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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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루 위에서 작은 소년이 섰다. 그는 부두를 바라보았다. 부두는 크고 번잡했다. 들어오는 하얀 배들이 관광객들을 날랐다. 섬에 발을 붙인 관광객들은 검은 바다에 쓰레기를 던졌다.
소년은 쓰레기를 대수롭지 않게 버리는 관광객들이 오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별 것 아닌 소년의 배에 타는 것을 좋아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면 된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나루터로 온다. 소년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몇 살이니?"
소년이 묵묵히 배를 몰 적이면, 그들은 동정을 가장하며 그런 말을 건넸다. 소년은 자기 나이에 한 두 살을 더해서 이야기하곤 웃었다. 정말로 동정을 하는 이들은 배 삾을 많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동정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저도 잘 모르는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소년에겐 별 흥취가 없는 자연을 찬양하며 자기 아이의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단지 노를 저을 뿐이었다.
소년은 강이 좋았다. 강은 바다와 달리 더럽지 않았다. 이름모를 물고기며 빨간 귀를 한 거북이들이 사방에서 퐁당거렸다. 그러나 소년은 강을 믿지 않았다. 강은 소년의 할아버지를 삼켰던 것이다.
그가 배를 몰기 시작한 지도 어언 이 년이다. 할아버지가 죽은 뒤, 그는 배를 몰아야 했다. 그에게는 부양할 할머니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학교를 가고, 휴일이나 밤이 되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노를 저었다. 그렇게 해야 벌이가 되었다.
노를 저어서 맞은 편에 가면 관광객들은 우르르 내리곤 했다. 그렇게 다섯 번 정도 왕복을 하면 평일의 일이 끝난다.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익숙해진 그에겐 크게 힘들지 않았다. 정작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소년은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나루터에서, 자신이 지나온 맞은 편의 나루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 서있다. 자신보다 작은 키가 맞은 편에서는 마치 거인처럼 보인다. 소년은 홀로 노를 저었다. 배는 부드럽게 수면을 지나 맞은 편으로 향했다.
소년은 낮은 나루터에 배를 묶었다. 길로 올라가려는데 위에 누군가 있다. 아까 본 것이다. 나무처럼 곧게 선 허리가 그를 내려다본다.
"정근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얼마지?"
"삼만 원."
"거짓말 하면 못 써."
정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어보였다. 그의 할머니는 입맛을 다시고는 소년이 건네주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소년의 얇은 호주머니를 바라보며 거기에 열쇠 말고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볼멘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돈이 부족하다. 전기세가 밀렸다. 그외 잡다한 세금이 불만이다. 대통령이 문제라고 했다. 정근은 묵묵히 걸었다. 그의 할머니의 말은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불평과 불만 투성이다. 정근은 그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다음 날은 학교에 급식비를 가져가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한다. 정근은 그 말을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급식비가 밀렸어요."
그는 죄를 지은 것처럼 말했다.
"얼마인데?"
"십이만 원이오."
곧 다시 불평이 터져나왔다. 생활보호 대상자를 정하는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처.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화가 나서 그만 그녀를 두고 집에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십일조를 착실히 내니까, 언젠가 하나님이 우릴 잘 봐줄 거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정근은 그녀에게 가계부라도 쓰라고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할머니는 항상 그 이야기가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정근은 그날도 많이 참았다. 그는 매일 일한다. 그리고 일한 돈을 할머니에게 준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날 같은 때에는 그렇게 적은 돈도 아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돈을 교회나 그가 알 수 없는 곳에 쓰는 것이다.
정근은 그 모든 것들. 할머니의 생각이며 종교며, 할머니가 돈을 갈취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는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작은 집안을 청소하거나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 일을 하고나선 교회나 노인정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렇게 자신이 번 돈이 할머니 멋대로 쓰여진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정근이 아주 조금 더 어렸을 때는 할머니에게 불만을 이야기했다. 돈을 많이 번 달에 있었던 일이다. 정근은 그 달의 정산을 하다가 할머니가 세금을 낼 돈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정근은 기가 차서 크게 외쳤었다. 도대체 돈을 어디에 쓰냐고 물었다. 목사의 배를 불리는데 썼는지. 아니면 어떤 노인에게 마음이라도 있냐고 크게 외쳤다. 할머니는 이러한 모욕적인 말에 크게 분노했다. 당장 정근의 따귀를 때리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바깥은 추운 겨울 바람이 불었다. 정근은 그것을 맞으며 서럽게 울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이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서러워하는 그는 문득 등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였다. 그녀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정근의 등을 어루만졌다. 등이 축축하게 적셔져왔다. 정근은 그 날만큼은 정말로 감동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도 할머니는 돈을 어디에 쓰는지 밝히지 않았다. 정근은 자신이 번 돈을 자기 몰래 쓰는 할머니에게 늘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분노를 삭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분노로 눈을 감을 때면 곧 분노는 사그라지곤 했다. 그의 할머니가 그가 어릴 적 그를 키우던 일이며, 따뜻한 국물을 많이 먹으라며 입에 떠밀던 기억. 그 기억 때문에 그는 다시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도 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 상태로 학교에 가 오전 수업을 들었다. 그날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시간이 있었다. 정근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연습할 시간은 부족했고, 딱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근의 사정을 모르는 미술 선생은 정근의 그림에 B라는 평점을 주었다. 성실하나 평범한 기교에, 주제는 없다. 미술 쪽을 지망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 미술 대회는 힘들 것이다. 그런 혹평이었다. 정근은 반발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잘재잘 떠들며 야간 자율학습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집으로 왔다. 작은 집에는 그가 아끼는 캔버스가 있었다. 그는 일을 하기 전 한 시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캔버스에는 강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미술 선생에게 혹평을 받은 자신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준비할 작품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곳의 강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아무리 생각해도 강의 풍경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조금 기다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컴퓨터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원하는 정보도 찾고,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여러 일들을 하는데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그림을 평가받고, 다른 멋진 작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은 그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리고 그 뜻을 할머니에게 몇 번이고 언듯 비쳤다. 그러나 그의 할머니는 그러한 뜻을 거절했다. 살림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근은 한숨을 쉬고 무기력하게 교복을 벗었다. 의자에 대충 걸은 뒤 가벼운 면티와 바지를 입고 나루터로 향했다. 오늘도 또 일이다. 지겹지만 계속 웃어야만 하는 일.
저녁이 되어 해가 저물자 일은 끝났다. 관광객들은 곧 육지로 돌아가기 위해 부두로 가 진짜 배를 탔다. 정근이 모는 가짜 배가 아니다. 연기를 내뿜으며 사람을 나르는 배다.
정근은 그것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뒤로 다가오는 이를 느꼈다. 등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할머니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근은 그녀가 마치 곰과 같다고 느꼈다.
"오늘은?"
"얼마 못 벌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올라왔다. 할머니는 무심하게 그를 바라본다.
"얼만데?"
"또 삼만 원."
"그렇구나."
그들은 나루를 지나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 인적 드문 섬 마을의 거리는 싸늘했다. 덩치가 큰 교회의 청년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시시덕거렸다. 할머니는 항상 그들을 착한 청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근은 사실을 안다. 다른 곳에서는 어쩔 지 몰라도, 이 섬에서 그들은 청년이 아니라 깡패에 가깝다.
"일요일이 가깝다."
할머니는 꿈을 꾸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십일조를 내야지."
정근은 자신이 번 돈을 할머니가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너무나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목까지 치달은 말을 삼켰다. 대신 확언을 받으려는 듯 말했다.
"십일조만 내는 거죠?"
"그래."
"약속해요, 십일조만 내겠다고."
"그렇다니까. 얘두 참. 갑자기 또 왜 그러니."
그들은 거름 냄새가 풍기는 밭을 지났다. 곧 높이 솟은 교회가 보였다. 그리고 같이 솟은 빌라들도 보였다. 정근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빌라 사이로 이끌었다. 풀향기로 가득한 언저리에 그들의 집이 있다. 정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곤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을 잤다.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리는 새벽이 왔다. 정근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아 목 언저리가 흔들거렸다.
멍하니 양치질을 한 뒤 집안을 둘러보다가 그는 캔버스를 보게 되었다. 어제 치우지 않고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유화 물감으로 가득 칠해진 강. 그러나 강들은 어지럽고 더러웠다. 마치 바다만 같았다.
정근은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멀리 보이는 배에 자신을 세웠다. 관광객들 역시 세웠다. 그리고 맞은 편, 그를 기다리는 나루터에 같은 나무처럼 짙은 갈색을 칠했다.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장승인 듯, 곰인 듯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그는 히죽 웃었다. 기묘한 만족감이 그의 이마를 치고 올라왔다. 오랜만에 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그는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미술 대회를 준비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 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차분했다.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들었는데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 날은 차가운 비가 내렸다. 비가 유리창을 미끄러져 먼지를 쓸어내렸다. 학생들은 대리석 조상을 보고 스케치를 했다. 미술 대회를 준비하는 정근은 스케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그는 섬세하게 덧칠을 했다. 정말로 이상한 날이다. 강의 정경이며 사물을 확실히 그릴 수가 있었다. 더러운 오물들과 거북이들 하나하나까지 그려진 그림은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정확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먼 나루터에서 바라보는 그림자. 어둠 속에서 기는 그림자들이 수채화인 것처럼 번졌다. 그 때문에 그림엔 환상적인 요소가 감돌았다.
한창 열중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그의 그림을 우습게 보던 미술 선생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그는 정근이 그린 강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이야. 조금 껄끄러운 느낌도 들지만. 아주 인상이 좋아. 어떻게 했지?"
"집에서 그냥 그렸습니다."
정근은 말재주가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미술 선생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쳐주고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순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정근은 조금 당황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날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학교에 가서 그림에 열중했다. 별 것 아닌 표현에도 힘을 주었다. 세세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그 그림을 내려다본다. 그것들의 묘사에 중심을 주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그림자들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비가 그친 날 그는 집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루터에 위치한 갈색 그림자가 눈에 띄였다. 곰에 가까웠다. 그것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웃는 것처럼 삐딱히 선 채였다.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그림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있는 힘을 다해 박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정근은 대신 그 힘을 붓에다 주었다. 거칠지만 섬세한 방법으로 갈색 그림자에 힘을 더했다.
학교 선생은 다시 칭찬을 했다. 정말 좋은 작품이 탄생할 것 같다고 했다. 정근은 그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밤이 되자 곧 사라졌다. 밤이면 밤마다 할머니는 돈을 요구했다. 너무나 싫은 일이다. 그래도 미술 대회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날들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정근은 그 날 유난히 많이 몰린 관광객을 건네다 주었다. 머리가 빙빙 돌아서 빨리 잠을 자고만 싶은 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교회 근처의 골목이다. 평소라면 정근이 피했을 곳이지만, 그는 잠에 취해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조용히 걸음을 걷던 그는 힘 없이 벽에 기댔다. 너무 일을 많이 했고, 또 대회를 준비하느라 눈을 붙이지 못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쉬고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았다.
약간 시간이 지났다. 눈을 감은 그에게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다. 그러나 꿈이 아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달이 노란빛을 세상에 뿌렸다.
이야기 소리는 정근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담벼락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 청년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수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편없는 수입에 화를 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섬마을을 욕하고 육지가 좋다고 했다.
정근은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무지 관심이 없는 소리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교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상스럽고 거친 욕설이었다. 그 욕설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들은 순진한 목사와 섬마을 사람들을 비웃었다. 누가 가장 웃긴 지 떠들었다. 그들의 입에서 할머니의 이름이 나왔다.
순간 온 몸에 피가 치솟았다. 피곤에 지친 몸이 날래게 움직였다. 정근은 담벼락을 넘어 미친 듯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담배를 피던 청년이 당황하다가 정근의 주먹을 맞았다.
다른 청년 하나가 피를 뱉으며 휘청거리는 청년을 부축했다. 손이 빈 청년은 욕을 하면서 정근을 친다. 정근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몸으로 받았다.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조용하던 골목은 악쓰는 소리와 숨가쁜 고함으로 가득 찼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그들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청년들은 아직 어렸다. 그래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남들이 바라보는 와중에도 계속 정근을 때렸다. 정근은 바닥에 엎어져 배와 옆구리를 움켜잡고 무력하게 얻어맞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교회에 기도를 다니는 사람들이다. 젊은 남자는 없었고, 가장 젊은 남자래봐야 밭을 몇 개 가진 중년 남성 하나였다. 그리고 그조차 겁을 내고 있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그만 하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청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경찰을 부른 것 같다. 그러나 정근은 경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피곤한 몸에 머리를 맞아 멍했다.
그 때였다. 갈색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청년들에게 달려들었다. 청년들은 조금 당황했다. 그들의 어머니뻘인 그녀를 어떻게 막아야할 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잘 알았다. 들고 있던 가방으로 청년의 머리를 후려쳤다. 가방으로 머리를 맞은 청년은 잠시 휘청거렸다. 곧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주먹을 쥐고 그녀를 세게 쳤다.
우스꽝스러운 비명과 함께 여인은 고꾸라진다. 몸을 조금 꿈틀거린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한 짓에 놀라 잠시 멈추어선다. 맞아서 피를 흘리던 정근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갈색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게 맞았는지 움직이지도 않는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찰이 달려들었다. 청년들은 주춤거리다가 단숨에 내뺐다. 정근은 손을 들었다.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그녀를 만지려 하다. 그녀의 갈색 옷이 마치 털만 같다. 할머니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곧추 선 허리로 팔을 들 것만 같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정근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할머니는 곰이었다. 그녀는 맞은 편 나루터에서 손짓을 한다.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꿈에서 깼을 때, 정근은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그에게 별로 다치지 않았으니 조금 요양하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살인범을 지금 수사중이라고 했다. 곧 잡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담임과 학교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싶다며 웃었다. 그리고 그를 격려했다. 정근은 그냥 웃었다. 곧 학교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지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남긴 통장을 주었다. 천만이 넘는 돈이 들어가 있었다. 정근은 그제서야 할머니가 교회에만 돈을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름진 얼굴들. 할머니의 친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근은 겨우 고맙다고 말했다. 목이 막혀서 말을 하기 힘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퇴원했다. 혼자 집에 들어갔다. 집안이 어지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대로 누웠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꺼내어 밥과 함께 먹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늘 울던 풀벌레들도 울지 않는다. 정근은 정적 속에서 밥을 먹다가 테레비를 켰다. 코미디언들이 그 안에서 시시덕거리고 웃었다. 정근 역시 웃었다. 웃다가 전원을 내렸다.
그는 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퇴원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말을 건넸다. 정근은 웃었다. 힘이 없었다. 단지 미술 시간이 왔으면 조금 좋을 것이라는 작은 바람만 남았다.
그의 바람은 곧 충족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미술 선생은 그림을 완성하라고 했다. 예전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놀래켜 보라며 격려했다.
캔버스를 바라본다. 그는 갈색 그림자를, 나루터에 엉긴 곰을 바라본다. 무언가 생각을 한 듯이 기름통에 붓을 빨았다. 그리고 물감을 적셔 그림자에 이목구비를 새긴다. 갈색 그림자는 장승처럼 바뀌었다가 다시 변화한다.
이제 갈색 그림자는 없다. 남은 것은 허름한 갈색 옷을 입은 힘 없는 노인이다. 정근은 노인처럼 힘 없이 웃었다. 지켜보던 미술 선생은 안경을 올리더니 혀를 찬다. 왜 그렇게 했는지 물었다. 정근이 대답하지 않자 대회에 내보내긴 하겠지만 좋은 평가는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정근은 아무튼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는 조금 더 수업을 듣다가 나루터로 향했다.
강은 흙탕이었다. 저번에 내린 비 때문일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더러워진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정근은 그것이 묘하게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는 배를 탔다. 강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으면서도 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싶어하는 손님을 받았다.
노를 저어 맞은 편으로 향한다. 물살은 잔잔하고 평화롭다. 맞은 편의 나루터에서 갈색 그림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눈을 비빈다. 맞은 편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눈을 비비며 흐릿한 눈을 다시 뜬다. 그제서야 갈색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루터에 세워놓은 낡은 노가 마치 곰처럼 서서 그를 내려다본다. 순간 정근은 아찔하다.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관광객들은 출렁하는 배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 없다. 흔들리는 눈을 강에 댄다.
강은 흐른다. 흙탕물이 씻겨져 내리고 맑은 물이 서서히 흘러나온다. 그곳에서 민물고기들이 머리를 내민다.
배는 천천히 강을 가로지른다. 지나간 자리에 작은 물결이 인다. 물결 속에서 꿈이 눈을 뜬다.
소년은 쓰레기를 대수롭지 않게 버리는 관광객들이 오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별 것 아닌 소년의 배에 타는 것을 좋아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면 된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나루터로 온다. 소년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몇 살이니?"
소년이 묵묵히 배를 몰 적이면, 그들은 동정을 가장하며 그런 말을 건넸다. 소년은 자기 나이에 한 두 살을 더해서 이야기하곤 웃었다. 정말로 동정을 하는 이들은 배 삾을 많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동정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저도 잘 모르는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소년에겐 별 흥취가 없는 자연을 찬양하며 자기 아이의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단지 노를 저을 뿐이었다.
소년은 강이 좋았다. 강은 바다와 달리 더럽지 않았다. 이름모를 물고기며 빨간 귀를 한 거북이들이 사방에서 퐁당거렸다. 그러나 소년은 강을 믿지 않았다. 강은 소년의 할아버지를 삼켰던 것이다.
그가 배를 몰기 시작한 지도 어언 이 년이다. 할아버지가 죽은 뒤, 그는 배를 몰아야 했다. 그에게는 부양할 할머니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학교를 가고, 휴일이나 밤이 되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노를 저었다. 그렇게 해야 벌이가 되었다.
노를 저어서 맞은 편에 가면 관광객들은 우르르 내리곤 했다. 그렇게 다섯 번 정도 왕복을 하면 평일의 일이 끝난다.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익숙해진 그에겐 크게 힘들지 않았다. 정작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소년은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나루터에서, 자신이 지나온 맞은 편의 나루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 서있다. 자신보다 작은 키가 맞은 편에서는 마치 거인처럼 보인다. 소년은 홀로 노를 저었다. 배는 부드럽게 수면을 지나 맞은 편으로 향했다.
소년은 낮은 나루터에 배를 묶었다. 길로 올라가려는데 위에 누군가 있다. 아까 본 것이다. 나무처럼 곧게 선 허리가 그를 내려다본다.
"정근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얼마지?"
"삼만 원."
"거짓말 하면 못 써."
정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어보였다. 그의 할머니는 입맛을 다시고는 소년이 건네주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소년의 얇은 호주머니를 바라보며 거기에 열쇠 말고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볼멘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돈이 부족하다. 전기세가 밀렸다. 그외 잡다한 세금이 불만이다. 대통령이 문제라고 했다. 정근은 묵묵히 걸었다. 그의 할머니의 말은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불평과 불만 투성이다. 정근은 그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다음 날은 학교에 급식비를 가져가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한다. 정근은 그 말을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급식비가 밀렸어요."
그는 죄를 지은 것처럼 말했다.
"얼마인데?"
"십이만 원이오."
곧 다시 불평이 터져나왔다. 생활보호 대상자를 정하는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처.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화가 나서 그만 그녀를 두고 집에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십일조를 착실히 내니까, 언젠가 하나님이 우릴 잘 봐줄 거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정근은 그녀에게 가계부라도 쓰라고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할머니는 항상 그 이야기가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정근은 그날도 많이 참았다. 그는 매일 일한다. 그리고 일한 돈을 할머니에게 준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날 같은 때에는 그렇게 적은 돈도 아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돈을 교회나 그가 알 수 없는 곳에 쓰는 것이다.
정근은 그 모든 것들. 할머니의 생각이며 종교며, 할머니가 돈을 갈취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는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작은 집안을 청소하거나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 일을 하고나선 교회나 노인정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렇게 자신이 번 돈이 할머니 멋대로 쓰여진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정근이 아주 조금 더 어렸을 때는 할머니에게 불만을 이야기했다. 돈을 많이 번 달에 있었던 일이다. 정근은 그 달의 정산을 하다가 할머니가 세금을 낼 돈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정근은 기가 차서 크게 외쳤었다. 도대체 돈을 어디에 쓰냐고 물었다. 목사의 배를 불리는데 썼는지. 아니면 어떤 노인에게 마음이라도 있냐고 크게 외쳤다. 할머니는 이러한 모욕적인 말에 크게 분노했다. 당장 정근의 따귀를 때리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바깥은 추운 겨울 바람이 불었다. 정근은 그것을 맞으며 서럽게 울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이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서러워하는 그는 문득 등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였다. 그녀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정근의 등을 어루만졌다. 등이 축축하게 적셔져왔다. 정근은 그 날만큼은 정말로 감동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도 할머니는 돈을 어디에 쓰는지 밝히지 않았다. 정근은 자신이 번 돈을 자기 몰래 쓰는 할머니에게 늘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분노를 삭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분노로 눈을 감을 때면 곧 분노는 사그라지곤 했다. 그의 할머니가 그가 어릴 적 그를 키우던 일이며, 따뜻한 국물을 많이 먹으라며 입에 떠밀던 기억. 그 기억 때문에 그는 다시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도 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 상태로 학교에 가 오전 수업을 들었다. 그날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시간이 있었다. 정근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연습할 시간은 부족했고, 딱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근의 사정을 모르는 미술 선생은 정근의 그림에 B라는 평점을 주었다. 성실하나 평범한 기교에, 주제는 없다. 미술 쪽을 지망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 미술 대회는 힘들 것이다. 그런 혹평이었다. 정근은 반발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잘재잘 떠들며 야간 자율학습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집으로 왔다. 작은 집에는 그가 아끼는 캔버스가 있었다. 그는 일을 하기 전 한 시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캔버스에는 강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미술 선생에게 혹평을 받은 자신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준비할 작품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곳의 강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아무리 생각해도 강의 풍경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조금 기다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컴퓨터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원하는 정보도 찾고,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여러 일들을 하는데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그림을 평가받고, 다른 멋진 작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은 그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리고 그 뜻을 할머니에게 몇 번이고 언듯 비쳤다. 그러나 그의 할머니는 그러한 뜻을 거절했다. 살림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근은 한숨을 쉬고 무기력하게 교복을 벗었다. 의자에 대충 걸은 뒤 가벼운 면티와 바지를 입고 나루터로 향했다. 오늘도 또 일이다. 지겹지만 계속 웃어야만 하는 일.
저녁이 되어 해가 저물자 일은 끝났다. 관광객들은 곧 육지로 돌아가기 위해 부두로 가 진짜 배를 탔다. 정근이 모는 가짜 배가 아니다. 연기를 내뿜으며 사람을 나르는 배다.
정근은 그것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뒤로 다가오는 이를 느꼈다. 등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할머니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근은 그녀가 마치 곰과 같다고 느꼈다.
"오늘은?"
"얼마 못 벌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올라왔다. 할머니는 무심하게 그를 바라본다.
"얼만데?"
"또 삼만 원."
"그렇구나."
그들은 나루를 지나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 인적 드문 섬 마을의 거리는 싸늘했다. 덩치가 큰 교회의 청년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시시덕거렸다. 할머니는 항상 그들을 착한 청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근은 사실을 안다. 다른 곳에서는 어쩔 지 몰라도, 이 섬에서 그들은 청년이 아니라 깡패에 가깝다.
"일요일이 가깝다."
할머니는 꿈을 꾸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십일조를 내야지."
정근은 자신이 번 돈을 할머니가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너무나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목까지 치달은 말을 삼켰다. 대신 확언을 받으려는 듯 말했다.
"십일조만 내는 거죠?"
"그래."
"약속해요, 십일조만 내겠다고."
"그렇다니까. 얘두 참. 갑자기 또 왜 그러니."
그들은 거름 냄새가 풍기는 밭을 지났다. 곧 높이 솟은 교회가 보였다. 그리고 같이 솟은 빌라들도 보였다. 정근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빌라 사이로 이끌었다. 풀향기로 가득한 언저리에 그들의 집이 있다. 정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곤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을 잤다.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리는 새벽이 왔다. 정근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아 목 언저리가 흔들거렸다.
멍하니 양치질을 한 뒤 집안을 둘러보다가 그는 캔버스를 보게 되었다. 어제 치우지 않고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유화 물감으로 가득 칠해진 강. 그러나 강들은 어지럽고 더러웠다. 마치 바다만 같았다.
정근은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멀리 보이는 배에 자신을 세웠다. 관광객들 역시 세웠다. 그리고 맞은 편, 그를 기다리는 나루터에 같은 나무처럼 짙은 갈색을 칠했다.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장승인 듯, 곰인 듯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그는 히죽 웃었다. 기묘한 만족감이 그의 이마를 치고 올라왔다. 오랜만에 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그는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미술 대회를 준비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 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차분했다.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들었는데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 날은 차가운 비가 내렸다. 비가 유리창을 미끄러져 먼지를 쓸어내렸다. 학생들은 대리석 조상을 보고 스케치를 했다. 미술 대회를 준비하는 정근은 스케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그는 섬세하게 덧칠을 했다. 정말로 이상한 날이다. 강의 정경이며 사물을 확실히 그릴 수가 있었다. 더러운 오물들과 거북이들 하나하나까지 그려진 그림은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정확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먼 나루터에서 바라보는 그림자. 어둠 속에서 기는 그림자들이 수채화인 것처럼 번졌다. 그 때문에 그림엔 환상적인 요소가 감돌았다.
한창 열중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그의 그림을 우습게 보던 미술 선생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그는 정근이 그린 강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이야. 조금 껄끄러운 느낌도 들지만. 아주 인상이 좋아. 어떻게 했지?"
"집에서 그냥 그렸습니다."
정근은 말재주가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미술 선생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쳐주고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순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정근은 조금 당황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날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학교에 가서 그림에 열중했다. 별 것 아닌 표현에도 힘을 주었다. 세세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그 그림을 내려다본다. 그것들의 묘사에 중심을 주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그림자들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비가 그친 날 그는 집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루터에 위치한 갈색 그림자가 눈에 띄였다. 곰에 가까웠다. 그것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웃는 것처럼 삐딱히 선 채였다.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그림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있는 힘을 다해 박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정근은 대신 그 힘을 붓에다 주었다. 거칠지만 섬세한 방법으로 갈색 그림자에 힘을 더했다.
학교 선생은 다시 칭찬을 했다. 정말 좋은 작품이 탄생할 것 같다고 했다. 정근은 그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밤이 되자 곧 사라졌다. 밤이면 밤마다 할머니는 돈을 요구했다. 너무나 싫은 일이다. 그래도 미술 대회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날들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정근은 그 날 유난히 많이 몰린 관광객을 건네다 주었다. 머리가 빙빙 돌아서 빨리 잠을 자고만 싶은 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교회 근처의 골목이다. 평소라면 정근이 피했을 곳이지만, 그는 잠에 취해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조용히 걸음을 걷던 그는 힘 없이 벽에 기댔다. 너무 일을 많이 했고, 또 대회를 준비하느라 눈을 붙이지 못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쉬고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았다.
약간 시간이 지났다. 눈을 감은 그에게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다. 그러나 꿈이 아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달이 노란빛을 세상에 뿌렸다.
이야기 소리는 정근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담벼락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 청년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수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편없는 수입에 화를 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섬마을을 욕하고 육지가 좋다고 했다.
정근은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무지 관심이 없는 소리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교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상스럽고 거친 욕설이었다. 그 욕설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들은 순진한 목사와 섬마을 사람들을 비웃었다. 누가 가장 웃긴 지 떠들었다. 그들의 입에서 할머니의 이름이 나왔다.
순간 온 몸에 피가 치솟았다. 피곤에 지친 몸이 날래게 움직였다. 정근은 담벼락을 넘어 미친 듯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담배를 피던 청년이 당황하다가 정근의 주먹을 맞았다.
다른 청년 하나가 피를 뱉으며 휘청거리는 청년을 부축했다. 손이 빈 청년은 욕을 하면서 정근을 친다. 정근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몸으로 받았다.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조용하던 골목은 악쓰는 소리와 숨가쁜 고함으로 가득 찼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그들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청년들은 아직 어렸다. 그래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남들이 바라보는 와중에도 계속 정근을 때렸다. 정근은 바닥에 엎어져 배와 옆구리를 움켜잡고 무력하게 얻어맞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교회에 기도를 다니는 사람들이다. 젊은 남자는 없었고, 가장 젊은 남자래봐야 밭을 몇 개 가진 중년 남성 하나였다. 그리고 그조차 겁을 내고 있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그만 하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청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경찰을 부른 것 같다. 그러나 정근은 경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피곤한 몸에 머리를 맞아 멍했다.
그 때였다. 갈색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청년들에게 달려들었다. 청년들은 조금 당황했다. 그들의 어머니뻘인 그녀를 어떻게 막아야할 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잘 알았다. 들고 있던 가방으로 청년의 머리를 후려쳤다. 가방으로 머리를 맞은 청년은 잠시 휘청거렸다. 곧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주먹을 쥐고 그녀를 세게 쳤다.
우스꽝스러운 비명과 함께 여인은 고꾸라진다. 몸을 조금 꿈틀거린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한 짓에 놀라 잠시 멈추어선다. 맞아서 피를 흘리던 정근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갈색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게 맞았는지 움직이지도 않는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찰이 달려들었다. 청년들은 주춤거리다가 단숨에 내뺐다. 정근은 손을 들었다.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그녀를 만지려 하다. 그녀의 갈색 옷이 마치 털만 같다. 할머니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곧추 선 허리로 팔을 들 것만 같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정근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할머니는 곰이었다. 그녀는 맞은 편 나루터에서 손짓을 한다.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꿈에서 깼을 때, 정근은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그에게 별로 다치지 않았으니 조금 요양하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살인범을 지금 수사중이라고 했다. 곧 잡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담임과 학교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싶다며 웃었다. 그리고 그를 격려했다. 정근은 그냥 웃었다. 곧 학교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지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남긴 통장을 주었다. 천만이 넘는 돈이 들어가 있었다. 정근은 그제서야 할머니가 교회에만 돈을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름진 얼굴들. 할머니의 친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근은 겨우 고맙다고 말했다. 목이 막혀서 말을 하기 힘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퇴원했다. 혼자 집에 들어갔다. 집안이 어지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대로 누웠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꺼내어 밥과 함께 먹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늘 울던 풀벌레들도 울지 않는다. 정근은 정적 속에서 밥을 먹다가 테레비를 켰다. 코미디언들이 그 안에서 시시덕거리고 웃었다. 정근 역시 웃었다. 웃다가 전원을 내렸다.
그는 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퇴원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말을 건넸다. 정근은 웃었다. 힘이 없었다. 단지 미술 시간이 왔으면 조금 좋을 것이라는 작은 바람만 남았다.
그의 바람은 곧 충족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미술 선생은 그림을 완성하라고 했다. 예전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놀래켜 보라며 격려했다.
캔버스를 바라본다. 그는 갈색 그림자를, 나루터에 엉긴 곰을 바라본다. 무언가 생각을 한 듯이 기름통에 붓을 빨았다. 그리고 물감을 적셔 그림자에 이목구비를 새긴다. 갈색 그림자는 장승처럼 바뀌었다가 다시 변화한다.
이제 갈색 그림자는 없다. 남은 것은 허름한 갈색 옷을 입은 힘 없는 노인이다. 정근은 노인처럼 힘 없이 웃었다. 지켜보던 미술 선생은 안경을 올리더니 혀를 찬다. 왜 그렇게 했는지 물었다. 정근이 대답하지 않자 대회에 내보내긴 하겠지만 좋은 평가는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정근은 아무튼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는 조금 더 수업을 듣다가 나루터로 향했다.
강은 흙탕이었다. 저번에 내린 비 때문일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더러워진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정근은 그것이 묘하게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는 배를 탔다. 강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으면서도 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싶어하는 손님을 받았다.
노를 저어 맞은 편으로 향한다. 물살은 잔잔하고 평화롭다. 맞은 편의 나루터에서 갈색 그림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눈을 비빈다. 맞은 편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눈을 비비며 흐릿한 눈을 다시 뜬다. 그제서야 갈색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루터에 세워놓은 낡은 노가 마치 곰처럼 서서 그를 내려다본다. 순간 정근은 아찔하다.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관광객들은 출렁하는 배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 없다. 흔들리는 눈을 강에 댄다.
강은 흐른다. 흙탕물이 씻겨져 내리고 맑은 물이 서서히 흘러나온다. 그곳에서 민물고기들이 머리를 내민다.
배는 천천히 강을 가로지른다. 지나간 자리에 작은 물결이 인다. 물결 속에서 꿈이 눈을 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