라 정서와는 심하게도 안 어울리는 일이었다.
하긴 축구와 이념은 상관이 없지…
축구가 국민을 하나로 묶든 이념이 민족을 속량하든, 여기가 자본주의 국가든 빨갱이 공산국가든… 받을 돈은 받아야 했다.
그것이 김부장이 하는 일이다.
그는 세 대째 담배개피에 불을 붙였다. 불붙이는 두 손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붕대가 감긴 오른손에 ‘신체포기각서’라고 적힌 흰 종이쪼가리가 쥐어져있다.
낡고 음침한 건물 안. 수술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억쯤 되는 도박 빚을 진 채무자는 처음에 여기로 끌려와서 살려 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완강히 저항했다. 놈의 사지를 침대에 묶느라 김부장과 깍지가 애를 먹었다.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던 늙은 야매시술자는 느긋하게 흰 가운을 걸치며 수술도구 등을 챙겼다.
마취주사 한방에 골아떨어진 채무자의 배를 째고 신장 하나를 강제로 적출한 것이다.
각막 하나에 이천만원, 신장 하나에 오천만원. 간을 자르면 팔천만원.
간을 자를까 하다가, 도박과 술에 절어 살던 놈이라 제 값을 못 받을 것 같아 신장을 택했다.
-나머지는 네가 벌어 갚아. 두 달 준다. 또 잠수 타려다 걸리면 다음은 네 눈알 두 쪽이야. 명심해.
주사를 맞고 서서히 잠들어가는 놈의 면상을 ‘신체포기각서’로 툭툭 내려치며 김부장은 그렇게 경고했다.
-딸애는 좀 어때? 밀린 약값은 해결 됐나? 자네, 요새 들어 더 독해진 거 같군…
야매가 혼자 수술을 진행하며, 뒤에 앉은 김부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수술모도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야매의 얼굴은 술기운이 올라 불콰했다.
김부장은 대답 대신 담배만 길게 뿜었다. 적출한 콩팥을 흰 수건 위에다 올려놓으며, 술 취한 야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항생제란 게… 가격도 비싸지만 쓰면 쓸수록 더 독한 약을 찾게 되는 법이라서, 나중에 가면 병이 사람을 잡는 게 아니라 약이 사람을 잡게 되지….
-………
-비슷한 거 같지 않나? 그러고 보면…. 사채나 약이나…
-아, 거 되게 말 많네! 작업이나 빨리 끝내쇼!
야매가 조용해지자, 김부장은 네 대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붙이는 손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김부장은 흠칫 놀라 자기 손을 살폈다. 붕대에 얼룩처럼 피가 번지고 있었다. 담배를 문 김부장의 입주변이 일그러졌다.
수술이 끝나자, 김부장은 콩팥 하나를 압류당한 채무자를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제 집으로 실어다놓으라고 깍지에게 시키고 자신은 콩팥값을 받기 위해 야매를 따라 은행으로 갔다.
합법적 기증이 아닌 불법거래이기에 매매는 당일 즉시 완료된다. 인간의 장기는 곧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당기유동성이 큰 자산 축에 속했다.
돈다발이 가득 든 검은 돈가방을 넘겨받은 김부장은 액수를 확인하곤 매서운 눈초리로 야매를 노려봤다.
-작은 거 세 장 모자라잖아!
-원장한테 얘기해. 브로커가 안 껴도 수술비는 내야한대.
니미… 야매 주제에…
김부장은 욕을 씹으며 돈가방을 챙겨 은행 문을 나섰다.
차는 깍지가 가지고 갔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가에 서있는데,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은 중형 외제차 한 대가 끽-서더니 차문이 열리고 뜻밖의 불청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부장의 부하인 깍지가 그들에게 붙잡혀있었다.
-여, 김부장. 드디어 한 놈 골로 보냈더만.
썬그라스를 쓴, 키 작은 사내가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뚜벅뚜벅 걸어와 김부장의 손에 들려있던 돈가방을 뺏어갔다. 마치 제 돈을 찾아가듯 그의 행동은 정당해보였다.
당황한 김부장이 저항하려하자 썬그라스가 달고 나타난 덩치 큰 건달들이 그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봐, 평부장! 그건…
-알아. 자네 딸 병원비겠지. 그래도 남의 돈 가지고 돈장사했으면 그것부터 갚아야지. 초짜처럼 굴지 마, 잘 아는 사람이. 허허…
그는 태연히 김부장의 말을 가로챘다.
-손은 왜 그래? 요새도 말 안 듣는 채무자들 조질 때 연장 안 쓰나? 사람 참 미련하긴…
평부장이 붕대 감긴 김부장의 두 손을 턱짓하며 혀를 끌끌 찼다. 김부장은 독기서린 표정만 지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평부장은 그 자리에서 돈가방을 열어 액수를 세어보곤 가방을 다시 닫더니 부하들을 시켜 깍지를 놓아주게 했다. 놈들은 씹던 껌을 뱉어내듯 깍지를 길바닥 위에 내팽개쳤다.
-야야, 살살 다뤄라. 걔라도 없으면 우리 김부장님 주말에 수금도 자기가 다 뛰어야 된다.
키득거리던 평부장이 다시 김부장을 쳐다봤다.
-아직 한참 남았어. 너무 야속하겐 생각 마. 자네도 잘 알잖나. 정에 휩쓸리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 빚이 빚을 부르는 거지… 안 그래?
애들 보내기 전에 이자부터 막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평부장은 김부장의 어깨를 한번 툭툭 두드린 뒤에 끄나풀들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그 광경을, 김부장은 허탈하게 바라봤다.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든 깍지가 옹색하게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고객장부랑, 신장 빼낸 놈 채무증서 갖다놓으러 사무실에 갔다가 그만…
-……병신 같은 새끼.
-……어? 부장님, 손이…
김부장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권투선수처럼 칭칭 감아놓은 붕대에서 붉은 피가 스며져 나와 보도블록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김부장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그는 한쪽 발을 들어 다른 쪽 무릎 위에 걸치고 신을 벗었다. 양말이, 역시 피로 흥건했다.
김부장, 드디어 폭발한 듯 들고 있던 신발을 있는 힘껏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에이! 씨팔!
서로 팔짱을 끼고 지나가던 여대생 둘이 놀라서 옆걸음을 쳤다. 줄서서 택시를 기다리던 시민들이 김부장 쪽을 힐끔거렸다. 신호등에 막혀 정체된 4차선 도로는 빵빵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쭈그렁 할매가 지키고 있는 가판대 위엔, 한국축구대표팀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기사와 사진을 똑같이 1면에 박아 넣은 신문들이 우르르 진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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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김부장은 수현이의 병실로 들어가 딸을 만났다. 항생제 주사를 맞는 날이면 어김없이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수현이는 다행히 깨어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11살밖에 안된 작은 몸이 뼈만 남아 앙상했다. 독한 약을 많이 쓴 대가로 몸에 있는 털은 다 빠져서, 수현이는 실내에서도 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눈썹도 없이 희멀겋기만 한 얼굴에서, 그래도 두 눈만은 초롱초롱 생기가 감돌았다.
언제나처럼, 김부장은 수현이가 자신을 만질 수 없도록 침대의 발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자기한테 묻은 더러운 병균이 딸에게 옮겨질까 두려운 것이다.
-아빠, 손 아직 안 나았어?
-응? 아, 뭐… 그렇네. 곧 낫겠지 뭘.
-……근데 표정이 왜 안 좋아? 무슨 일 있구나.
-일은 무슨… 임마, 넌 네 걱정만 해. 아빤 너만 아무 일 없으면 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김부장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아빠. 나, 전에 아빠가 사다준 크레파스로 그림 그렸다. ……이거 봐.
도화지를 펼쳐서 보여준 딸의 그림은 ‘파란나라’였다. 하늘색 구름 위에 삐뚤삐뚤 선들로 그려진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서있고, 구름 아래에는 넥타이를 맨 남자가 울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현이는 그것이 아빠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좀 있으면 엄마처럼 하늘나라로 갈 거니까. 땅에 혼자 남게 된 아빠는 서러워서 우는 거야.
수현이는 농담을 하듯 즐거운 얼굴로 설명했다. 하지만 김부장은 웃을 수 없었다.
-수현아.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넌 나을 수 있어. 지금 낫고 있는 중이고! 아빠는 절대로…
그때, 의사가 들어왔다. 대동한 간호사가 약쟁반을 받쳐 들고 수현이에게 다가갔다.
-수현아, 약 먹자.
-아, 나 그거 진짜 싫은데…
우는 소릴 하는 딸을 간호사에게 맡겨두고, 김부장은 의사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상황이 좋질 않습니다.
진찰실에서, 자기자리에 앉은 의사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현이의 병이 의료보험적용이 안 된다는 건 아시죠…
큰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 앉은 김부장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선천성면역결핍증이라던가… 전국에서 40명밖에 안 걸리는 희귀병이라고 했다. 복잡한 설명은 차치하고, 희귀병이기에 소수만 걸리는 것이고 그 소수를 위해 국민 다수가 보험료를 더 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이 나라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수현이의 병은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선천성면역결핍증 환자는 선천적으로 질병에 대한 면역기제를 못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항생제와 항진균제 없이는 며칠도 버티지 못한다. 반코마이신, 브이펜드, 보리코나졸, 암비솜, 캔시다스… 이름도 낯선 주사약들은 한 팩에 10~30만원으로 약값만 하루 80만원, 한 달 700~800만원에 이른다.
다섯 살 때부터 병원신세를 진 수현이의 입원기간은 만 5년 째. 김부장은 고리대금업으로 번 돈의 대부분을 딸의 치료비로 썼다. 그것도 모자라, 월 15%의 이자로 자신의 사업자금을 대주던 평부장에게서 28%나 되는 고율의 추가신용대출을 받아 매달 들어가는 특수검사비를 충당했지만, 새로운 약값과 새로운 검사비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김부장의 목을 조였다.
김부장은 수현이의 담당의가 자신을 불러다 앉혀놓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있었다. 김부장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이 병원에도 빚을 지고 있군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밀린 치료비는 이번 달 안에 꼭 지불하겠습니다.
-……김선생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집에 가면 수현이만한 아들녀석이 있거든요. 하지만 더 이상 연체가 발생하면 투약을 멈출 수밖에 없다고… 위에선 그렇게 결정이 됐나 봅니다.
김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돈… 그놈의 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쇼.
수현이 얘기가 끝나자, 의사는 김부장의 손발에 난 상처에 관심을 보였다. 김부장은 며칠 전에도 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였었다. 꼭 누가 거기다 대고 못질을 해놓은 것처럼 김부장의 양손과 양발에는 구멍이 하나씩 뻥뻥 뚫려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김부장 자신도 모르겠다고,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침대가 온통 피로 물들어있었다는 김부장의 말에 의사는 그때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유했었다.
-분명 외상은 아닌데…. 검사결과를 보면 김선생님의 몸은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창이 왜 저절로 생긴 건지 저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벌써 보름째입니다. 피가 멎지 않아요.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김부장의 말에 의사는 한동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김부장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김선생님. 혹시…… 종교가 있으십니까?
잠시 후, 김부장은 병원 바깥벤치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딸의 담당의가 자신에게 제안한 내용은 희한했다.
지금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성흔(聖痕)도 그중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의 두 손과 두 발에는 못자국이 생겼는데, 그 후 예수를 믿는 신도들 가운데 아무런 연유도 없이 예수와 같은 상흔이 신체에 생겨난 사례가 전설처럼 존재한다. 이것을 성흔이라고 부른다.
의사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성당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신부에게 김선생의 상처를 한번 보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어쩌면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해줄 지도 모른다.
-성흔은 무슨…
김부장은 꽁초를 바닥에 팽개치고 일어섰다. 다시 딸을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간다.
병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김부장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바로 그의 노예 즉, 골수채무자 중 한 사람인 박노인을 본 것이다. 접수창구에서 입원수속을 밟고 있는 그의 뒷덜미를 김부장이 낚아챘다.
-여, 이게 누구신가?
-아, 아니?
-잠깐 실례하지…
간호사에겐 미소로서 양해를 구한 뒤, 김부장은 거의 끌고 가다시피 박노인을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
김부장이 노인의 멱살을 붙잡고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들이랑 연락 끊겼다고 나까지 멀리하려고 그랬나? 장사하러 가기 전에 매일 내 사무실 들려서 그날그날 이자부터 받치라고 했지? 오늘이 벌써 며칠 째야!
-미안해…, 김부장. 마누라가 아파서 그동안 쉬었어. 이것 좀 놓고 얘기하게나.
-여편네가 아프다고? 이 병원에 입원했나?
박노인은 괴로운 얼굴로 끄떡였다. 김부장이 그를 잡아당기더니 비상구 쪽으로 확 떠밀었다.
-앞장서.
-이보게, 김부장…
-빨리! 마누라하고 사이좋게 입원하고 싶엇?!?!
박노인은 별 수 없이 아내의 병실로 향했다. 김부장이 그를 따라갔다.
병실에 다다라서, 김부장의 얼굴이 뭐 씹은 사람마냥 일그러졌다. 박노인은 수현이의 병실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수현이는 아빠가 평범한 은행원인 줄 알고 있었다.
박노인의 아내가 누워있는 병실에서, 김부장은 불량배처럼 난동을 부렸다. 독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김부장은 언성을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빚 갚을 돈도 없다면서 병원은 어떻게 왔느냐고, 김부장은 박노인 내외를 몰아붙였다.
마침내 할머니가 침대에 앉아 눈물을 터뜨리자 김부장은 마지막으로, 박노인이 아내 먹이려고 사온 죽을 빼앗아 병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아빠, 아까 옆방이 왜 그렇게 시끄러웠어? 아빠 소리도 들린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이 그렇게 물었다.
김부장은 어제 축구 재방송 하나보다 둘러대곤, 병원 휴게실 전자레인지로 데여온 죽을 딸에게 내밀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아앙… 죽은 이제 지겨워.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수현이 병 다 나으면 아빠가 우리 수현이 먹고 싶다는 거 다 사줄게. 그러니 지금은 이거 먹자. 많이 먹어야 병도 빨리 낫는 거예요.
어린 딸은 그제야 한 숟갈씩 들기 시작했다.
김부장은 조용히 지켜봤다.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널 지킬 수 있다…….
피투성이 그의 손이, 파란 이불로 덮인 딸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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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안데르센도 알고요…
저 무지개 너머… 파란나라 있나요…
저 파란하늘 끝에… 거기 있나요…
동화책 속에 있고… 텔레비전에 있고…
아빠의 눈에, 엄마의 꿈속에 언제나 있는 나라…
꿈에서 그런 노랫소리가 들린 것 같다. 딸이 좋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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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딸의 병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김부장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딸을 까무러치게 만들고 말았다.
-아, 아빠… 피… 피…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김부장의 얼굴이 온통 피칠갑이었던 것이다.
수현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김부장은 미친 듯이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수현이를 깨우는 동안, 수현이의 담당의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의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이유 없이 피범벅이 된 김부장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부장은 딸이 깨어나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병원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니까, 이게 성흔이 아니란 말이요?
근처의 성당에서, 김부장은 신부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신부는 곤혹스럽지만,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제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오체성흔은 신자에게, 그것도 가장 거룩한 주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은총입니다.
-웃기고 있네. 난 그딴 거 모르겠고. 그래서? 이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을 못 하시겠다?
-설령 그게 진짜 성흔이더라도 치료방법 같은 건 없습니다. 어느 날 저절로 생겨났다가 저절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주님의 손길로 알고 평생 감사히 받아들이며 살아야하는 게 성흔이지요. 병원엔 가보셨습니까?
쾅! 김부장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감사는 개뿔이…
험한 말을 내뱉고 그 자리를 뜨려는 김부장을 신부가 잠시 멈추게 했다.
-어쩌면 형제님을 이리로 부르신 신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고해를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갈수록 가관이었다. 김부장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성당을 나왔다.
밖에는 김부장의 연락을 받은 깍지가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선 전화가 와서 딸이 점점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김부장은 뒷좌석에 타자마자 깍지에게 박노인의 소식부터 물었다.
-오늘도 안 왔는데요.
-씨발 영감탱이가 진짜 미쳤구만. 야, 그 새끼 포장마차 있는 데로 가.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말라고 했지. 김부장은 박노인의 생계수단인 스뎅마차부터 압류하고, 담보로 잡고 있던 그 자리의 영업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박노인이 장사하는 포장마차 골목에 도착한 김부장의 눈앞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구청에서 보낸 용역철거반이 거기 모인 노점상들을 불시에 습격해 강제로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용역들은 한결 같이 붉은 모자와 흰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전부 젊은 놈들이라 개중에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걸친 자가 꽤 있어서 철거반은 온통 붉은 집단처럼 보였다.
수십 개의 해머에 박살난 포장마차 잔해와 엎어진 오뎅국물 떡볶이 위에서 상인들은 주저앉아 목 놓아 울거나, 나부터 죽이라며 용역들의 허리춤을 붙잡고 매달렸다.
박노인은 전자 쪽에 속해있었다. 망연자실 땅만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김부장이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보면 모르겠나.
박노인의 머리 위로, 멀리 세워져있는 월드컵 경기장이 보였다. 이 도시에서도 월드컵 본선 몇 경기가 치러지기로 결정되자 나라에서 큰 돈을 들여 지난 해 완공한 것이었다. 월드컵을 보러 이 도시를 방문할 외국인 손님들에게, 길거리에서 잡스런 먹거리나 파는 불법노점상들이 나라는 부끄러운 것이다. 겉으로는 도시미관을 해치고 시민들의 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왜 여긴 조용하나했다… 니기미…
김부장은 박노인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어떻게 할 거야? 7천만 원.
김부장은 자기 사무실 책상에 앉아 무시무시하게 생긴 나이프로 직접 사과를 깎아 먹으며 박노인에게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소리를 꽥 지른다.
-어떻게 할 거냐고!
-………
-후…. 이건 다 늙어서 원양어선에 팔아버릴 수도 없고….
-그건 내 빚이 아니네….
-뭐?
-내 빚이 아니야. 내 아들이 자네한테 빚진 거지.
-당신이 보증 섰잖아!
쾅! 나이프가 책상에 꽂혔다. 그래도 박노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꿈쩍도 안 했다.
-어쨌든 난 이제 완전히 망했네. 이젠 더 이상, 우리 할망구 병수발도 못 들게 생겼어. 돈을 돌려받고 싶거들랑 내 아들한테 받어.
-그러니까 당신 아들 찾아오라고! 그 아들도 나한테 빌린 돈으로 사업하다 다 말아먹고 잠수 탔다고 네가 그랬잖아!
김부장이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박노인이 말했다.
-그게…… 아닌 모양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실은 얼마 전에, 내 며느리였던 아이로부터 전화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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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장은 차를 몰고, 비 내리는 고속도로 위를 총알 같이 달렸다. 조수석엔 박노인이 타고 있었다.
박노인의 아들은 부모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김부장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다. 제 부모한테까지 사업자금이라고 뻥을 깠지만, 실은 그 돈을 가지고 경기도 신도시 부근의 땅을 노리는 투기단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 땅의 일부가 도로건설로 허가가 나면서 땅 투기는 대박을 쳤고 투기단은 수십 배나 되는 시세차익을 남겼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현금을 손에 쥔 아들은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마저 내팽개치고 한국을 뜨기 전에,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전 부인을 찾아가 자신의 성공을 과시했던 모양이다.
모든 사실을, 아들의 투기단이 주로 이용한 부동산거래업소에서 다 확인한 김부장은 한동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미친 사람처럼 휴대폰을 꺼내들고 깍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의 출국사실을 확인하라고 지시했지만, 30분 뒤 전화를 걸어온 깍지는 절망적인 말만 늘어놓았다.
-출입국사무소에서는 본인이 아니면 출국확인 같은 건 절대로 안 해준답니다. 그래서 제가 공항에서 일하는 아는 녀석한테 전화를 걸어봤는데요. ……박도식. 주민번호 710302…… 탑승일…… X일X시…… 미국으로 날은 거 맞습니다.
-야! 그 새끼 신용불량자잖아! 신불자가 그렇게 맘 놓고 비행기 탈 수 있단 말이야?
-신불자라도 금융기관 이용하는 거 외에는 아무 제한이 없답니다. 여권발급, 해외여행 모두 가능합니다.
-………
씨발, 당했다…. 설마 제 부모까지 팔아버릴 깡다구였을 줄이야….
바깥에서 전화를 받고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와 보니, 박노인은 아들한테 빚을 내준 다른 채무자들한테 멱살잡이를 당하고 있었다.
-개새끼! 네 아들놈 어디 있어?!?
-자식교육 참 잘 시켰다! 망할 영감탱이, 네가 대신 갚아!
김부장은 채권자들을 밀어붙이고 박노인을 빼냈다. 그 덩치와 인상에 짓눌려, 채권자들은 김부장을 두곤 찍소리도 못했다.
김부장은 박노인을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저녁에 비가 그쳤다.
김부장과 박노인은 다시 나란히 차를 타고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또 한참을 운전대에다 대고 화풀이를 한 뒤라, 김부장도 진이 다 빠져버렸다. 박노인이 품속을 뒤져, 쌈짓돈 같이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펴도 되겠나?
김부장은 귀찮은 듯이 스위치를 눌러 운전석과 조수석의 윈도우를 내렸다. 그리고 자기도 한 대 꺼내 물었다.
박노인이 자기 몸 어딘가에 둔 라이터를 찾지 못하자, 김부장은 짜증스런 투로 350원짜리 빨강라이터를 휙 던졌다. 박노인은 그걸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딸이 참 예쁘더군. 병원에서 봤네.
-………
-우리 아들도 어릴 때 아팠어. 매일 병원에 있느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
박노인은 한숨처럼 담배를 길게 내뿜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놈한테 부모로서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었는데….
잘 되긴 개뿔이….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김부장은 화풀이처럼 그 입에 다시 담배를 물고 길게 빨았다.
박노인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타 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얼굴을 아래로 처박고 소리죽여 울었다.
김부장은 욕을 씹긴 했지만 모르는 체 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젖은 어둠 속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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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병원에서 김부장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투약중지처분조치라는 병원의 최후통첩이었다. 병원의 급여결산일 전까지 3천만 원이 넘는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수현이는 더 이상 약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김부장은 간호사가 옷깃을 잡아끄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료실에 들어가 딸의 담당의를 기다렸다.
담당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김부장은 진료실을 나와 딸의 병실로 들어갔다. 수현이는 오늘따라 표정이 밝아보였다.
-밥…… 먹었니?
응.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수현이는 책꽂이 겸 탁자 위에 올려진 플라스틱 죽통을 보았다. 며칠 전에, 김부장이 수현이에게 가져다준 것과 똑같은 음식점의 용기였다.
-옆방에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퇴원하면서 사다주고 가셨어. 되게 좋은 분들 같더라. 그분들이 내가 모르는 아빠 얘기도 이따만큼 해줬어.
김부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 뭐라고 했는데?
수현이는 새침한 눈으로 아빠를 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빠도 반칙이야. 그렇게 좋은 일만 하고 다녔으면서 왜 나한텐 입도 벙긋 안 해? 그분들이 어려울 때 아빠가 돈 빌려줘서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며? 그리고 실종된 아들 찾는 것도 아빠가 나서서 대신 해결해줬다고 하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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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실 환자 중에 보호자 이름이 박희순인 양반 있죠? 오늘 퇴원했다던데.
-네. 퇴원하셨어요.
-왜 퇴원한 겁니까? 병명이 뭐였죠?
-그건 알려드릴 수 없는데요…
-아, 친척입니다. 못 사는 분들이라 제가 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러는데 통 사정 얘기를 안 하시네요.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김부장은 접수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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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인의 아내는 고혈압을 동반한 당뇨에, 관절염, 만성간염까지 앓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는 몸이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선 역시 돈이 필요했다.
입원비도 내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병원은 요양원을 추천하는 척 은근히 퇴원을 요구했고, 마침내 끼니마다 넣어주던 식사도 끊기자 노인들은 더 견디지 못하고 짐을 쌌던 것이다.
-노친네들……
김부장은 병원 벤치에 앉아 파란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는 깍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박씨영감은 틀렸다. 그건 똥 밟은 셈 치기로 하고… 지금 우리 채무자들 중에 3천만 땡길 수 있는 놈 없겠냐?
-부장님……, 아시면서 그렇게 물으십니까. 우리 털들은 잠수 타거나 죽은 놈들 빼면 영감까지 합쳐서 얼마 되지도 않잖습니까. 그리고 다 쪼가리들이라 이자도 못 내는 놈들인데요.
깍지의 목소리는 부어있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부장님……. 제 월급도 세 달치나 밀렸는데요.
-씨발. 알고 있어! 누가 그거 떼먹는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새끼가…
탁! 김부장은 휴대폰 폴더를 거칠게 닫아버렸다.
-어머? 저 사람 좀 봐…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이 김부장을 힐긋거렸다. 김부장은 그제야 자기 머리에서 또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발도 마찬가지…
-………이거 진짜 돌겠네.
김부장은 땀을 훔치듯 피를 닦으며 병원 앞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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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문이 열린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공간에 빛이 쏟아진다. 그 빛을 등진 채 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김부장이었다.
김부장은 정면 높은 곳에 보이는 예수상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아들.
-니미, 좆 같은 거!
김부장이 그 예수상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온갖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의 괴상망측한 행동은 소란을 듣고 신부가 뒤에 나타나기까지 계속 됐다.
신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다 쏟아낸 김부장이 그를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김부장은 야매의사 앞에 앉아있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줄담배를 뻑뻑 피어대고 있었다.
사정을 다 들은 야매는 자기도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필요한 돈이 얼만데? 수현이 치료비가…
-왜? 영감이 빌려주시게? 됐쑤다. 더 이상 누구한테도 빚지고 싶지 않소. 씨발, 어차피 한번 왔다 하번 끝나는 인생 나도 막판까지 가보기로 했소.
-………
수술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옛날에, 술 때문에 의사면허를 박탈당했다는 야매는 그날따라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수술대 앞에 섰다. 생전 안 쓰던 수술모와 마스크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꼭 이래야 하나?
-……평부장 그 새끼한텐 비밀로 해주시오.
야매는 고개를 끄떡였다. 김부장은 눈부신 전등빛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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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땐 저녁이었다. 김부장은 벌거벗은 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 옆구리가 쑤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옷걸이에 걸어둔 옷을 입는다.
야매가 미리 준비해둔 돈가방을 김부장에게 내밀었다. 액수를 확인해보니, 수술비가 안 빠져있었다.
-당분간은 술 담배 다 금하게. 아침저녁으로 이 약 한 첩씩 챙겨먹어. 깍지에겐 내가 연락해뒀네.
-……고맙쑤다.
김부장은 돈가방을 들고 건물을 나왔다. 멀리서 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불빛과 환호성이 이따금씩 다가왔다.
깍지가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김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오늘 프랑스랑 마지막 평가전 하잖습니까.
주인 만난 똥개마냥, 깍지는 그날따라 살살거렸다.
-돈은 제가 들겠습니다.
-됐어. 차는 어따 뒀어?
김부장은 먼저 앞장섰다.
-부장님.
-억!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지자 김부장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돈가방을 놓쳤다. 깍지가 그걸 들고 튀기 시작한다.
김부장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 쫓는다.
-……도, 도둑이야! 저 새끼 잡앗!
깍지는 골목을 빠져나와 시청 앞 광장으로 도망쳤다. 거리응원을 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인파들로 광장은 북적였다. 죄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깍지가 그 속으로 숨었다.
김부장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미친 듯이 깍지를 찾았다. 환호와 박수소리로 주위는 온통 빨갛게 들끓고 있었다.
김부장은 옆모습과 뒷모습이 닮은 놈들을 일일이 잡아채 얼굴을 확인했다. 깍지가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골이 터졌다.
귀가 멍해지는 함성과 함께 광장에는 붉은 풍랑이 일어나는 듯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깍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깍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씨팔! 엿 같은 나라!
김부장이 하늘에 대고 울부짖었다. 한국 선수가 헤딩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이 재연되면서, 다시 함성이 폭발했다. 김부장의 소리는 거기에 묻혔다.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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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차암… 뻔뻔하구만.
평부장은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 위에서 김부장을 올려다봤다. 김부장은 굴욕을 삼키는 듯한 얼굴로 평부장 앞에 서있었다. 평부장의 사무실 안이다.
이자는 얼마나 되도 좋으니 3천만 더 땡겨줄 수 없겠느냐는 김부장의 말에, 평부장은 어이없다는 식의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형님.
김부장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콧방귀가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평부장은 자기 책상에 팔을 걸치고 김부장을 내려다봤다.
-나 따라다니며 일 배울 때가 좋았지? 네가 나 뒤통수 얻어맞게 하고 내 나와바리 바로 옆에 개집 차렸는데도 내가 왜 네 사업자금 대준 건 줄 알아? 나중에 가면, 이렇게 될 줄 다 알았기 때문이야.
-………
-못 줘. 아니, 안 줘. 네가 나한테 빚진 돈이 얼만데. 그거 다 못 갚겠으면 네 딸년보다 먼저 뒈지든가 알아서 해.
김부장이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봤다. 평부장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곤 금으로 만든 담뱃갑에서 비싼 시가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못하겠으면 네 딸 오장육부라도 떼어서 팔든가. 걔 어차피 얼마 못 가잖아.
아아악! 김부장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평부장을 바닥에 때려눕혀 버리곤 구둣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평부장의 부하들은 전부 밖에 있었다.
김부장은 평부장의 호주머니를 뒤져 열쇠꾸러미를 찾았다. 그걸로 사무실에 비치된 금고문을 따고 옆에 있던 서류 가방에 현금만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평부장이 벌레처럼 부들거리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자, 김부장은 한 번 더 놈의 면상을 걷어차곤 사무실을 나섰다.
평부장의 부하들이 수금을 마치고 돌아오다 김부장과 마주쳤다. 김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체하며 지나쳤다. 그때, 평부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바닥에 엎어진 채로 고함을 질렀다.
-저 개새끼 담가!
김부장은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갔다. 부하들이 흉기를 들고 우르르 쫓아왔다. 차에 타 시동을 건 다음 그곳을 뜨려는데 심복 중 한 놈이 배짱 좋게 차 앞을 막아섰다. 김부장은 그대로 박아버리곤 그곳을 탈출했다.
그는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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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머릿속에 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김부장은 돈가방을 든 채, 딸의 주검 앞에 서있었다.
낮잠을 자다가 숨을 거뒀다는 딸의 얼굴은 평안해보였다. 면역이 없어 온갖 병마에 시달린 탓에 기력부진으로 생명이 다한 것 같다는 의사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척 중에 죄송한 말씀이지만, 병실이 꽉 차서 수현이를 지금 영안실로 옮기려고 하는데 이해해주시길 바란다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한 채 김부장은 수현이의 침대 옆에 놓여있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파란나라’였다.
넥타이를 맨 아빠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수현이와 엄마는 파란구름 위에서 손을 잡고 해님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따님 소지품은 직접 챙겨 가시면 됩니다. 그럴 생각이 없으시면 병원에서 알아서 소각해줄 겁니다.
김부장은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돈가방을 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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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티를 입은 리포터가 축제의 거리에 나와 있었다. 한국팀은 세계최강 프랑스를 맞아 분전했지만 3대2로 아쉽게 패했다고 리포터는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패한 경기였지만 한국팀은 지난 번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경기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고 경기내용에 만족한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이밀자, 꼬마도 학생도, 회사원도 흥분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었다. 모두 붉은 티를 입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자 뉴스데스크의 아나운서들이 나타나, 우리나라가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다는 것은 곧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문가까지 불러다 앉혀놓고 월드컵 개최가 가져다주는 유무형의 경제창출효과를 설명했다.
나라는 이미 축제에 푹 빠져있었다. 붉은 행진이 시가지를 누비며, 깨끗이 청소된 옛 포장마차 골목을 지나갔다. 카메라와 리포터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응원단이 해산되고 거리가 텅 비자, 붉은 티를 입은 취객들이 주차된 승용차에 술병을 때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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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가 가고 싶어 한 파란나라에는 엄마가 없었다. 수현이의 엄마는 김부장이 철모르는 뜨내기 건달 시절에 룸살롱에서 만난 약물중독자였다. 여자가 평부장에게 진 빚을 함께 갚아주는 조건으로 동거를 시작했고, 애가 생겼는데도 여자는 중절이 무섭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책 없이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애를 배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는 술과 담배, 마약을 끊지 않았다. 그렇게 수현이는 태어났고 여자는 애를 낳자마자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딸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거짓말을 해왔던 것이다.
수소문을 해보니, 동거남과 딸에게서 도망쳤던 그 여자는 또 어디서 남자를 호리다가 결국 마약사범으로 체포돼 감옥에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죽었어도 천국은 못 갈 여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김부장은 검은 강물을 바라보며 혼자 강변에 앉아있었다. 그럼 수현이는 천국에서도 혼자 쓸쓸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네가 바라던 행복이 거기엔 있는 거냐…
자정이 넘어서야 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삶의 이정표가 다 사라진 뒤였다.
자신의 차로 돌아온 김부장을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있던 그는 순식간에 다가와 시퍼런 칼로 김부장의 배를 찔렀다.
억… 소리와 함께 김부장은 자기 차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를 찌른 자는 피 묻은 칼을 떨어트리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리 위의 불빛이 그자의 얼굴을 비췄다.
얼마 전, 김부장에게 콩팥 한쪽을 뺏긴 그 채무자였다.
-이…… 씨발…… 새끼……
김부장이 이를 갈며 노려보자, 채무자는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김부장은 놈을 뒤쫓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힘겹게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돈가방은 조수석에 던져뒀다. 배에서 피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아직은…
그는 차를 몰고 어딘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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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박노인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단칸방은 밤에는 아예 칠흑으로 뒤덮였다. 더듬더듬 불을 켜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쳤다. 메리야스 차림으로 문을 열었는데, 사람은 없고 검은 007가방만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황당한 얼굴이 된 박노인은 가방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열어봤다.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만원짜리 뭉치가 그 안에 가득 담겨있었다. 박노인도, 뒤에 서있던 아내도 잠이 확 달아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거…… 피 아냐?
박노인은 자신의 손을 보고서야 알아챘다. 검은 돈가방이 온통 피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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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새벽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이 예배당 끝에 위치한 제대까지 이어져있었다. 제대 너머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있었고 제대를 밝히고 있는 촛불들 사이로 한 사내가 주저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사내는 피투성이였다.
신부는 성경을 품에 안고 빠르게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김부장은 고개를 들었다. 거의 죽어가는 얼굴이 피로 흥건했다.
김부장은 자신의 양복 웃옷 한쪽을 벌려, 그 뒤에 숨어있던 치명상을 드러냈다. 신부가 눈을 부릅뜨자, 그는 힘없이 웃었다.
-이건 성흔이 아닙니다…
-………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신부는 김부장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일단 병원으로 갑시다. 내가 차를 부르겠소. 말하는 그의 손을 김부장이 덥석 붙들었다. 신부가 그를 쳐다봤다. 김부장이 말했다.
-신부님……… 천국이 파랗습니까? 천국이요……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부장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쓸쓸히 웃었다. 눈물과 웃음이 함께 흘러내렸다. 피는 멎지 않았다.
장르 : 미스터리 드라마
한 줄 소개 : 신을 믿지 않는 한 악덕 사채업자에게 성흔(聖痕)이 생겼다.
<이야기>
새로운 천년의 세 번째 봄.
한 달 뒤면 이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외국인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의 친선경기나 평가전이 있을 때마다, 거리는 연이어 붉은 물결로 가득 찼다. 붉은 색을 싫어하는 이 나라 정서와는 심하게도 안 어울리는 일이었다.
하긴 축구와 이념은 상관이 없지…
축구가 국민을 하나로 묶든 이념이 민족을 속량하든, 여기가 자본주의 국가든 빨갱이 공산국가든… 받을 돈은 받아야 했다.
그것이 김부장이 하는 일이다.
그는 세 대째 담배개피에 불을 붙였다. 불붙이는 두 손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붕대가 감긴 오른손에 ‘신체포기각서’라고 적힌 흰 종이쪼가리가 쥐어져있다.
낡고 음침한 건물 안. 수술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억쯤 되는 도박 빚을 진 채무자는 처음에 여기로 끌려와서 살려 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완강히 저항했다. 놈의 사지를 침대에 묶느라 김부장과 깍지가 애를 먹었다.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던 늙은 야매시술자는 느긋하게 흰 가운을 걸치며 수술도구 등을 챙겼다.
마취주사 한방에 골아떨어진 채무자의 배를 째고 신장 하나를 강제로 적출한 것이다.
각막 하나에 이천만원, 신장 하나에 오천만원. 간을 자르면 팔천만원.
간을 자를까 하다가, 도박과 술에 절어 살던 놈이라 제 값을 못 받을 것 같아 신장을 택했다.
-나머지는 네가 벌어 갚아. 두 달 준다. 또 잠수 타려다 걸리면 다음은 네 눈알 두 쪽이야. 명심해.
주사를 맞고 서서히 잠들어가는 놈의 면상을 ‘신체포기각서’로 툭툭 내려치며 김부장은 그렇게 경고했다.
-딸애는 좀 어때? 밀린 약값은 해결 됐나? 자네, 요새 들어 더 독해진 거 같군…
야매가 혼자 수술을 진행하며, 뒤에 앉은 김부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수술모도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야매의 얼굴은 술기운이 올라 불콰했다.
김부장은 대답 대신 담배만 길게 뿜었다. 적출한 콩팥을 흰 수건 위에다 올려놓으며, 술 취한 야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항생제란 게… 가격도 비싸지만 쓰면 쓸수록 더 독한 약을 찾게 되는 법이라서, 나중에 가면 병이 사람을 잡는 게 아니라 약이 사람을 잡게 되지….
-………
-비슷한 거 같지 않나? 그러고 보면…. 사채나 약이나…
-아, 거 되게 말 많네! 작업이나 빨리 끝내쇼!
야매가 조용해지자, 김부장은 네 대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붙이는 손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김부장은 흠칫 놀라 자기 손을 살폈다. 붕대에 얼룩처럼 피가 번지고 있었다. 담배를 문 김부장의 입주변이 일그러졌다.
수술이 끝나자, 김부장은 콩팥 하나를 압류당한 채무자를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제 집으로 실어다놓으라고 깍지에게 시키고 자신은 콩팥값을 받기 위해 야매를 따라 은행으로 갔다.
합법적 기증이 아닌 불법거래이기에 매매는 당일 즉시 완료된다. 인간의 장기는 곧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당기유동성이 큰 자산 축에 속했다.
돈다발이 가득 든 검은 돈가방을 넘겨받은 김부장은 액수를 확인하곤 매서운 눈초리로 야매를 노려봤다.
-작은 거 세 장 모자라잖아!
-원장한테 얘기해. 브로커가 안 껴도 수술비는 내야한대.
니미… 야매 주제에…
김부장은 욕을 씹으며 돈가방을 챙겨 은행 문을 나섰다.
차는 깍지가 가지고 갔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가에 서있는데,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은 중형 외제차 한 대가 끽-서더니 차문이 열리고 뜻밖의 불청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부장의 부하인 깍지가 그들에게 붙잡혀있었다.
-여, 김부장. 드디어 한 놈 골로 보냈더만.
썬그라스를 쓴, 키 작은 사내가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뚜벅뚜벅 걸어와 김부장의 손에 들려있던 돈가방을 뺏어갔다. 마치 제 돈을 찾아가듯 그의 행동은 정당해보였다.
당황한 김부장이 저항하려하자 썬그라스가 달고 나타난 덩치 큰 건달들이 그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봐, 평부장! 그건…
-알아. 자네 딸 병원비겠지. 그래도 남의 돈 가지고 돈장사했으면 그것부터 갚아야지. 초짜처럼 굴지 마, 잘 아는 사람이. 허허…
그는 태연히 김부장의 말을 가로챘다.
-손은 왜 그래? 요새도 말 안 듣는 채무자들 조질 때 연장 안 쓰나? 사람 참 미련하긴…
평부장이 붕대 감긴 김부장의 두 손을 턱짓하며 혀를 끌끌 찼다. 김부장은 독기서린 표정만 지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평부장은 그 자리에서 돈가방을 열어 액수를 세어보곤 가방을 다시 닫더니 부하들을 시켜 깍지를 놓아주게 했다. 놈들은 씹던 껌을 뱉어내듯 깍지를 길바닥 위에 내팽개쳤다.
-야야, 살살 다뤄라. 걔라도 없으면 우리 김부장님 주말에 수금도 자기가 다 뛰어야 된다.
키득거리던 평부장이 다시 김부장을 쳐다봤다.
-아직 한참 남았어. 너무 야속하겐 생각 마. 자네도 잘 알잖나. 정에 휩쓸리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 빚이 빚을 부르는 거지… 안 그래?
애들 보내기 전에 이자부터 막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평부장은 김부장의 어깨를 한번 툭툭 두드린 뒤에 끄나풀들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그 광경을, 김부장은 허탈하게 바라봤다.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든 깍지가 옹색하게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고객장부랑, 신장 빼낸 놈 채무증서 갖다놓으러 사무실에 갔다가 그만…
-……병신 같은 새끼.
-……어? 부장님, 손이…
김부장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권투선수처럼 칭칭 감아놓은 붕대에서 붉은 피가 스며져 나와 보도블록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김부장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그는 한쪽 발을 들어 다른 쪽 무릎 위에 걸치고 신을 벗었다. 양말이, 역시 피로 흥건했다.
김부장, 드디어 폭발한 듯 들고 있던 신발을 있는 힘껏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에이! 씨팔!
서로 팔짱을 끼고 지나가던 여대생 둘이 놀라서 옆걸음을 쳤다. 줄서서 택시를 기다리던 시민들이 김부장 쪽을 힐끔거렸다. 신호등에 막혀 정체된 4차선 도로는 빵빵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쭈그렁 할매가 지키고 있는 가판대 위엔, 한국축구대표팀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기사와 사진을 똑같이 1면에 박아 넣은 신문들이 우르르 진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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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김부장은 수현이의 병실로 들어가 딸을 만났다. 항생제 주사를 맞는 날이면 어김없이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수현이는 다행히 깨어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11살밖에 안된 작은 몸이 뼈만 남아 앙상했다. 독한 약을 많이 쓴 대가로 몸에 있는 털은 다 빠져서, 수현이는 실내에서도 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눈썹도 없이 희멀겋기만 한 얼굴에서, 그래도 두 눈만은 초롱초롱 생기가 감돌았다.
언제나처럼, 김부장은 수현이가 자신을 만질 수 없도록 침대의 발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자기한테 묻은 더러운 병균이 딸에게 옮겨질까 두려운 것이다.
-아빠, 손 아직 안 나았어?
-응? 아, 뭐… 그렇네. 곧 낫겠지 뭘.
-……근데 표정이 왜 안 좋아? 무슨 일 있구나.
-일은 무슨… 임마, 넌 네 걱정만 해. 아빤 너만 아무 일 없으면 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김부장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아빠. 나, 전에 아빠가 사다준 크레파스로 그림 그렸다. ……이거 봐.
도화지를 펼쳐서 보여준 딸의 그림은 ‘파란나라’였다. 하늘색 구름 위에 삐뚤삐뚤 선들로 그려진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서있고, 구름 아래에는 넥타이를 맨 남자가 울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현이는 그것이 아빠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좀 있으면 엄마처럼 하늘나라로 갈 거니까. 땅에 혼자 남게 된 아빠는 서러워서 우는 거야.
수현이는 농담을 하듯 즐거운 얼굴로 설명했다. 하지만 김부장은 웃을 수 없었다.
-수현아.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넌 나을 수 있어. 지금 낫고 있는 중이고! 아빠는 절대로…
그때, 의사가 들어왔다. 대동한 간호사가 약쟁반을 받쳐 들고 수현이에게 다가갔다.
-수현아, 약 먹자.
-아, 나 그거 진짜 싫은데…
우는 소릴 하는 딸을 간호사에게 맡겨두고, 김부장은 의사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상황이 좋질 않습니다.
진찰실에서, 자기자리에 앉은 의사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현이의 병이 의료보험적용이 안 된다는 건 아시죠…
큰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 앉은 김부장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선천성면역결핍증이라던가… 전국에서 40명밖에 안 걸리는 희귀병이라고 했다. 복잡한 설명은 차치하고, 희귀병이기에 소수만 걸리는 것이고 그 소수를 위해 국민 다수가 보험료를 더 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이 나라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수현이의 병은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선천성면역결핍증 환자는 선천적으로 질병에 대한 면역기제를 못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항생제와 항진균제 없이는 며칠도 버티지 못한다. 반코마이신, 브이펜드, 보리코나졸, 암비솜, 캔시다스… 이름도 낯선 주사약들은 한 팩에 10~30만원으로 약값만 하루 80만원, 한 달 700~800만원에 이른다.
다섯 살 때부터 병원신세를 진 수현이의 입원기간은 만 5년 째. 김부장은 고리대금업으로 번 돈의 대부분을 딸의 치료비로 썼다. 그것도 모자라, 월 15%의 이자로 자신의 사업자금을 대주던 평부장에게서 28%나 되는 고율의 추가신용대출을 받아 매달 들어가는 특수검사비를 충당했지만, 새로운 약값과 새로운 검사비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김부장의 목을 조였다.
김부장은 수현이의 담당의가 자신을 불러다 앉혀놓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있었다. 김부장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이 병원에도 빚을 지고 있군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밀린 치료비는 이번 달 안에 꼭 지불하겠습니다.
-……김선생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집에 가면 수현이만한 아들녀석이 있거든요. 하지만 더 이상 연체가 발생하면 투약을 멈출 수밖에 없다고… 위에선 그렇게 결정이 됐나 봅니다.
김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돈… 그놈의 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쇼.
수현이 얘기가 끝나자, 의사는 김부장의 손발에 난 상처에 관심을 보였다. 김부장은 며칠 전에도 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였었다. 꼭 누가 거기다 대고 못질을 해놓은 것처럼 김부장의 양손과 양발에는 구멍이 하나씩 뻥뻥 뚫려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김부장 자신도 모르겠다고,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침대가 온통 피로 물들어있었다는 김부장의 말에 의사는 그때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유했었다.
-분명 외상은 아닌데…. 검사결과를 보면 김선생님의 몸은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창이 왜 저절로 생긴 건지 저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벌써 보름째입니다. 피가 멎지 않아요.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김부장의 말에 의사는 한동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김부장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김선생님. 혹시…… 종교가 있으십니까?
잠시 후, 김부장은 병원 바깥벤치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딸의 담당의가 자신에게 제안한 내용은 희한했다.
지금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성흔(聖痕)도 그중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의 두 손과 두 발에는 못자국이 생겼는데, 그 후 예수를 믿는 신도들 가운데 아무런 연유도 없이 예수와 같은 상흔이 신체에 생겨난 사례가 전설처럼 존재한다. 이것을 성흔이라고 부른다.
의사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성당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신부에게 김선생의 상처를 한번 보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어쩌면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해줄 지도 모른다.
-성흔은 무슨…
김부장은 꽁초를 바닥에 팽개치고 일어섰다. 다시 딸을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간다.
병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김부장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바로 그의 노예 즉, 골수채무자 중 한 사람인 박노인을 본 것이다. 접수창구에서 입원수속을 밟고 있는 그의 뒷덜미를 김부장이 낚아챘다.
-여, 이게 누구신가?
-아, 아니?
-잠깐 실례하지…
간호사에겐 미소로서 양해를 구한 뒤, 김부장은 거의 끌고 가다시피 박노인을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
김부장이 노인의 멱살을 붙잡고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들이랑 연락 끊겼다고 나까지 멀리하려고 그랬나? 장사하러 가기 전에 매일 내 사무실 들려서 그날그날 이자부터 받치라고 했지? 오늘이 벌써 며칠 째야!
-미안해…, 김부장. 마누라가 아파서 그동안 쉬었어. 이것 좀 놓고 얘기하게나.
-여편네가 아프다고? 이 병원에 입원했나?
박노인은 괴로운 얼굴로 끄떡였다. 김부장이 그를 잡아당기더니 비상구 쪽으로 확 떠밀었다.
-앞장서.
-이보게, 김부장…
-빨리! 마누라하고 사이좋게 입원하고 싶엇?!?!
박노인은 별 수 없이 아내의 병실로 향했다. 김부장이 그를 따라갔다.
병실에 다다라서, 김부장의 얼굴이 뭐 씹은 사람마냥 일그러졌다. 박노인은 수현이의 병실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수현이는 아빠가 평범한 은행원인 줄 알고 있었다.
박노인의 아내가 누워있는 병실에서, 김부장은 불량배처럼 난동을 부렸다. 독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김부장은 언성을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빚 갚을 돈도 없다면서 병원은 어떻게 왔느냐고, 김부장은 박노인 내외를 몰아붙였다.
마침내 할머니가 침대에 앉아 눈물을 터뜨리자 김부장은 마지막으로, 박노인이 아내 먹이려고 사온 죽을 빼앗아 병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아빠, 아까 옆방이 왜 그렇게 시끄러웠어? 아빠 소리도 들린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이 그렇게 물었다.
김부장은 어제 축구 재방송 하나보다 둘러대곤, 병원 휴게실 전자레인지로 데여온 죽을 딸에게 내밀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아앙… 죽은 이제 지겨워.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수현이 병 다 나으면 아빠가 우리 수현이 먹고 싶다는 거 다 사줄게. 그러니 지금은 이거 먹자. 많이 먹어야 병도 빨리 낫는 거예요.
어린 딸은 그제야 한 숟갈씩 들기 시작했다.
김부장은 조용히 지켜봤다.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널 지킬 수 있다…….
피투성이 그의 손이, 파란 이불로 덮인 딸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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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난… 안데르센도 알고요…
저 무지개 너머… 파란나라 있나요…
저 파란하늘 끝에… 거기 있나요…
동화책 속에 있고… 텔레비전에 있고…
아빠의 눈에, 엄마의 꿈속에 언제나 있는 나라…
꿈에서 그런 노랫소리가 들린 것 같다. 딸이 좋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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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딸의 병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김부장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딸을 까무러치게 만들고 말았다.
-아, 아빠… 피… 피…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김부장의 얼굴이 온통 피칠갑이었던 것이다.
수현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김부장은 미친 듯이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수현이를 깨우는 동안, 수현이의 담당의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의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이유 없이 피범벅이 된 김부장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부장은 딸이 깨어나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병원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니까, 이게 성흔이 아니란 말이요?
근처의 성당에서, 김부장은 신부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신부는 곤혹스럽지만,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제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오체성흔은 신자에게, 그것도 가장 거룩한 주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은총입니다.
-웃기고 있네. 난 그딴 거 모르겠고. 그래서? 이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을 못 하시겠다?
-설령 그게 진짜 성흔이더라도 치료방법 같은 건 없습니다. 어느 날 저절로 생겨났다가 저절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주님의 손길로 알고 평생 감사히 받아들이며 살아야하는 게 성흔이지요. 병원엔 가보셨습니까?
쾅! 김부장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감사는 개뿔이…
험한 말을 내뱉고 그 자리를 뜨려는 김부장을 신부가 잠시 멈추게 했다.
-어쩌면 형제님을 이리로 부르신 신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고해를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갈수록 가관이었다. 김부장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성당을 나왔다.
밖에는 김부장의 연락을 받은 깍지가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선 전화가 와서 딸이 점점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김부장은 뒷좌석에 타자마자 깍지에게 박노인의 소식부터 물었다.
-오늘도 안 왔는데요.
-씨발 영감탱이가 진짜 미쳤구만. 야, 그 새끼 포장마차 있는 데로 가.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말라고 했지. 김부장은 박노인의 생계수단인 스뎅마차부터 압류하고, 담보로 잡고 있던 그 자리의 영업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박노인이 장사하는 포장마차 골목에 도착한 김부장의 눈앞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구청에서 보낸 용역철거반이 거기 모인 노점상들을 불시에 습격해 강제로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용역들은 한결 같이 붉은 모자와 흰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전부 젊은 놈들이라 개중에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걸친 자가 꽤 있어서 철거반은 온통 붉은 집단처럼 보였다.
수십 개의 해머에 박살난 포장마차 잔해와 엎어진 오뎅국물 떡볶이 위에서 상인들은 주저앉아 목 놓아 울거나, 나부터 죽이라며 용역들의 허리춤을 붙잡고 매달렸다.
박노인은 전자 쪽에 속해있었다. 망연자실 땅만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김부장이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보면 모르겠나.
박노인의 머리 위로, 멀리 세워져있는 월드컵 경기장이 보였다. 이 도시에서도 월드컵 본선 몇 경기가 치러지기로 결정되자 나라에서 큰 돈을 들여 지난 해 완공한 것이었다. 월드컵을 보러 이 도시를 방문할 외국인 손님들에게, 길거리에서 잡스런 먹거리나 파는 불법노점상들이 나라는 부끄러운 것이다. 겉으로는 도시미관을 해치고 시민들의 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왜 여긴 조용하나했다… 니기미…
김부장은 박노인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어떻게 할 거야? 7천만 원.
김부장은 자기 사무실 책상에 앉아 무시무시하게 생긴 나이프로 직접 사과를 깎아 먹으며 박노인에게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소리를 꽥 지른다.
-어떻게 할 거냐고!
-………
-후…. 이건 다 늙어서 원양어선에 팔아버릴 수도 없고….
-그건 내 빚이 아니네….
-뭐?
-내 빚이 아니야. 내 아들이 자네한테 빚진 거지.
-당신이 보증 섰잖아!
쾅! 나이프가 책상에 꽂혔다. 그래도 박노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꿈쩍도 안 했다.
-어쨌든 난 이제 완전히 망했네. 이젠 더 이상, 우리 할망구 병수발도 못 들게 생겼어. 돈을 돌려받고 싶거들랑 내 아들한테 받어.
-그러니까 당신 아들 찾아오라고! 그 아들도 나한테 빌린 돈으로 사업하다 다 말아먹고 잠수 탔다고 네가 그랬잖아!
김부장이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박노인이 말했다.
-그게…… 아닌 모양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실은 얼마 전에, 내 며느리였던 아이로부터 전화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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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장은 차를 몰고, 비 내리는 고속도로 위를 총알 같이 달렸다. 조수석엔 박노인이 타고 있었다.
박노인의 아들은 부모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김부장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다. 제 부모한테까지 사업자금이라고 뻥을 깠지만, 실은 그 돈을 가지고 경기도 신도시 부근의 땅을 노리는 투기단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 땅의 일부가 도로건설로 허가가 나면서 땅 투기는 대박을 쳤고 투기단은 수십 배나 되는 시세차익을 남겼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현금을 손에 쥔 아들은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마저 내팽개치고 한국을 뜨기 전에,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전 부인을 찾아가 자신의 성공을 과시했던 모양이다.
모든 사실을, 아들의 투기단이 주로 이용한 부동산거래업소에서 다 확인한 김부장은 한동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미친 사람처럼 휴대폰을 꺼내들고 깍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의 출국사실을 확인하라고 지시했지만, 30분 뒤 전화를 걸어온 깍지는 절망적인 말만 늘어놓았다.
-출입국사무소에서는 본인이 아니면 출국확인 같은 건 절대로 안 해준답니다. 그래서 제가 공항에서 일하는 아는 녀석한테 전화를 걸어봤는데요. ……박도식. 주민번호 710302…… 탑승일…… X일X시…… 미국으로 날은 거 맞습니다.
-야! 그 새끼 신용불량자잖아! 신불자가 그렇게 맘 놓고 비행기 탈 수 있단 말이야?
-신불자라도 금융기관 이용하는 거 외에는 아무 제한이 없답니다. 여권발급, 해외여행 모두 가능합니다.
-………
씨발, 당했다…. 설마 제 부모까지 팔아버릴 깡다구였을 줄이야….
바깥에서 전화를 받고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와 보니, 박노인은 아들한테 빚을 내준 다른 채무자들한테 멱살잡이를 당하고 있었다.
-개새끼! 네 아들놈 어디 있어?!?
-자식교육 참 잘 시켰다! 망할 영감탱이, 네가 대신 갚아!
김부장은 채권자들을 밀어붙이고 박노인을 빼냈다. 그 덩치와 인상에 짓눌려, 채권자들은 김부장을 두곤 찍소리도 못했다.
김부장은 박노인을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저녁에 비가 그쳤다.
김부장과 박노인은 다시 나란히 차를 타고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또 한참을 운전대에다 대고 화풀이를 한 뒤라, 김부장도 진이 다 빠져버렸다. 박노인이 품속을 뒤져, 쌈짓돈 같이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펴도 되겠나?
김부장은 귀찮은 듯이 스위치를 눌러 운전석과 조수석의 윈도우를 내렸다. 그리고 자기도 한 대 꺼내 물었다.
박노인이 자기 몸 어딘가에 둔 라이터를 찾지 못하자, 김부장은 짜증스런 투로 350원짜리 빨강라이터를 휙 던졌다. 박노인은 그걸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딸이 참 예쁘더군. 병원에서 봤네.
-………
-우리 아들도 어릴 때 아팠어. 매일 병원에 있느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
박노인은 한숨처럼 담배를 길게 내뿜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놈한테 부모로서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었는데….
잘 되긴 개뿔이….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김부장은 화풀이처럼 그 입에 다시 담배를 물고 길게 빨았다.
박노인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타 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얼굴을 아래로 처박고 소리죽여 울었다.
김부장은 욕을 씹긴 했지만 모르는 체 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젖은 어둠 속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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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병원에서 김부장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투약중지처분조치라는 병원의 최후통첩이었다. 병원의 급여결산일 전까지 3천만 원이 넘는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수현이는 더 이상 약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김부장은 간호사가 옷깃을 잡아끄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료실에 들어가 딸의 담당의를 기다렸다.
담당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김부장은 진료실을 나와 딸의 병실로 들어갔다. 수현이는 오늘따라 표정이 밝아보였다.
-밥…… 먹었니?
응.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수현이는 책꽂이 겸 탁자 위에 올려진 플라스틱 죽통을 보았다. 며칠 전에, 김부장이 수현이에게 가져다준 것과 똑같은 음식점의 용기였다.
-옆방에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퇴원하면서 사다주고 가셨어. 되게 좋은 분들 같더라. 그분들이 내가 모르는 아빠 얘기도 이따만큼 해줬어.
김부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 뭐라고 했는데?
수현이는 새침한 눈으로 아빠를 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빠도 반칙이야. 그렇게 좋은 일만 하고 다녔으면서 왜 나한텐 입도 벙긋 안 해? 그분들이 어려울 때 아빠가 돈 빌려줘서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며? 그리고 실종된 아들 찾는 것도 아빠가 나서서 대신 해결해줬다고 하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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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실 환자 중에 보호자 이름이 박희순인 양반 있죠? 오늘 퇴원했다던데.
-네. 퇴원하셨어요.
-왜 퇴원한 겁니까? 병명이 뭐였죠?
-그건 알려드릴 수 없는데요…
-아, 친척입니다. 못 사는 분들이라 제가 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러는데 통 사정 얘기를 안 하시네요.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김부장은 접수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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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인의 아내는 고혈압을 동반한 당뇨에, 관절염, 만성간염까지 앓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는 몸이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선 역시 돈이 필요했다.
입원비도 내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병원은 요양원을 추천하는 척 은근히 퇴원을 요구했고, 마침내 끼니마다 넣어주던 식사도 끊기자 노인들은 더 견디지 못하고 짐을 쌌던 것이다.
-노친네들……
김부장은 병원 벤치에 앉아 파란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는 깍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박씨영감은 틀렸다. 그건 똥 밟은 셈 치기로 하고… 지금 우리 채무자들 중에 3천만 땡길 수 있는 놈 없겠냐?
-부장님……, 아시면서 그렇게 물으십니까. 우리 털들은 잠수 타거나 죽은 놈들 빼면 영감까지 합쳐서 얼마 되지도 않잖습니까. 그리고 다 쪼가리들이라 이자도 못 내는 놈들인데요.
깍지의 목소리는 부어있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부장님……. 제 월급도 세 달치나 밀렸는데요.
-씨발. 알고 있어! 누가 그거 떼먹는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새끼가…
탁! 김부장은 휴대폰 폴더를 거칠게 닫아버렸다.
-어머? 저 사람 좀 봐…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이 김부장을 힐긋거렸다. 김부장은 그제야 자기 머리에서 또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발도 마찬가지…
-………이거 진짜 돌겠네.
김부장은 땀을 훔치듯 피를 닦으며 병원 앞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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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문이 열린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공간에 빛이 쏟아진다. 그 빛을 등진 채 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김부장이었다.
김부장은 정면 높은 곳에 보이는 예수상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아들.
-니미, 좆 같은 거!
김부장이 그 예수상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온갖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의 괴상망측한 행동은 소란을 듣고 신부가 뒤에 나타나기까지 계속 됐다.
신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다 쏟아낸 김부장이 그를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김부장은 야매의사 앞에 앉아있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줄담배를 뻑뻑 피어대고 있었다.
사정을 다 들은 야매는 자기도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필요한 돈이 얼만데? 수현이 치료비가…
-왜? 영감이 빌려주시게? 됐쑤다. 더 이상 누구한테도 빚지고 싶지 않소. 씨발, 어차피 한번 왔다 하번 끝나는 인생 나도 막판까지 가보기로 했소.
-………
수술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옛날에, 술 때문에 의사면허를 박탈당했다는 야매는 그날따라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수술대 앞에 섰다. 생전 안 쓰던 수술모와 마스크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꼭 이래야 하나?
-……평부장 그 새끼한텐 비밀로 해주시오.
야매는 고개를 끄떡였다. 김부장은 눈부신 전등빛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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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땐 저녁이었다. 김부장은 벌거벗은 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 옆구리가 쑤시고 속이 메스꺼웠다. 옷걸이에 걸어둔 옷을 입는다.
야매가 미리 준비해둔 돈가방을 김부장에게 내밀었다. 액수를 확인해보니, 수술비가 안 빠져있었다.
-당분간은 술 담배 다 금하게. 아침저녁으로 이 약 한 첩씩 챙겨먹어. 깍지에겐 내가 연락해뒀네.
-……고맙쑤다.
김부장은 돈가방을 들고 건물을 나왔다. 멀리서 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불빛과 환호성이 이따금씩 다가왔다.
깍지가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김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오늘 프랑스랑 마지막 평가전 하잖습니까.
주인 만난 똥개마냥, 깍지는 그날따라 살살거렸다.
-돈은 제가 들겠습니다.
-됐어. 차는 어따 뒀어?
김부장은 먼저 앞장섰다.
-부장님.
-억!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지자 김부장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돈가방을 놓쳤다. 깍지가 그걸 들고 튀기 시작한다.
김부장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 쫓는다.
-……도, 도둑이야! 저 새끼 잡앗!
깍지는 골목을 빠져나와 시청 앞 광장으로 도망쳤다. 거리응원을 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인파들로 광장은 북적였다. 죄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깍지가 그 속으로 숨었다.
김부장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미친 듯이 깍지를 찾았다. 환호와 박수소리로 주위는 온통 빨갛게 들끓고 있었다.
김부장은 옆모습과 뒷모습이 닮은 놈들을 일일이 잡아채 얼굴을 확인했다. 깍지가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골이 터졌다.
귀가 멍해지는 함성과 함께 광장에는 붉은 풍랑이 일어나는 듯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깍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깍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씨팔! 엿 같은 나라!
김부장이 하늘에 대고 울부짖었다. 한국 선수가 헤딩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이 재연되면서, 다시 함성이 폭발했다. 김부장의 소리는 거기에 묻혔다.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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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차암… 뻔뻔하구만.
평부장은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 위에서 김부장을 올려다봤다. 김부장은 굴욕을 삼키는 듯한 얼굴로 평부장 앞에 서있었다. 평부장의 사무실 안이다.
이자는 얼마나 되도 좋으니 3천만 더 땡겨줄 수 없겠느냐는 김부장의 말에, 평부장은 어이없다는 식의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형님.
김부장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콧방귀가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평부장은 자기 책상에 팔을 걸치고 김부장을 내려다봤다.
-나 따라다니며 일 배울 때가 좋았지? 네가 나 뒤통수 얻어맞게 하고 내 나와바리 바로 옆에 개집 차렸는데도 내가 왜 네 사업자금 대준 건 줄 알아? 나중에 가면, 이렇게 될 줄 다 알았기 때문이야.
-………
-못 줘. 아니, 안 줘. 네가 나한테 빚진 돈이 얼만데. 그거 다 못 갚겠으면 네 딸년보다 먼저 뒈지든가 알아서 해.
김부장이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봤다. 평부장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곤 금으로 만든 담뱃갑에서 비싼 시가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못하겠으면 네 딸 오장육부라도 떼어서 팔든가. 걔 어차피 얼마 못 가잖아.
아아악! 김부장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평부장을 바닥에 때려눕혀 버리곤 구둣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평부장의 부하들은 전부 밖에 있었다.
김부장은 평부장의 호주머니를 뒤져 열쇠꾸러미를 찾았다. 그걸로 사무실에 비치된 금고문을 따고 옆에 있던 서류 가방에 현금만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평부장이 벌레처럼 부들거리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자, 김부장은 한 번 더 놈의 면상을 걷어차곤 사무실을 나섰다.
평부장의 부하들이 수금을 마치고 돌아오다 김부장과 마주쳤다. 김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체하며 지나쳤다. 그때, 평부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바닥에 엎어진 채로 고함을 질렀다.
-저 개새끼 담가!
김부장은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갔다. 부하들이 흉기를 들고 우르르 쫓아왔다. 차에 타 시동을 건 다음 그곳을 뜨려는데 심복 중 한 놈이 배짱 좋게 차 앞을 막아섰다. 김부장은 그대로 박아버리곤 그곳을 탈출했다.
그는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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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머릿속에 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김부장은 돈가방을 든 채, 딸의 주검 앞에 서있었다.
낮잠을 자다가 숨을 거뒀다는 딸의 얼굴은 평안해보였다. 면역이 없어 온갖 병마에 시달린 탓에 기력부진으로 생명이 다한 것 같다는 의사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척 중에 죄송한 말씀이지만, 병실이 꽉 차서 수현이를 지금 영안실로 옮기려고 하는데 이해해주시길 바란다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한 채 김부장은 수현이의 침대 옆에 놓여있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파란나라’였다.
넥타이를 맨 아빠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수현이와 엄마는 파란구름 위에서 손을 잡고 해님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따님 소지품은 직접 챙겨 가시면 됩니다. 그럴 생각이 없으시면 병원에서 알아서 소각해줄 겁니다.
김부장은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돈가방을 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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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티를 입은 리포터가 축제의 거리에 나와 있었다. 한국팀은 세계최강 프랑스를 맞아 분전했지만 3대2로 아쉽게 패했다고 리포터는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패한 경기였지만 한국팀은 지난 번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경기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고 경기내용에 만족한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이밀자, 꼬마도 학생도, 회사원도 흥분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었다. 모두 붉은 티를 입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자 뉴스데스크의 아나운서들이 나타나, 우리나라가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다는 것은 곧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문가까지 불러다 앉혀놓고 월드컵 개최가 가져다주는 유무형의 경제창출효과를 설명했다.
나라는 이미 축제에 푹 빠져있었다. 붉은 행진이 시가지를 누비며, 깨끗이 청소된 옛 포장마차 골목을 지나갔다. 카메라와 리포터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응원단이 해산되고 거리가 텅 비자, 붉은 티를 입은 취객들이 주차된 승용차에 술병을 때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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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가 가고 싶어 한 파란나라에는 엄마가 없었다. 수현이의 엄마는 김부장이 철모르는 뜨내기 건달 시절에 룸살롱에서 만난 약물중독자였다. 여자가 평부장에게 진 빚을 함께 갚아주는 조건으로 동거를 시작했고, 애가 생겼는데도 여자는 중절이 무섭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책 없이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애를 배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는 술과 담배, 마약을 끊지 않았다. 그렇게 수현이는 태어났고 여자는 애를 낳자마자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딸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거짓말을 해왔던 것이다.
수소문을 해보니, 동거남과 딸에게서 도망쳤던 그 여자는 또 어디서 남자를 호리다가 결국 마약사범으로 체포돼 감옥에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죽었어도 천국은 못 갈 여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김부장은 검은 강물을 바라보며 혼자 강변에 앉아있었다. 그럼 수현이는 천국에서도 혼자 쓸쓸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네가 바라던 행복이 거기엔 있는 거냐…
자정이 넘어서야 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삶의 이정표가 다 사라진 뒤였다.
자신의 차로 돌아온 김부장을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있던 그는 순식간에 다가와 시퍼런 칼로 김부장의 배를 찔렀다.
억… 소리와 함께 김부장은 자기 차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를 찌른 자는 피 묻은 칼을 떨어트리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리 위의 불빛이 그자의 얼굴을 비췄다.
얼마 전, 김부장에게 콩팥 한쪽을 뺏긴 그 채무자였다.
-이…… 씨발…… 새끼……
김부장이 이를 갈며 노려보자, 채무자는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김부장은 놈을 뒤쫓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힘겹게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돈가방은 조수석에 던져뒀다. 배에서 피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아직은…
그는 차를 몰고 어딘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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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박노인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단칸방은 밤에는 아예 칠흑으로 뒤덮였다. 더듬더듬 불을 켜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쳤다. 메리야스 차림으로 문을 열었는데, 사람은 없고 검은 007가방만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황당한 얼굴이 된 박노인은 가방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열어봤다.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만원짜리 뭉치가 그 안에 가득 담겨있었다. 박노인도, 뒤에 서있던 아내도 잠이 확 달아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거…… 피 아냐?
박노인은 자신의 손을 보고서야 알아챘다. 검은 돈가방이 온통 피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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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새벽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이 예배당 끝에 위치한 제대까지 이어져있었다. 제대 너머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있었고 제대를 밝히고 있는 촛불들 사이로 한 사내가 주저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사내는 피투성이였다.
신부는 성경을 품에 안고 빠르게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김부장은 고개를 들었다. 거의 죽어가는 얼굴이 피로 흥건했다.
김부장은 자신의 양복 웃옷 한쪽을 벌려, 그 뒤에 숨어있던 치명상을 드러냈다. 신부가 눈을 부릅뜨자, 그는 힘없이 웃었다.
-이건 성흔이 아닙니다…
-………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신부는 김부장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일단 병원으로 갑시다. 내가 차를 부르겠소. 말하는 그의 손을 김부장이 덥석 붙들었다. 신부가 그를 쳐다봤다. 김부장이 말했다.
-신부님……… 천국이 파랗습니까? 천국이요……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부장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쓸쓸히 웃었다. 눈물과 웃음이 함께 흘러내렸다. 피는 멎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