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글 수 521
폐(弊)
1
돌이켜 보자면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이학년이 되었을 때 교실에서 작은 사고 하나
가 생겼습니다. 아이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고 뒹굴
었습니다. 그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연필에는 피가 묻어 있었
습니다. 교실 안의 모두가 어찌할 줄 모르고 그 광경만을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아이
에게 물었습니다.
“괜찮아?”
제 눈에서 흐른 피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습니다. 비
명을 지르는 아이의 눈은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2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실로 담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가끔 두
통을 호소하실 때나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문틈에 끼어 깽
깽댈 때, 혹은 오빠가 넘어져서 피가 날 때, 그들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을 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다만 일을 쉬시는 어머니나 발을 절뚝이는 강아지, 무릎에 반
창고를 붙이는 오빠를 보며 그들이 무언가 불편해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저도 예방주사를 맞으러 간 일
이 있었습니다. 병원 안에는 저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습
니다.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겁먹은 표정
의 아이들 속에서 지레 겁에 질렸습니다.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냥 겁에 질린 것입니다. 제 차례가 되어 예방주사를
맞고 나니 이제는 오히려 궁금해졌습니다. 아이들이 무엇 때문
에 두려워하고 울음을 터뜨렸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
다.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께 여쭈자 어머니는 웃으시며 말씀하
셨습니다.
“주사가 아플까봐 그러는 거야.”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저는 아프다는 것이 무엇이
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다 제 팔의 살을 비트셨습니
다. 저로서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
머니는 살을 좀 더 세게 비트시며 물어보셨습니다.
“어머, 안 아파?”
어머니는 제 살이 빨갛게 변할 때 까지 비트셨지만 저는 여
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좀 더 세게 비틀어 보시던
어머니는 손가락을 때고 자신의 팔을 문지르셨습니다. 그 때는
왜 어머니께서 갑자기 자신의 팔을 문지르셨는지 알 지 못했
습니다.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어머니의 행동을 이
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분의 의사에게 진찰 받은 뒤에야 어머니는 제가
무통증이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통증(無痛症)이 아닙니다. 제가 타인에게 고
통을 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이후의 일이
었습니다.
상담사와 부모님은 제게 고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려 무
던히도 노력하셨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시간이 지
남에 따라 사람들의 ‘아픔’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
었습니다.
3
철없는 아이의 실수로 눈에 큰 상처를 입은 저는 일일구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조대원 중 한 명
이 눈을 감싸고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싼
구조대원은 신음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퍽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조금 전 저를 찌른 아이도
똑같이 고통을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앰뷸런스에 누워 응
급조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구조대원들이 팔과 다리를 꾹 누르
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
리며 생각에 잠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상처를
입을 때 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
해냈습니다. 어린 시절 제 팔을 꼬집으시다 자신의 팔을 문지
르신 어머니, 놀다가 무릎이 까졌을 때 옆에서 아프다고 징징
대던 꼬마아이, 간혹 구역질을 할 때면 옆에서 힘들어 하던 오
빠……. 그렇습니다. 제 통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에게 가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갈수록 저의 어렴풋한
짐작은 확신이 되어갔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섬뜩하기 그지없습니다. 감각이란 타인
이 대신 느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어렸던 때이지만
아픔이 타인에게 양도된다는 이야기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
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양도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겪어야
할 괴로움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강요였습니다. 혹자는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니니 오히려 축복받은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
릅니다. 그것은 제가 무통증 판정을 받았을 때 어머니께서 종
종 하시던 농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통증이 없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넘겨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끔찍한 저주를 받
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하루하루를 두려
움에 살았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
떻게 될까. 이유 없이 자신에게 고통만 주는 나를 피하지 않을
까. 영원히 아무와도 접촉할 수 없는 독방에 가두어 두지 않을
까. 나 대신 고통 받는 만큼 나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연이어 응급실의 간호사, 진찰실의 의사가 눈에서 통
증을 호소했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혹시
라도 사실을 들킬 까 노심초사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시신경이 완전히 파손되어버린 안구를 제거하는 수술이 끝
난 후, 지독한 고독감과 무료함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통증을 느낄까 두려워 함부로 다른 사람 앞에 나
설 수도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수술 직후에는 심한 통증이 있
을 것이 뻔했습니다. 독방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병실로
찾아오지 말라며 화를 내었습니다.
하루 종일 창밖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병
원 안에는 고통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습
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 몫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것
을 안 순간, 하루하루 아픔 때문에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저는 더 없이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절반의 시야
는 그들의 삶에 고통을 더해주는 저에게 아주 올바른 처벌이
었습니다. 그것이 저와 퍽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웃었습니
다. 눈물을 짜내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저는
계속해서 조금씩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
게 해야 그들에게 용서 받을지 고민했습니다. 혀를 잘라서 내
주어야 할까? 아니면 이번엔 팔을 내주어야 하나? 아니다, 스
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까? 실로 허황된 고민이었습니다. 저에
겐 자해를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평생을 남에게 조금씩 폐를
끼치며 살게 될 텐데도 저는 살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
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것이 성당이었습니다. 가족들 중 성당
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저도 고해성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잘못이든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는 제게 더 없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퇴원 후 저는 시내에 있는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첫
미사를 드리러 가던 날. 아침 햇살에 십자가는 더 없이 경건하
고 신성하게 빛났습니다. ‘이 안에 구원의 빛이 있다. 어서 나
에게 기도하고 용서를 빌어라. 너의 깊디깊은 죄를 사해 주겠
노라.’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저에게 이야기 하는듯
하여 저는 몸의 떨림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미사를 드리
는 내내 신부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제 안에
새겨 넣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신도는 거지와 같습니다. 각자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신을 찾고, 그
에게 용서함과 구원을 구걸하는 거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
한 의미에서 저는 정말로 진실 된 신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용서를 구걸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큰 두려움이 함께
했습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제가 아닌 타인이 고통을 느끼
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
기에 제 몸의 이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교실의 누군
가가 아픔을 호소하면 행여나 제 탓이 아닐까 초조해하곤 했
습니다. 조금이라도 통증이 생겨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극도로
조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저는 눈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
는 핑계를 대고 거의 모든 체육시간을 결석했습니다. 그래도
평가를 받을 때 면 어쩔 수 없이 운동장에 나가서, 힘들지 않
을 만큼만 몸을 움직였습니다. 방과 후 집에 갈 때에도 아이들
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고 집에 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는 길은 먼 길을 돌아서라도 피해 다녔습니다. 또 언제나
느리게 걷는 탓에 선생님께 주의를 들었지만 저는 이 일을 그
만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변한 저를 의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타인이 생각하
기에도 겁이 많아질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
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저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신도가 되
었습니다. 성당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꾹 참고 견뎌냈습니다. 오직 구원을 위해서 하늘만을 바
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저는 커서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까지 세
웠습니다. 종교는 많은 것을 잊게 만들어 주었고, 많은 것들에
안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고 사는 저에게 약
속 된 천국은 너무나 달콤한 속삭임이었습니다.
4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저는 중학교 때 보다 좀 더 익숙하게
몸을 지키는 법을 익혔습니다. 한 쪽 눈이 없는 것 때문에 애
꾸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만, 그래도 특별히 저를 괴롭히거나
하는 일 없는 좋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는 제가 무통
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반사적으로 엄살을 부리고 웃으면서 아이들과 떠들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성당
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진다는 사소한 고민을 제외하
면 특별한 일이 없는 지루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습이란 언제나 평화의 순간에 난데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인 법입니다. 저는 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전환점을 맞
이했습니다. 체육시간이 되어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탠드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체육시간 마다 그늘에 옹
기종기 앉아 떠드는 패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 아이들
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무언가가 머리를 강하게 흔드는 것
이 느껴졌습니다. 남자아이 한 명이 찬 공이 제 머리위로 떨어
진 것입니다. 저는 곧바로 아얏 하고 머리를 움켜쥐며 아픈 시
늉을 했습니다. 모두 가짜로 하는 눈속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모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아픔을 참는
척 하며 잠시 교실에 가서 쉬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
자 같이 떠들던 금별이라는 아이가 같이 가주겠다고 나셨습니
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금별이가 넌지시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너, 별로 안 아파 보이더라? 그거 엄살이지?”
소름이 돋았습니다. 애써 모른 척 하며 아니라고 둘러대자
금별은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겠지? 네 맞는 걸 보니까 내 머리가 다 아프더라니까.”
그것이야 말로 제 심장을 후벼 파는 그녀의 비수였습니다.
금별의 말은 저에게 죽음과도 같았습니다. 언젠가 찾아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나 닥치면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그것
말입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 애써 자신을 다잡았습니
다. 아직 금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잡
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을 악몽 속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온 세상이 제 비밀에 관해서 수근 대는 환청이 들리고, 혹시라
도 길가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추궁을 당하는 죄인마냥 오
금이 저렸습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책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금별을 관찰하고 같이 어울렸습니다만 하루 스물 네 시
간 한 달 삼십 여일 일 년 삼백 육십 오일을 금별만 지켜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를 방 속에 가둬두고 그 누구와도 대화
하지 못하게 하는 망상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도 금별이
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애써 저 자신을 안정시키곤 했습니다.
제가 금별이를 관찰함과 동시에 그녀도 저에게 관심을 보이
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우리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
다. 그녀는 일말의 경계심도 없이 친구로 대해주었습니다. 그
러나 저에게 금별은 언제나 경계와 감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저
는 점차 금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음
식을 못 먹는다거나, 생각보다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자+ㅈ다거나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 말입니다. 금
별이는 곧잘 저를 이끌고 영화관이나 오락실 같은 곳에 놀러
갔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이후 이렇게 가까이 지낸 사람은
처음이었던 지라 잠자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노는 것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던 저에게 금
별이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형들에 관해서 흥미를
가지거나 새로 나온 가수들의 노래를 줄줄 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부터였습니다. 워낙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니 저의
경계심이 점점 허물어 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같
이 어울린 시간이 한 달을 넘어 반년이 되고, 반년을 넘고 일
년을 넘자 어느새 금별이에게 만큼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지
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 몇 명과 노래방에서 한참 소리를 질러대다가
나란히 귀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골
목을 걷고 있는데 금별이가 혼자 킥킥대더니 이야기를 꺼냈습
니다.
“너 노래 잘하더라? 나하고 노래방 간 거 처음이지?”
물론 정말로 제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해서 하는 이야
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괜히 어
울리지도 않는 농담까지 해 가며 장단을 맞춰주었습니다.
“평소에 목 관리 잘 하거든. 소리 꽥꽥대면 목 나빠져.”
“그거 내 이야기야?”
우리는 같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제 통증에
관해서도 전부 잊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노래방에 다녀온 다
음 날 저는 금별이에게 같이 성당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
다. 금별이는 종교 같은 것은 질색이라며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래 된 성당이라 종교
화 같은 그림 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고 끈질기게 유혹하며,
성당에서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설득했습
니다. 결국 금별은 제 끈질긴 설득을 못 이기고 저와 같이 성
당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5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미리 정해 둔대로 수녀원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수녀원의 고요하고 정적인 공기는 제가 바라
는 삶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금별이에게
서 날아오는 편지를 받아보며 하루를 하느님을 위한 희생과
봉사로 뜻 있게 보냈습니다. 통증이 남에게 전해지는 것에 대
한 걱정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에 안심했기 때문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 무렵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다면 금별이를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증을 느낄 수 없는 관계로 저는 한 달에 한
번 간단한 진찰을 받으러 외출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산 깊
은 곳에 있는 수녀원에서는 병원만 다녀오기도 빠듯했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병원의 이름 정도만 편지로 보낼 수 있었을
뿐, 금별이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 안
에서 금별이와 마주쳤을 때 더욱 기뻤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별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상상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뛸 듯이 기뻐하지는 않
았습니다. 그저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보는 양 그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 건드리자 금별은 그
제야 저를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거의 일 년 만에 보
는 얼굴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편지
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그녀에게 맞추어 저도 두서없
는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금별과 나의 마
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6
집에 한 번 들렸다 가지 않겠냐는 금별의 질문에 저는 흔쾌
히 응했습니다. 정기진찰을 빼먹고 금별의 집에 들리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께 거짓말을 하게 되는 큰 죄입니다. 그러
나 저는 불경스럽게도 하느님과 친구를 저울질 하며 ‘이 정도
잘못쯤은 용서해 주지 않으실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금별이의 집은 크고 넓었습니다. 집에는 금별이의 아버지와
가정부, 그리고 편지를 통해 이야기 했던 네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금별의 방은 이층 제일 끝이었습니다. 집 안 주변
의 경비가 삼엄하기 그지없기에 조금 무섭다고 이야기 하자
금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요즘 바깥이 불안 불안 하다고 이
야기 했습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 하는 금별이를 보며 저 역시
정말 그렇겠다며 옅은 웃음을 흘렸습니다. 제가 수녀원에서의
이야기를 하자 금별이는 정말 힘들겠다는 둥 제가 존경스럽다
는 둥 장단을 맞춰 주었고, 저는 그런 금별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머릿속 깊은 곳 까지 틀어박혀 있는 이야기 까지
꺼내 보였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 주었지만 금별
이는 수녀원의 명절 이야기를 제일 재미있어 했습니다. 수녀원
에서는 명절이면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대신 조상님께 기도를
올리고 윷놀이 등을 하는데, 금별이가 생각하기에 ‘서양’의 상
징처럼 보이는 성당의 사람들이 윷놀이를 하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옆구리가 아프네.”
금별이는 앉은 채로 이야기 했습니다.
“이상하네. 아까부터 옆구리가 아파.”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듯 금별이가 옆구리를 붙잡고 웅크렸
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금별이가 느끼는 통증은 저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한참을 아무 말도 않다가 이제
가보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벌써?”
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금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7
제가 간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두 달 전이었
습니다. 계속 해서 형식적인 진찰만 해 오던 저에게 의사 선생
님이 정밀검사를 한 번 받아볼 것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통증
이 없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제 몸 속에 더 이상 떼
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번진 암세포가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들
었을 때 저는 조용히 “그래요?” 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약물치료와 진통제의 처방을 거절한 뒤 수녀원으로 돌아
왔습니다. 여전히 수녀원에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며, 간혹 옆
구리가 쑤시다고 툴툴대는 동료들을 놀리며, 금별이에게 편지
를 보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죽는 순간 까지 타인에게 희생
을 강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실로
담백한 사실이었습니다.
1
돌이켜 보자면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이학년이 되었을 때 교실에서 작은 사고 하나
가 생겼습니다. 아이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고 뒹굴
었습니다. 그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연필에는 피가 묻어 있었
습니다. 교실 안의 모두가 어찌할 줄 모르고 그 광경만을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아이
에게 물었습니다.
“괜찮아?”
제 눈에서 흐른 피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습니다. 비
명을 지르는 아이의 눈은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2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실로 담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가끔 두
통을 호소하실 때나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문틈에 끼어 깽
깽댈 때, 혹은 오빠가 넘어져서 피가 날 때, 그들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을 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다만 일을 쉬시는 어머니나 발을 절뚝이는 강아지, 무릎에 반
창고를 붙이는 오빠를 보며 그들이 무언가 불편해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저도 예방주사를 맞으러 간 일
이 있었습니다. 병원 안에는 저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습
니다.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겁먹은 표정
의 아이들 속에서 지레 겁에 질렸습니다.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냥 겁에 질린 것입니다. 제 차례가 되어 예방주사를
맞고 나니 이제는 오히려 궁금해졌습니다. 아이들이 무엇 때문
에 두려워하고 울음을 터뜨렸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
다.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께 여쭈자 어머니는 웃으시며 말씀하
셨습니다.
“주사가 아플까봐 그러는 거야.”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저는 아프다는 것이 무엇이
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다 제 팔의 살을 비트셨습니
다. 저로서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
머니는 살을 좀 더 세게 비트시며 물어보셨습니다.
“어머, 안 아파?”
어머니는 제 살이 빨갛게 변할 때 까지 비트셨지만 저는 여
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좀 더 세게 비틀어 보시던
어머니는 손가락을 때고 자신의 팔을 문지르셨습니다. 그 때는
왜 어머니께서 갑자기 자신의 팔을 문지르셨는지 알 지 못했
습니다.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어머니의 행동을 이
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분의 의사에게 진찰 받은 뒤에야 어머니는 제가
무통증이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통증(無痛症)이 아닙니다. 제가 타인에게 고
통을 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이후의 일이
었습니다.
상담사와 부모님은 제게 고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려 무
던히도 노력하셨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시간이 지
남에 따라 사람들의 ‘아픔’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
었습니다.
3
철없는 아이의 실수로 눈에 큰 상처를 입은 저는 일일구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조대원 중 한 명
이 눈을 감싸고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싼
구조대원은 신음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퍽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조금 전 저를 찌른 아이도
똑같이 고통을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앰뷸런스에 누워 응
급조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구조대원들이 팔과 다리를 꾹 누르
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
리며 생각에 잠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상처를
입을 때 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
해냈습니다. 어린 시절 제 팔을 꼬집으시다 자신의 팔을 문지
르신 어머니, 놀다가 무릎이 까졌을 때 옆에서 아프다고 징징
대던 꼬마아이, 간혹 구역질을 할 때면 옆에서 힘들어 하던 오
빠……. 그렇습니다. 제 통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에게 가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갈수록 저의 어렴풋한
짐작은 확신이 되어갔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섬뜩하기 그지없습니다. 감각이란 타인
이 대신 느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어렸던 때이지만
아픔이 타인에게 양도된다는 이야기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
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양도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겪어야
할 괴로움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강요였습니다. 혹자는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니니 오히려 축복받은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
릅니다. 그것은 제가 무통증 판정을 받았을 때 어머니께서 종
종 하시던 농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통증이 없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넘겨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끔찍한 저주를 받
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하루하루를 두려
움에 살았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
떻게 될까. 이유 없이 자신에게 고통만 주는 나를 피하지 않을
까. 영원히 아무와도 접촉할 수 없는 독방에 가두어 두지 않을
까. 나 대신 고통 받는 만큼 나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연이어 응급실의 간호사, 진찰실의 의사가 눈에서 통
증을 호소했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혹시
라도 사실을 들킬 까 노심초사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시신경이 완전히 파손되어버린 안구를 제거하는 수술이 끝
난 후, 지독한 고독감과 무료함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통증을 느낄까 두려워 함부로 다른 사람 앞에 나
설 수도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수술 직후에는 심한 통증이 있
을 것이 뻔했습니다. 독방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병실로
찾아오지 말라며 화를 내었습니다.
하루 종일 창밖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병
원 안에는 고통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습
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 몫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것
을 안 순간, 하루하루 아픔 때문에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저는 더 없이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절반의 시야
는 그들의 삶에 고통을 더해주는 저에게 아주 올바른 처벌이
었습니다. 그것이 저와 퍽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웃었습니
다. 눈물을 짜내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저는
계속해서 조금씩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
게 해야 그들에게 용서 받을지 고민했습니다. 혀를 잘라서 내
주어야 할까? 아니면 이번엔 팔을 내주어야 하나? 아니다, 스
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까? 실로 허황된 고민이었습니다. 저에
겐 자해를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평생을 남에게 조금씩 폐를
끼치며 살게 될 텐데도 저는 살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
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것이 성당이었습니다. 가족들 중 성당
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저도 고해성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잘못이든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는 제게 더 없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퇴원 후 저는 시내에 있는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첫
미사를 드리러 가던 날. 아침 햇살에 십자가는 더 없이 경건하
고 신성하게 빛났습니다. ‘이 안에 구원의 빛이 있다. 어서 나
에게 기도하고 용서를 빌어라. 너의 깊디깊은 죄를 사해 주겠
노라.’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저에게 이야기 하는듯
하여 저는 몸의 떨림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미사를 드리
는 내내 신부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제 안에
새겨 넣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신도는 거지와 같습니다. 각자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신을 찾고, 그
에게 용서함과 구원을 구걸하는 거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
한 의미에서 저는 정말로 진실 된 신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용서를 구걸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큰 두려움이 함께
했습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제가 아닌 타인이 고통을 느끼
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
기에 제 몸의 이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교실의 누군
가가 아픔을 호소하면 행여나 제 탓이 아닐까 초조해하곤 했
습니다. 조금이라도 통증이 생겨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극도로
조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저는 눈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
는 핑계를 대고 거의 모든 체육시간을 결석했습니다. 그래도
평가를 받을 때 면 어쩔 수 없이 운동장에 나가서, 힘들지 않
을 만큼만 몸을 움직였습니다. 방과 후 집에 갈 때에도 아이들
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고 집에 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는 길은 먼 길을 돌아서라도 피해 다녔습니다. 또 언제나
느리게 걷는 탓에 선생님께 주의를 들었지만 저는 이 일을 그
만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변한 저를 의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타인이 생각하
기에도 겁이 많아질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
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저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신도가 되
었습니다. 성당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꾹 참고 견뎌냈습니다. 오직 구원을 위해서 하늘만을 바
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저는 커서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까지 세
웠습니다. 종교는 많은 것을 잊게 만들어 주었고, 많은 것들에
안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고 사는 저에게 약
속 된 천국은 너무나 달콤한 속삭임이었습니다.
4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저는 중학교 때 보다 좀 더 익숙하게
몸을 지키는 법을 익혔습니다. 한 쪽 눈이 없는 것 때문에 애
꾸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만, 그래도 특별히 저를 괴롭히거나
하는 일 없는 좋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는 제가 무통
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반사적으로 엄살을 부리고 웃으면서 아이들과 떠들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성당
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진다는 사소한 고민을 제외하
면 특별한 일이 없는 지루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습이란 언제나 평화의 순간에 난데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인 법입니다. 저는 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전환점을 맞
이했습니다. 체육시간이 되어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탠드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체육시간 마다 그늘에 옹
기종기 앉아 떠드는 패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 아이들
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무언가가 머리를 강하게 흔드는 것
이 느껴졌습니다. 남자아이 한 명이 찬 공이 제 머리위로 떨어
진 것입니다. 저는 곧바로 아얏 하고 머리를 움켜쥐며 아픈 시
늉을 했습니다. 모두 가짜로 하는 눈속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모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아픔을 참는
척 하며 잠시 교실에 가서 쉬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
자 같이 떠들던 금별이라는 아이가 같이 가주겠다고 나셨습니
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금별이가 넌지시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너, 별로 안 아파 보이더라? 그거 엄살이지?”
소름이 돋았습니다. 애써 모른 척 하며 아니라고 둘러대자
금별은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겠지? 네 맞는 걸 보니까 내 머리가 다 아프더라니까.”
그것이야 말로 제 심장을 후벼 파는 그녀의 비수였습니다.
금별의 말은 저에게 죽음과도 같았습니다. 언젠가 찾아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나 닥치면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그것
말입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 애써 자신을 다잡았습니
다. 아직 금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만을 붙잡
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을 악몽 속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온 세상이 제 비밀에 관해서 수근 대는 환청이 들리고, 혹시라
도 길가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추궁을 당하는 죄인마냥 오
금이 저렸습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책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금별을 관찰하고 같이 어울렸습니다만 하루 스물 네 시
간 한 달 삼십 여일 일 년 삼백 육십 오일을 금별만 지켜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를 방 속에 가둬두고 그 누구와도 대화
하지 못하게 하는 망상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도 금별이
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애써 저 자신을 안정시키곤 했습니다.
제가 금별이를 관찰함과 동시에 그녀도 저에게 관심을 보이
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우리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
다. 그녀는 일말의 경계심도 없이 친구로 대해주었습니다. 그
러나 저에게 금별은 언제나 경계와 감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저
는 점차 금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음
식을 못 먹는다거나, 생각보다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자+ㅈ다거나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 말입니다. 금
별이는 곧잘 저를 이끌고 영화관이나 오락실 같은 곳에 놀러
갔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이후 이렇게 가까이 지낸 사람은
처음이었던 지라 잠자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노는 것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던 저에게 금
별이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형들에 관해서 흥미를
가지거나 새로 나온 가수들의 노래를 줄줄 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부터였습니다. 워낙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니 저의
경계심이 점점 허물어 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같
이 어울린 시간이 한 달을 넘어 반년이 되고, 반년을 넘고 일
년을 넘자 어느새 금별이에게 만큼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지
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 몇 명과 노래방에서 한참 소리를 질러대다가
나란히 귀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골
목을 걷고 있는데 금별이가 혼자 킥킥대더니 이야기를 꺼냈습
니다.
“너 노래 잘하더라? 나하고 노래방 간 거 처음이지?”
물론 정말로 제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해서 하는 이야
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괜히 어
울리지도 않는 농담까지 해 가며 장단을 맞춰주었습니다.
“평소에 목 관리 잘 하거든. 소리 꽥꽥대면 목 나빠져.”
“그거 내 이야기야?”
우리는 같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제 통증에
관해서도 전부 잊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노래방에 다녀온 다
음 날 저는 금별이에게 같이 성당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
다. 금별이는 종교 같은 것은 질색이라며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래 된 성당이라 종교
화 같은 그림 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고 끈질기게 유혹하며,
성당에서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설득했습
니다. 결국 금별은 제 끈질긴 설득을 못 이기고 저와 같이 성
당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5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미리 정해 둔대로 수녀원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수녀원의 고요하고 정적인 공기는 제가 바라
는 삶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금별이에게
서 날아오는 편지를 받아보며 하루를 하느님을 위한 희생과
봉사로 뜻 있게 보냈습니다. 통증이 남에게 전해지는 것에 대
한 걱정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에 안심했기 때문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 무렵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다면 금별이를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증을 느낄 수 없는 관계로 저는 한 달에 한
번 간단한 진찰을 받으러 외출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산 깊
은 곳에 있는 수녀원에서는 병원만 다녀오기도 빠듯했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병원의 이름 정도만 편지로 보낼 수 있었을
뿐, 금별이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 안
에서 금별이와 마주쳤을 때 더욱 기뻤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별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상상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뛸 듯이 기뻐하지는 않
았습니다. 그저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보는 양 그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 건드리자 금별은 그
제야 저를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거의 일 년 만에 보
는 얼굴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편지
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그녀에게 맞추어 저도 두서없
는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금별과 나의 마
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6
집에 한 번 들렸다 가지 않겠냐는 금별의 질문에 저는 흔쾌
히 응했습니다. 정기진찰을 빼먹고 금별의 집에 들리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께 거짓말을 하게 되는 큰 죄입니다. 그러
나 저는 불경스럽게도 하느님과 친구를 저울질 하며 ‘이 정도
잘못쯤은 용서해 주지 않으실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금별이의 집은 크고 넓었습니다. 집에는 금별이의 아버지와
가정부, 그리고 편지를 통해 이야기 했던 네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금별의 방은 이층 제일 끝이었습니다. 집 안 주변
의 경비가 삼엄하기 그지없기에 조금 무섭다고 이야기 하자
금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요즘 바깥이 불안 불안 하다고 이
야기 했습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 하는 금별이를 보며 저 역시
정말 그렇겠다며 옅은 웃음을 흘렸습니다. 제가 수녀원에서의
이야기를 하자 금별이는 정말 힘들겠다는 둥 제가 존경스럽다
는 둥 장단을 맞춰 주었고, 저는 그런 금별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머릿속 깊은 곳 까지 틀어박혀 있는 이야기 까지
꺼내 보였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 주었지만 금별
이는 수녀원의 명절 이야기를 제일 재미있어 했습니다. 수녀원
에서는 명절이면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대신 조상님께 기도를
올리고 윷놀이 등을 하는데, 금별이가 생각하기에 ‘서양’의 상
징처럼 보이는 성당의 사람들이 윷놀이를 하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옆구리가 아프네.”
금별이는 앉은 채로 이야기 했습니다.
“이상하네. 아까부터 옆구리가 아파.”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듯 금별이가 옆구리를 붙잡고 웅크렸
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금별이가 느끼는 통증은 저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한참을 아무 말도 않다가 이제
가보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벌써?”
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금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7
제가 간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두 달 전이었
습니다. 계속 해서 형식적인 진찰만 해 오던 저에게 의사 선생
님이 정밀검사를 한 번 받아볼 것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통증
이 없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제 몸 속에 더 이상 떼
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번진 암세포가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들
었을 때 저는 조용히 “그래요?” 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약물치료와 진통제의 처방을 거절한 뒤 수녀원으로 돌아
왔습니다. 여전히 수녀원에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며, 간혹 옆
구리가 쑤시다고 툴툴대는 동료들을 놀리며, 금별이에게 편지
를 보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죽는 순간 까지 타인에게 희생
을 강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실로
담백한 사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