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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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이니셜
1.
오늘은 비가 왔으면 했는데. 날씨는 나를 어지간히 좋아하나 보다. 그런 부탁을 하자마자 내 방의 회색 빛 커튼에 잘 어울리는 날씨를 만들어주고 비까지 뿌려주니 말이다. 물론 나는 오늘 아침 내 방에 있지 않아서 커튼과의 오묘한 조화는 볼 수 없었지만 기분 좋은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빗물을 막을 만한 허름한 지붕조차 없는 이 텅 빈 전철 플랫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물론 밤이고 비가 오면 더욱 좋다. 무엇보다 그 곳에 서있으면 나에게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오른손이 들고 있는 허름한 우산이 강하게 내리치는 빗물을 힘겹게 받아내고 있다. 우산을 겨우 피한 듯한 빗방울이 나의 옷과 손에 간간히 안착하였다. 겨울에 내리는 비는 마치 얼음송곳 같다.
역사 내의 수명이 거의 다한 형광조명이 작은 물방울 분자들로 흐릿하게 퍼져나간다. 뭐라 할 수 없는 몽환적인 느낌과 함께 전철이 들어올 내 오른쪽 레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일 위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야경이 빗물에 엉켜 나의 시신경을 오묘하게 간질거린다. 바람이 순간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수많은 색들의 향연 가운데 두 개의 둥그렇고 뿌연 흰색의 불 등이 번쩍였다. 그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 하는 것 조차 손해인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표현해주자면 내가 서있는 역사 내로 들어올 전철이었다.
-빠아아아아앙-
비에 젖은 레일을 달리는 전철이 난폭스럽게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11시. 기관사가 술 먹고 운행을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곧 그 흉물은 내 얼굴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었다. 마치 가려운 곳이 다듬어지지 않은 손톱으로 파헤쳐 지는 듯 시원스러웠다. 길게 움직이는 어눌한 빛의 창문 안으로 보이는 몇몇 알 수 없는 군상들은 모두 악마의 웃음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가볍게 아래를 툭 쳤다. 길쭉한 담배가 자신을 물어달라는 듯,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며 나의 입 앞으로 나왔다. 나는 그것을 거역할 만큼 나약한 남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덥석 물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중국제 지퍼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 우.”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는 정체 되어 내 쪽에서 잠시 머물렀다 곧 바람에 쓸려 갔다. 내 앞을 재빨리 지나갔던 전철은 점점 속도가 늦추어지더니 이내 서버렸다. 나는 나의 눈알을 살짝 밑으로 굴려 출입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3-4> 정확했다. 이내 출입문이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덜컹거리며 열렸다. 그곳에서는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한 중년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있었다. 술을 꽤나 먹은 듯한 구겨진 검은 바바리코트 차림의 그 남자는 나를 슬쩍 보더니 곧 비틀거리면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갑자기 발을 헛디뎠는지 크게 한번 흔들린 후 나에게로 쓰려져 왔다. 이곳 저곳을 굴렀을 것이 뻔한 구깃구깃한 코트를 잡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코끝이 근질거릴 정도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 남자는 나를 살짝 쳐다보았다. 술을 먹어 약간 충혈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살아있었다. 그는 나에게서 떨어져 무슨 더러운 것이 자신의 옷에 닿았던 것 마냥 얼굴을 푹 찡그린 채 옷을 툭툭 털어대었다. 나는 실소했다. 사실 저 행동은 내가 해야 옳은 것이다.
“담배 있소?”
그 사람은 뜬금없이 담배를 구걸했다. 하지만 뜬금없다는 것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할지는 미지수긴 하다. 나는 말없이 웃옷 주머니에 준비한 약간 해진 담배 한 개비를 그 사람 입에 물려주었다.
“이제 끝이니 빨리빨리 합시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더니 그 허름하고도 조그마한 상자곽 안에 있는 빳빳한 느낌의 성냥 한 개비를 덜덜 떨리는 손에 들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도 기분이 좋은지 누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 사람을 보니 속이 다 뒤집어 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도 꽤 부는데다가 비도 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에 성냥개비에 불을 붙인 다음 곧 그것으로 자신의 입에 달려있는 꼬깃한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말라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담배연기가 뱀처럼 흘러 나왔다. 담배연기는 요염한 움직임으로 그의 추한 모습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듯 하다가 이내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이 담배 맛은 언제나 좋다니까.”
그는 곧 피식 웃으며 나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누런 봉투를 슬쩍 넘겨주었다.
“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게 됐소.”
사과인지 비꼬음 인지 모를 말을 뱉어낸 후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개찰구로 발을 옮겼다. 나는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추악한 한 괴물이 비틀거리며 걷는, 다시는 보기 싫은 모습이 내 눈앞에서 없어질 때까지. 그것은 내 자신이 그런 추한 모습을 다시는 안 보겠다는 확신과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군.”
물고 있는 담배는 이미 반 이상이 태워졌다. 태워진 몸체는 길고 우아한 하얀 재가 되어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 나를 알아달라고, 자신이 한 일을 잊지 말라는 듯 담뱃재는 절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순히 귀찮은 털어버릴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어 넣고 내 입에서 담배를 띄어 놓은 다음 가볍게 털어 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재는 물이 흥건히 젖은 바닥에 힘없이 사그라져 갔다.
“이 지긋지긋한 일도.”
찰박거리는 기분 좋은 느낌을 두발로 느끼며, 졸고 있는 역무원 옆에 조용히 표를 놓은 다음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뿌옇고 흐릿한 분위기의 역내와는 달리 바깥은 온통 어둠이었다. 나는 이 때 느껴지는 감정이 가장 싫다. 하지만 그 곳은 내가 최소한의 휴식을 위해서라면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래도 그곳을 걷다 보면 이 기분 나름대로의 낭만을 찾아내 어느새 즐기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낭만이 생길만하면 어느새 내가 살고 있는 허름한 오피스텔에 도착해있는 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똑같다. 지겨움. 안도감. 이것은 날 참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나는 오피스텔 옆에 붙어있는 작은 편의점에 들어간다. 아무리 늙게 봐줘도 고등학생인 남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카운터에는 풀다가 만 수학 문제집이 놓여있었다. 내가 들어와도 모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어지간히 피곤한가 보다. 나는 조용히 온장고 쪽으로 가 언제나처럼 병에 들은 두유 두 개를 꺼내 카운터로 가져갔다. 종업원은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를 살짝 두어번 쳤다. 그는 눈을 뜨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보고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88 골드 하나.”
나는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피우던 담배를 주문했다.
“아...아 예!”
녀석은 워낙 당황했는지 늘 봐왔을 담배 진열대조차 찾지 못해 허둥거렸다. 나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그것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그 후로도 녀석이 한참을 허둥지둥 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4500원입니다.”
다행히도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녀석이 나의 물건을 넣어준 비닐봉지를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죄송합니다!”
깍듯이 인사하는 녀석의 마음이 내 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혀에서 씁쓸한 감각이 느껴졌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작은 보금자리는 이 허름한 오피스텔 맨 위층이었다. 40층. 현기증이 날 정도의 높이이다. 가끔씩 바람이 많이 불면 흔들거리는 게 꽤 위태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내 자신이 신발을 벗고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으로서 나에게는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나는 언제나 내 보금자리 앞에 와서는 초인종을 한번 지긋이 눌러본다. 그때마다 식상한 멜로디가 내 귀를 가볍게 흔들어 놓는다. 이 후 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내 자신이 알 수 있는 명확한 한 가지는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문에 달린 열쇠구멍에 지긋이 넣어 돌린다는 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 반기는 것은 K라고 불리는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이다. 나랑 산지 벌써 4년이 넘은 이 고양이는 이 무미건조한 방에서 삶의 90%을 보낸 놈답지 않게 꽤 활발한 녀석이다.
K는 날쌔고 조용하게 내 어깨 위로 올라 왔다. 솜털같이 가벼운 녀석은 나의 얼굴에 녀석의 채취를 남긴다. 나쁘지 않은 느낌. 나는 문을 닫고 신발을 벗은 다음 나의 자유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치장이 되어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느낌의 정사각형 회색공간에 덜렁 놓여진 흰 침대는 마치 내 자신이 정신병동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나는 머리를 몇 번 흔든 후 근처의 식탁에 비닐봉투에서 꺼낸 두유 두 병과 담배 한 갑 그리고 누런 봉투를 내려놓았다. K는 내가 지금 즈음 무엇을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 얼른 내 어깨에서 내려왔다. 나는 입고 있던 검은 가죽 코트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식기건조대에서 납작한 접시 하나를 꺼내 식탁에 두었던 두유 한 병의 봉인을 푼 후 그릇에 가득 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K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그릇까지 가서 우아한 자세로 두유를 먹기 시작한다. 나는 K가 두유를 할짝거리는 것을 보며 남은 두유를 한번에 들이켜 버렸다. 세치 혀에서 느껴지는 고소하고 약간 거부감이 드는 듯한 느끼한 맛은 나에게 삶의 활력을 준다.
나는 누런 봉투와 새로 사온 담배 갑을 들고 나의 침대 쪽으로 와서 털썩 앉았다. 푹신푹신한 침대는 빨래를 거의 하지 않아 냄새가 나지만 나는 마냥 편하기만 하였다. 나는 누런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봉해진 봉투의 끝을 손으로 부욱 찢어 냈다. 흉측하게 뜯어진 종이봉투 안에는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이 달랑 들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Another Double
Location: RC Church-
종이에는 단 두 줄 밖에 써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 하더니 이내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원스럽지도 않은 끈적거리고 더러운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곧 나는 종이를 구긴 다음 내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던져진 종이는 정확히 쓰레기통에 안착을 했지만 그 전에 쌓였던 쓰레기들 때문에 다시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별로 신경 쓸 것은 아니다. 나는 들고 있던 담배 갑의 포장을 푼 다음 담배 한 개비를 조심스럽게 뽑아 입에다 물렸다. 그 후는 언제나처럼 중국산 지퍼라이터로 불을 붙여 길게 풀무질을 하는 일뿐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이 집에 있는 단 하나의 창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회색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 밖을 가볍게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짙은 어둠과 비로 갇힌 네온사인이 만발한 도시가 보이고 있었다.
“끝내 배신인가.”
연기가 입에서 푸욱 피어 올랐다. 하얀 안개가 내 왕국 곧 곧을 뿌옇게 장식한다. K는 답답한지 연신 야옹 거리며 울어댄다. 담배는 어느새 짧디 짧은 필터만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철제 재떨이에 남은 불씨를 제거한 다음 K를 안았다. 소름 끼치게 부드러운 K의 털은 내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뭐, 상관 없겠지.”
K는 내 품에서 연체 동물인양 가볍게 빠져 나온 다음 190cm정도의 높이를 가볍게 뛰어 내려 화장실 옆 자신만의 공간으로 몸을 옮겼다. 살짝 피곤함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 앉았다. 눅눅한 이불의 느낌은 언제나 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가만히 누워 방 위를 쳐다보았다. 회색의 벽과 조그만 형광전등이 경망스럽게 껌뻑 거리며 나를 반겼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환영은 질색이다.
나는 목에 걸려있는 얇은 쇠줄을 목에서 걷어내었다. 얇은 쇠줄의 끝에는 보라색 칠이 된 반달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있었다. 나는 그것을 슥 들어 보았다. 빙글빙글, 보라색이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이제, 나에게는 이것 밖에 없는데…….”
나는 다른 한 손으로 펜던트를 꽉 쥐었다. 펜던트 모서리의 날카로운 부분이 내 손바닥을 자극하였다. 가슴 한 곳에서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 듯이 나의 뇌로 쓸려 들어왔다. 자극적인 감정이다. 마치 오르가슴과 같은 이 느낌은 나를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빠져 들게 한다.
“이 것 밖에…….”
-야옹-
이례적으로 나의 얼굴에 부드럽고 따듯한 것이 부비적 거렸다.
눈이 감겼다.
그날 잠은 간만에 참 편안하고 달콤했다.
2.
-double K, 8년만이군. 이렇게 얼굴을 마주 하고 이야기 하는 것도 말이야. -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네. 우리는 자네에게 신세를 많이 졌어. 우리가 자네에게 베풀었던 친절 그 이상으로. -
-10년 전 그들이 일으킨 사건에서 우리는 자네를 구해주었고 자네는 우리를 위해 8년간 일해주었지. 덕분에 그들의 거의 모든 것을 소탕해버릴 수 있었네. 기쁜 일이지. 자네 같은 스페셜 리스트가 우리를 위해 일해준 것은 우리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어. -
-이제 마지막일세.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인연은 끝이라네. 아쉽기는 하지만. -
-보상이 될련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약속한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도록 하지. -
-이번에 생포한 그들 조직의 간부 한 명에게 알아낸 소식인데, 자네가 굉장히 찾던 정보라서 우리도 아주 기뻤네. -
- 마지막 일만 끝내고 나면 이 정보는 자네 것일세. -
-자네가 원하는 정보다. 충분히 만족할 걸.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나서 했던 약속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네. -
-지금까지 고마웠네. -
“…오히려 제가 감사했죠.”
꿈의 끝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3.
내가 침대에서 일어난 시각은 자기 시작한지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후이다. 내가 일을 시작하려 하면 몸은 언제나 이렇게 24시간의 휴식시간을 원한다. 숙면을 취한 느낌은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와 다른 것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도 생각한 것이지만 분명 하늘은 나의 편이다. 나는 보조 등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담배 갑을 열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야옹-
K가 내 발 앞에서 야옹 거린다. 순간 늘 하는 생활패턴이 나의 머리 속을 흔든다.
“이런, 잊을 뻔 했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식탁 쪽으로 가 어제 사왔던 두유를 들었다. 차가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어제의 온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다만 차가운 냉기만이 두유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두유에 온기가 없든 있든 상관 할 것은 없었다. 두유가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나는 두유의 봉인을 풀고 어제 그 접시에 가득 두유를 부어주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K는 그릇 쪽으로 쪼르르 가 언제나 그 포즈 그대로 두유를 먹기 시작한다. 남은 두유를 내가 한번에 들이키는 것도 어제와 변한 것은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담배를 입에서 떼어 놓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예외 요소이다.
고소하고 느끼한 맛을 한껏 경험 한 후 나는 아까 물었던 담배를 다시 문 다음 불을 붙이며 창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비로소 평소 때와 같은 느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후 우.”
불이라도 난 듯 내 입에서 흰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창 밖의 차가운 야경은 내 눈까지 얼려버리는 듯 하다. 담배가 오늘따라 너무나 짧고 잘 타 들어 간다. 기분이 뭐라 말 할 수 없는 희열감에 사로 잡힌다. 이것은 꽤나 이질적인 감정이다.
"배신자에 두번 다시 가기 싫은 공간이라.......”
연기는 꾸준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곧 무엇인가의 생명이 타 들어간다는 뜻이다.
내 입에 물려있던 담배 한 개비는 곧 그 생명을 다하고 자신의 무덤으로 몸을 맡기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침대 밑에 있는 검은 서류용 가방을 하나 꺼냈다. 깨끗한 외관의 이 가방은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가방이다. 나는 가방을 들고 식탁까지 와서 어제 걸쳐두었던 검은 가죽 코트를 입었다. 차가운 코트의 느낌이 나의 몸뚱이를 잔인하게 감싸 안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느낌을 변태같이 즐겨본다. 절정의 순간이 지난 후 나의 몸은 한층 더 자극을 원하는 몸으로 탈바꿈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K가 내 옆에서 빙글빙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K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침에 맛있는 거 사다 줄 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야 아옹-
이례적으로 길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것이란 것 이라 봤자 두유라는 것을 K는 알고 있어서 일까? 언제나 일정한 톤과 길이로 우는 K답지 않았다.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별거 아니겠지.”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K가 나에게서 두 발자국 물러섰다. 나는 K를 보았다. 살짝, 내 얼굴 근육이 미소를 짓는 듯 했다.
“다녀올게.”
4.
[끼이이이익]
빈 공간에 싫지 않은 소리가 은은히 퍼져 나간다. 기분 좋은 소리이다. 문을 사이로 해서 가로막혔던 빗소리가 빈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기 시작하였다. 나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바닥에 떨어져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 낸다. 나의 눈동자에는 길게 늘어서 있는 목재로 된 긴 의자의 종렬 위로 색색의 아름다운 유리로 조각 된 아치형 구조물을 뒤로 보랏빛 광채의 순백색 십자가가 비추어졌다.
10년만에 들린 이곳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한 곳이다. 하지만 그 특별한 것을 잊기 위해 두번 다시 오지 않았던 이곳을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 왔어요.”
나는 맨 앞에 위치한 의자 중앙에 가볍게 앉았다. 오래된 미사용 목재 의자에서 나는 끼익 거리는 소리가 검은 공간을 뒤흔든다. 은은한 흰색 조명으로 비추어지는 대충 잡아도 3층 높이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은 내 심장을 강하게 조인다. 나의 바로 앞쪽에 달려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내 자신을 정화시키려는 듯 위압적인 각도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검고 넓은 양 옆 뒤의 공간에서는 날이 잘 선 칼날처럼 고요함을 내뱉었다. 차라리 앳된 처녀의 비명 소리라도 났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다. 평온하면서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긴장된 분위기가 내 전신을 부드럽고 요염하게 감쌌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고난일 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었다. 그 다음 그것을 가슴 쪽으로 조용히 가져다가 대었다. 눈을 감았다. 나를 조이고 있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사라졌다.
“정말로......”
무엇인가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이 푸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좋았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안한 감정. 아무런 긴장 없이 숨 쉴 수 있는 천국의 세상. 나는 그곳에 온 듯한 기분에 푹 빠져든다. 내 자신이 이곳을 찾는 단 하나의 이유는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개구쟁이! 여기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
멀리서 들려오는 아늑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눈을 떴다. 천국의 세상도, 나를 감싸준 어깨의 부드러운 느낌도 일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나는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전 나를 짓누르려 했던 것들만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 일까? 알 수 없었다. 나의 눈이 점점 충혈됨을 느꼈다. 따가웠다.
“이런 것은 원하지 않았었는데.”
나야 할 것이 나지 않았다. 흐름을 막아서는 것. 그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난......”
깍지를 천천히 풀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얼했다. 아팠다. 굉장히. 무지하게. 손가락에서 느껴진 고통이 팔에서부터 어깨를 통해 나의 몸 전체를 돌며 전율적인 고통을 선사하여 주었다. 시간이 일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 같았다. 마치 비디오의 일시 정지를 누른 듯, 나의 모든 감각은 정지해버렸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구나. 너란 아이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몸에 명령하는 법을 잊은 듯 나는 무감각의 세계에 빠져 들고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그런 무책임한 자아에 뱃머리를 맡긴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끼이이익]
익숙한, 기분 좋은 소리가 마치 데자뷰처럼 반복되었다. 멍청한 뱃사공이 노를 놓친 순간이다. 다시 똑똑한 뱃사공이 노를 잡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외적인 일. 나는 내 옆에 놓여진 검은 가방으로 눈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조용하게 인사를 건네봤다.
"네가 왜 여기있는 거지......?"
나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짐을 느꼈다.
"그건, 내 마음이지요."
나는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보랏빛 연기가 나의 눈을 혼란 시켰다. 무릎에 가져온 가방을 놓았다. 비에 젖은 가방 가죽이 내 허벅지를 차갑게 냉각시켰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검고 딱딱한, 윤기 있는 몸체를 자랑하는 스미스&웨슨제 리볼버 한 정과 한 개의 탄이 가득 장전된 탄창이 들어있었다.
"넌...넌......이...나쁜......"
차갑고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
"사실 이곳은 저에게도 참 중요한 공간입니다만......."
나는 재빨리 리볼버에게 탄창을 끼웠다. 두 어 번의 달그락 철컥거리는 소리들이 검은 공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소름 끼치도록 기분 좋은 소리. 나는 그것들을 오른손에 쥐었다. 차갑고 약간 무거운 듯한 느낌이 내 가슴을 주체할 수 없이 흥분시킨다.
그와 동시에 저쪽 어딘가에서도 날카로운 쇠의 부닥김을 느낄 수 있었
던건 분명 내 착각이 아닌거 같다.
“왠만하면 빨리 끝내죠. 이곳이 크게 훼손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닥쳐!"
-탕-
총탄이 나의 머리 바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 자신도 몸을 숨기기 좋은 곳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차라리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타다다닥. 조용했던 성당 안은 내 자신의 발소리와 상대의 발소리로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흡사 타락한 거리의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듯 하는 그 발소리는 내 자신이 둥근 주축 기둥에 몸을 숨기고 나서 음량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탕탕-
-파가각-
기대어 있는 기둥에 진동이 나의 몸까지 파고들었다. 대리석이 파괴되는 소리는 흡사 내 고막에 대리석 조각이 박히는 듯 끔직한 소리였다. 발소리가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고요가 내 몸 주위를 감쌌다. 나는 소리가 멈춘 곳을 감각적으로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나의 오른쪽 이었다. 하등 동물 같이 감각적인 것은 너무나 잘 찾아낸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리볼버의 총구를 소리가 멈춘 쪽으로 겨누었다.
-탕-
오른손에 묵직하고도 가벼운 진동이 내 온몸을 흥분시켰다. 투둑, 길게 늘어져 있던 담뱃재가 떨어졌다. 타다 닥 멀리서 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나도 다시 발 놀림을 바쁘게 움직였다. 성당 안은 다시 시끌거리기 시작하였다.
“너를 없앨 거야!”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의 고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거북스러운 느낌이 나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날 형편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내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바로 약간의 당황함이다.
“평소의 Double G 같지 않은걸.”
나는 그녀를 직접 본 적은 한번도 없다. 하지만 내 조직에서 녹화한 비디오에서 본 그녀의 솜씨는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녀가 비즈니스를 행할 때의 행동은 훤히 꿰고 있었다. 순백색의 타이즈 부분 부분과 흩날리는 은색의 긴 머리만이 간간히 눈에 잡히기만 하는 날렵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령과 같았다. 칼끝이 휘어진 변형된 단검 두 개와 손가락 크기만한 암기를 무기로 쓰며 5분 안에 목표의 사지를 모두 해체 내버리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다. 비즈니스 중에는 숨도 쉬지 않는 듯 조용하며 얼굴조차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백귀(白鬼). 내 자신만이 그녀에게 붙인 애칭이다.
그런 나의 머릿속에 박힌 백귀의 이미지는 바로 지금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타다다당-
내 바로 뒤쪽에서 대리석이 튀어 날라 왔다. 섬뜩한 느낌이 뒷골을 냉각시켰다.
“예외...라는 것이군”
나는 지금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일 필요성을 느꼈다. 백귀는 나보다 빠르다. 그것을 잡으려면 최대한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그녀를 한 번에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기회는 그 때뿐. 그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타다다당-
“내 소중한 것을 내놔!”
무엇인가 간절히 원하는 자의 목소리인 듯싶었다. 무엇을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그것을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내 자신도 받을 것이 있고 저 상대방에게서 이겨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라는 거다.
물고 있는 담배는 어느새 필터의 일부분까지 태운 채 내입에 종이 조각처럼 물려져 있었다. 평소의 일 처리에 비해서 너무나 시간을 끌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게 되는 걸.”
나는 쥐고 있는 리볼버를 다시 한 번 되 쥐어 보았다. 약간 달구어진 듯한 총신이 내 손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눈동자를 굴려 어느 곳이 좋을지 검색해 본다. 이런 곳에서는 딱히 좋은 곳이 없다.
“빨리 끝내야 할 텐데……”
저쪽에서 근접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럴 때는 감각에 몸을 맡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탕탕 탕탕-
-타다 닥-
나는 상대편의 총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총소리가 난 곳을 주시하였다. 끈적거리는 검은 뭉탱이 안에서 무엇인가 지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 오른손에 들고 있는 총을 겨누고 가볍게 방아쇠를 한번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당겨줬다.
-탕-
-......!-
약간은 둔탁한, 타격 감이 나의 육감을 자극했다. 맞았다. 치명타를 입지는 못했지만 신체의 어느 부분인가 타격은 분명히 주었다. 이겼다.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받고 못 이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제 결정타만주면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약간 긴장이 풀어지는 듯, 행동이 약간 둔해짐을 느꼈다.
-휘릭!-
-푹-
“…아차.”
오른 어깨가 갑자기 뜨거워짐을 느꼈다. 순간 오른손에 들려있던 리볼버를 놓칠 정도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겨우 놓치지는 않았다. 나는 재빨리 근처의 기둥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경계를 천천히 오른 어깨 쪽을 돌아봤다. 은도금이 된 복잡한 문양의 단검이 내 어깨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왼손으로 재빨리 어깨의 단검을 뺐다. 푹, 턱이 수축되는 느낌과 함께 검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주욱 튀는 것이 느껴졌다. 검지 2개를 늘어뜨린 길이보다 약간 짧은, 흡사 송곳 같은 모양의 암기가 내 눈에 비추어 졌다.
“암기를 썼었지.”
다행히도 독은 발라져 있지 않은 듯 했다. 나는 그 암기를 바닥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다음 오른 손에 쥐어져 있는 나의 무기를 왼 손에 바꾸어 쥐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입에 물려져 있던 담배 같지도 않은 담배를 거칠게 내뱉었다. 방심이었다. 완벽한 방심이었다.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내 자신이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미래다.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는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녀의 실력은 내 심장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음에도 어깨를 맞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그쪽에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반증이다.
“이제 곧 끝나겠군.”
나는 본능적으로 이번 공격으로 승패가 결정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조금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해볼까.”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최대한 부드럽고 가볍게 내쉬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함께 느껴졌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날뛰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덩어리는 바로 역겨움이었다.
나는 온몸에 힘을 천천히 주기 시작했다. 긴장의 극한 속에서 나는 타이밍을 점쳐보고 있었다. 그것은 쉬운듯하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지금이다!”
나는 잔뜩 긴장되어 있는 몸을 릴리즈 시켰다. 몸이 고무줄처럼 튀어 올랐다. 나의 목표는 성당 중앙의 맨 앞에 있는 십자가. 나의 육감은 그쪽으로 달려 나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파파파팍-
내 뒤의 한 치도 안 되는 곳에서 방금 전 내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던 암기들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나를 압박했다. 땀방울인지 핏방울인지 모르는 것이 내 몸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긴장이라는 것은 돌아버릴 정도로 무섭다.
“제길…….”
나의 입에서는 저절로 상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때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최고와의 대결이 힘들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목에 걸린 소중한 펜던트가 웃옷에서 빠져 나옴을 느꼈다. 볼 수는 없었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쇠줄의 느낌은 펜던트가 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해주었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내가 목표를 했던 곳에 도착해있었다. 이제 때가 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온 것이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어진다면 나는 그대로 끝장이다!
“이야 아아!!“
나는 뒤쪽으로 몸을 휙 틀었다.
-…….-
목 주변이 시원했다.
“…….”
“…….”
총구는 그녀의 심장에 정확히 조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날카로운 단검이 나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보랏빛 십자가. 그 위에 색색의 유리로 수놓아진 구세주가 평온한 얼굴로 나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에 빠졌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쁜 자식.”
백귀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오른팔은 살짝 늘어져있었다. 백색의 타이즈는 군데군데 핏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조직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다는 백귀의 얼굴이다. 보랏빛을 은은하게 반사시키는 은발 속에 잘 조각된 얼음 조각이 나의 눈에 비추어졌다.
울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구슬 같은 것이 얼음조각을 타고 끊임없이, 톡톡 바닥에 떨어졌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런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백귀와는 너무나 달랐다. 저런 식의 감정표현은 이 비즈니스 상에서 금기 시 되는 것이다. 나는 저절로 충고를 해주려고 열리는 입을 서둘러 단속해야만 했다.
“너는 나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빼앗았어.”
안식처.
무슨 말을 하는 것 일까? 설마 이곳을 말하는 것인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을 보면 충분히 그런 뜻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할말은 있다.
“당신도 마찬가지지요.”
"뭐?“
침묵. 나도. 백귀도. 아무 말도 없었다. 순간 말하는 법을 잃은 듯, 조용했다. 나와 그녀의 사이에서 부드러운 살기가 감돌았다.
백귀는 나를 쳐다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맑아 보였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순간 눈동자가 그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듯한 기색이 나타났을 것이다. 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누군가와 눈빛이 너무나 닮아있었지만 아닐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이야기가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넌.”
백귀는 나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 가득 메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곧 평상심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듯 나를 다시 천천히, 그리고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나를 자세히 관찰하던 백귀의 눈이 나의 목에서 멈칫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했던,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린 듯 그녀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더니 순간 그녀의 눈빛이 빠르게 나에게로 꽂혔다.
“이곳에서 그녀에게 고백한 날짜는 언제지!!”
“아……?”
의외의 질문.
“그녀에게 고백한 날짜는 도대체 언제야!!”
격앙된 목소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곳에서 고백했잖아!!”
순간 머리 속을 텅 하고 맞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백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절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할 대사가 아니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며칠이냐고!”
백귀는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자신에게서 알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서 또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 일까? 백귀와 나는 한번도 만난 적도 없거니와 무엇 하나 공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니, 아니다.
순간 나의 머리 속에서는 방금 전에 지워버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제멋대로 복구가 되어 나의 머리 속을 뛰놀고 있었다.
절대 일어 날 수 없는 상상이 불쑥 내 앞으로 커다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난감한 눈빛이 나의 눈동자에서 흐릿한 색감을 과시 했다.
“뭐, 뭐야…….”
갑자기 나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생겨났다. 하지만,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하였다. 저쪽, 그리고 내 쪽은 이런 식의 행동은 절대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란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좋을까? 무엇을 해야 내 자신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12월 31일 밤……”
입은 나도 모르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
나는 경망스러운 입을 황급히 닫고 백귀를 살짝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고이는 것이 비추어졌다. 뭔가 확신이 서가는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어.”
때구르르르.
“말도 안돼……”
백귀의 혼잣말이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 지는 듯, 그녀의 칼이 흔들렸다. 기회였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은 원상태 그대로였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칼은 곧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그녀와…처음으로 만난 장소는 어디지.”
백귀는 아까보다 좀더 긴장한 상태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 곳……”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녀와 헤어졌지?”
그녀의 눈빛에서 살짝 빛나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순간 뭔가 이상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 사람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추궁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정보를 빼가려고 하는 음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사실 몇 개만을 알아 내어, 이 후의 정보를 알아 내는 전형적인 수법 말이다. 나는 풀어졌던 경계심을 다시 조였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을 물어 보는 거지?”
“묻는 말에 대답하란 말야!”
순간 내 총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외침이 메아리 쳤다. 강압적인 말투. 그것은 내 자신에게서 반작용이 일어나기에 너무나 안성맞춤이다.
“내가 왜 당신에게 대답해야 하는 거지?!”
“난 이럴 권리가 있어!”
권리? 도대체 무슨 권리가 있다는 것이지? 난 머리를 아무리 굴려 생각해봐도 생각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 머리가 순간 지끈 해질 정도로 머리 속을 뒤졌다. 결론은 당연히 없다 이다. 그녀가 나에게 권리를 따질 권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없다. 지금 내 앞의 여자가 나의 정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여자를 믿고 내 자신이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
“레드 파크였지? 10년 전 날씨가 아주 많았던 그 날 말이야!!”
“아?”
무엇인가, 내 머리 속의 것을 강제로 꺼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넌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이것 저것 맛있는 것을 먹으며
재미있게 놀았어! 맞지? 그렇지?!”
사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앞 뒤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흥분했다. 몸이 극도로 흥분되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아는 거야!”
“그 후, 어떻게 됐지?”
그녀는 방금 전 보다 훨씬 침착한 상태였다. 그 분위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극도로 흥분한 가슴은 천천히 진정되어 갔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강하게 찌르는 듯하면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그녀는…누나는…….”
나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지만 곧 입을 닫았다. 앞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의심. 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저쪽은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자신이 유도심문에 말려 들어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대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살해 당했어.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다행히도 이성보다는 나의 몸이 먼저 반응 해주었다. 나의 고민을 덜어준 셈이다.
이로서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말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의 해답을 얻어내는 것 뿐이다. 나는 천천히 내 앞에 있는 백귀를 쳐다 보았다.
“…그렇구나.”
가슴이 아팠다.
무엇인가 허탈한 듯한 목소리가 나의 가슴을 순간 짓눌렀다.
무엇인가. 도대체 이 것은 무엇인가 이상했다.
왜 이러는 거지.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땡그랑.
나의 목을 노리고 있던 것이 바닥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찬스다.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이라는 것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내 앞에 있는 그녀도. 나는 조용히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렸다. 나의 행동에는 상관없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여성은 가냘픈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조용하고 세게 감아 쥐고 있었다. 오른 어깨에 피가 간헐천처럼 솟아오르며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생을 마쳐가는 동물의 그것처럼. 그녀의 동그란 동공이 작아져, 뾰족한 침을 연상케 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럴 수가 있어……?”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였지만 워낙 조용히 중얼거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지 다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자신에게 생긴 커다란 궁금증의 해답이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물음은 대답했다. 이제, 내 자신이 물어볼 차례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였다. 무엇인가 나사 하나가 탁 빠진 듯한 느낌. 솔직히 이런 식으로 말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실제로 표현하는 것은 결국 이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살짝 웃어 보였다. 힘이 없는 듯, 허무한 미소처럼 보였다. 천천히, 잡고 있던 자신의 양쪽 어깨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을 목에서 천천히 걷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잘 보이도록, 내 앞으로 내밀었다.
스륵, 나의 옷에 살며시 걸쳐져 있던 무엇인가가 옷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봐.”
눈에 익은 보라색 물체.
보라색 칠이 된 반달 모양의 것.
그것은 내 자신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다…당신은?”
아냐.
말도 안돼.
“난 네가 알고 있는 사람.”
어떻게 이런 일이…….
“같은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분명…내 앞에서…….
“드디어 찾았어.”
내 품 안에서…….
“…누…나?”
피를 흘렸었는데…….
머리 속의 혼란을 수습을 할 수 없는 듯, 아무렇게나 입이 움직였다. 부정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느끼고 있는 원초적인 감각에 의해서 결론 내려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울고 있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녹아 흐르고 있었다. 작은 미소가 느껴졌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미소.
뭐라 해야 할까. 지금 내 자신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설명 할 수 없는 사실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반론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나의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떠하든 분명 기쁜 것만은 사실이었다. 누나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누나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던 저 사람은 내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었다. 이제 곧 저 사람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내 앞에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꿈만 꾸어오던, 그림 같은 소원이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하지만 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냐.”
…아?
순간 모든 느낌이 정지 되는 느낌.
“넌, 그 아이가 아니야!”
외침.
띵했다. 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세게 후려갈겨진 것 같은 띵함이 전해져 들어왔다. 머리가 근질근질했다. 몸이 비틀거렸다. 동공이 순간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것은 절대 아니다. 이상한 거다. 그래, 정말 이상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밖에 들지 않았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나! 난 누나의…….”
나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식의 사치스런 생각은 순간 모두 없어져 버렸다. 단지 내가 생각했던 멋진 결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녀. 그러니까 지금 누나라고 믿고 싶은 사람은 나의 행동에 상관없이 슬픈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 때 죽은 사람은……”
누나는 나를 살짝 쳐다보았다.
“바로 그 아이……”
슬픈 눈가의 주변에 다시 녹아버린 다이아몬드가 찰랑거리기 시작하였다.
“너였단 말야.”
주륵.
“누…나?”
나의 머리 속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무엇인가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너무 복잡해서 어찌 보면 개꿈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가 나오는 꿈,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전개로, 결국 깨어나면 허무함과 아쉬움만 남는 그런 꿈 말이다. 꿈을 깨자. 나는 혀를 세게 깨물어봤다.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꿈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깨지 않았다. 괴로웠다. 내 정신세계에 커다란 혼란이 오기 시작하였다. 당장이라도 깨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뭐라고도 해야겠다. 부정이라도 해야겠다. 꿈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말…말도 안돼……난…이렇게 살아 있는데?”
“거짓말이 아냐.”
떨리는.
“그 때 너는…….”
가냘픈 목소리.
“피를…많이 흘리면서……”
슬픔.
“내 앞에서 나뒹굴어졌어.”
괴로움.
“그 때의 너의 뜨거운 핏물을 잊지 못해.”
한(限).
“하늘을 저주하면서 울었어!”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미친 듯이!”
절규.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었어!”
지금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이 정도 말밖에 기억해내지 못하겠다.
뭐, 이제 상관하지 않겠어.
“이리저리 녀석들에게 끌려다니다가 T.B.S에 의해 겨우 구출되었지만 너는.......”
꿈이니까, 이런 허구적인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해.
“네가...죽어버린 네가 사라져 버렸어!”
빨리 깨야 한다. 이런 악몽은.
“너를 찾기 위해 난 T.B.S에 들어갔어. 그래...너의 조직, 나의 예전 조직, 나를 구해준 조직 말야.”
하지만, 어떻게 깨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조직을 찾기 위해 난 죽이고
또 죽였어. 미친 듯이 죽였어. 정말 내 자신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있을 듯이 말야."
무엇을 해야 깰 수 있을까.
"하지만 난 T.B.S에서 내가 원하는 조직의 정보를 얻지 못했어. 준다고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지."
아참.
“그래서 난 찾기 시작했어. 그 조직의 실체를. ”
“그리고 내가 그 조직을 찾아 궤멸 시키고 그 조직의 우두머리를
만났을때...... ”
그 방법이 있었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
내 앞에 있는 허구를 지우면.
“나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다던 T.B.S는 너를 복제해버린 거였어!”
모든 것이 해결 되지 않을까.
“나에게 가장 소중 한 너를……!”
하지만 이것이 진짜라면?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너를 살인자로, 그것도 대량생산
하기 위해서!! ...조직은 그냥 이용된 것 뿐이었지!”
아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어.
“...난 지금 까지 수많은 너를 죽여왔어. 입수한 T.B.S내부문건에
따른 너의 복제숫자는 100명......”
꿈이야.
“…난 99명의 너를 죽였어.”
꿈이라고 목걸이는 줄 수 없어.
“마지막까지 널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어.”
이것은, 나의 소중한 것이니까.
“목걸이만 받으면 갈게……”
“줄 수 없어!”
나의 목에서 큰 것이 터져 나왔다. 추잡스럽게 흘러나오는 토사물처럼 그것은 뱉어내면 뱉어낼수록 역겨운 냄새와 함께 나의 속은 뒤집어져 갔다.
“이러지마…….”
누나는 아니 허구 속의 저 인물은 호소하듯, 나를 슬픈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난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악몽일 뿐이고 저 것은 단순한 몽마(夢魔)일 뿐이다. 몽마는 없애버려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꿈이라도 줄 수 없어!”
“꿈이 아니야! 이건… 현실이야!”
몽마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나의 눈에는 흐느적거리는, 눈동자가 없는 어느 한 여자 귀신이 내 앞에서 씨부렁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냐!! 꿈이야!!”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리볼버를 몽마에게 겨누었다. 몽마는 당황한 듯한 얼굴이 살짝 비추어지더니 이내 추악한 미소를 얼굴 가득 품었다.
“제발… 이건 아냐……. 이러지마…….”
목소리 하나 만큼은 누나의 목소리를 가련하게 잘 연기해내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의 정체를 안다. 그 정도로는 속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리볼버에 걸려 있는 검지에 힘을 살짝 주기 시작하였다.
“널 죽이면 모든 것이 확실해질 거야!”
몽마는 드디어 본색을 들어냈다. 떨어져 있던 칼을 다시 집더니 내 쪽으로 다시 칼날을 세웠다. 좋았다. 어차피 둘 다 죽어도 상관 없다. 그럼, 난 꿈에서 깰 테니까.
“끝까지 가보자라는 것이지?!!”
“난 이러고 싶지 않아! 제발 펜던트만 돌려줘!”
몽마의 얼굴이 점점.
“시 끄러! ”
그리워하던.
“제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죽어버려!!”
-탕-
-푸욱-
왜 난 깨닫지 못했을까.
Final Chapter
-이 성당 참 멋지다. 이런 곳도 알다니 둔한 너답지 않은 걸?-
-누나.-
-응? 왜 그러니?-
-누나. 나 말이에요. 누나 좋아해요. 사귀어 주세요.-
-에……?-
-그러니까요. 저 누나 좋아해요!-
-나참 너도… 갑자기 이상한 농담 하지마. 정말인 줄 알잖아.-
-전 진심이에요! 저 누나 좋아한단 말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욱!-
-넌…정말…….-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구나. 너란 아이는. -
그 때의 따듯함.
-누나, 여기 참 좋죠?-
-아니. 그렇지 않은 거 같아.-
-왜요?-
-너랑 놀이 공원을 오니까 빙글빙글 어지럽게 도는 것이나 타고 말야. 나는 이미지에 맞게 회전 목마 같은 것을 타고 싶었는데.-
-에에이~ 누나는 과격하잖아요. -
-요녀석이!-
-아야! 불량 폭력 아줌마다! 이 아줌마가 사람 때려요!-
-뭐라고? 너 잡히기만 해봐!!-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요!-
-내가 너하나 못잡을 줄 알아아!-
그 때의 즐거움.
-머그컵에 이니셜을 새겨봤어요.-
-G&G-
- 난 G보다는 K가 더 맘에 드는데.-
-뭐라면 또 어때요. 아무튼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길 빌면서 새겨봤어요. 어때요? 맘에 드세요?-
-맘에 들기는 한데, 너 정말 낯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게 제 특기잖아요.-
-하긴 그래.-
-하하하!-
그 때의 행복
-이거…받아.-
-누나 이게 뭐에요?-
-풀어봐.-
-이거 팬던트 아니에요?-
-어때?-
-예쁜데요.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내가 만들었어.-
-에? 정말요? 정말 대단해요 누나! 이렇게 예쁜 것을 누나가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아요.-
-왠지 비꼬는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아무튼, 이 것도 봐.-
-어라, 누나 목에도 같은게 걸려있네요?-
-커플 목걸이야.-
-…에?-
-우리 벌써 100일 넘었잖아. 근데 이런 것 도 없으면 왠지...이상해서 말이야. 헤헤-
-누나…….-
-받아…주겠어?-
-저, 말이에요.-
-…….-
-전…지금 너무 기뻐요.-
-받아…주는 거야?-
-그럼요. 평생, 간직할 거에요.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
-고마워…정말 고마워…….-
사랑의 맹세.
-누나, 아이스크림 사왔…-
-꺄아아아악!-
-누나!!-
-이 년 참 반반하게 생겼는데. 나중에 잘 써먹을 수 있겠어. -
-너 이 자식 놓지 못해!!-
-어딜 건방지게! -
-탕-
-아…!-
-과…관수야?-
-으아아아악!-
-관수야아아아아아!!-
-꺄아아악!-
-조용히 해! 죽여버릴 수가 있어!-
-살려내!! 관수를 살려내란 말야!!-
-이년이 귀여워해줬더니!!-
-탕.-
-꺄아아악!-
-…아?-
-관수야…….도…망가…….-
-누…나?-
-도망…가라니…까…….-
-누나아아아아아아!!!-
그때의 슬픔.
-소개하도록 하지. 나는 국제 T.B.S 소속의 최지훈이라고 하네. -
-당신은 도대체 왜 날 찾아 온 거죠? 또 날 비참하게 만들려고 왔나요! 나가요! 당장 나가란 말이에요!-
-아아, 진정하게. 나는 자네를 도우러 온 거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
-복수를 하고 싶지 않겠냐고 물었어.-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자네가 싫어하는 무리를 몽땅 잡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는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
-그런 분이 왜 절 찾아 온 겁니까?-
-이번에 레드 파크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동자들은 악질적인 테러리스트라네. 세계 무기 암시장의 반 이상을 틀어잡고 있는 단체이지. 요즘에는 인간복제까지 손을 댄다더군. -
-그딴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도대체 왜 찾아온 것인지 말해줘요!!-
-…….-
-자네 사격술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네. 세계 최고라지?-
-…….-
-부탁하네. 우리를 도와만 준다면 자네가 원하는 조직의 정보를 주도록하지. 덤으로 처분 건까지 말일세.-
-......-
-...할건가?-
-...제가 대체 무엇을 하면 되는겁니까?-
-고맙네.-
절망 속의 희망
눈이 천천히 떠졌다. 껌벅거리는 빌어먹을 형광등이 나를 반겨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나의 눈동자에 십자가가 비추었다. 아까와 달리 검붉은 색이었다. 군데 군데 흰색으로 물든 붉은 십자가. 저 색은 누구의 색 일까. 내 자신의 색 일까. 아니면 누나의 색 일까.
몸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가슴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 안에서 흐르던 것이 바닥으로 마구 흘러내렸다. 하지만 상관 하지 않았다. 내 몸은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 갑이 나왔다. 이리저리 구겨지고 비릿한 냄새가 나도 나에겐 절실히 필요한 담배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
힘겨운 연기가 푹 하고 피워 올랐다. 차가운 바람과 담배의 매캐함이 어우러져 환상의 2중주를 나에게 선사하였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꿈이 아니었구나.”
나는 십자가 위를 힘겹게 쳐다 보았다. 방금 전 까지 보이던 구세주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단지 깨어져 버린 유리 조각들과 검은 새벽의 밤 하늘이 보일 뿐이었다. 바닥 부분에는 색색의 유리조각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덩어리는 희고 검붉은 사람 덩어리였다.
“바보같이.”
나의 주변에 작고 하얀 깃털 같은 것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나의 몸뚱이에 닿는 순간 흡사 불결한 것을 만지는 듯한 여성의 얼굴처럼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다.
“풋!”
웃음이 나왔다. 난데 없이.
“하하하하!!”
따듯함, 즐거움, 행복, 사랑, 슬픔, 희망
모두.
이 것 모두
모두 내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누구의 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지금으로서 그것을 판단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만의 진실만을 믿은 채 굳게 달려온 나의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심어주고 사라져버린 신은 과연 무슨 기분일까.
“하하…바보같이.”
눈에서 미지근한 물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나의 뺨을 통해 바닥에 떨어졌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런 것일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냥 멍하고 슬프다. 상처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무엇에다가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나는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정말 바보 같이…….”
몸에서 다시 한번 크게 무엇인가가 뒤틀려 나오는 느낌과 함께 나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렇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줘야 할 시간이다. 진실이라는 무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를 한 내 자신이 무대를 떠날 때는 왜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한 것 일까.
나는 멍해진 감각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미 멍해진 몸은 한번 비틀 두 번 비틀거렸지만 그렇게 개의치 않았다. 온 몸이 이곳 저곳을 부딪쳐가며 움직인 것은 바로 십자가 밑이었다. 나의 눈에 방금 전 봤던 검붉은 사람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나…….”
나의 몸이 데구르르 바닥으로 굴렀다. 유리 조각들이 나의 몸에 박히는 듯 했다. 하지만 온몸이 마취가 된 듯 그냥 박힌다는 멍한 느낌만 왔다.
“저…왔어요.”
나의 몸은 차갑게 식은 누나의 몸뚱아리에 힘겹게 걸쳐졌다. 마지막은 이곳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이 사람이 원한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아니면, 이 사람이 내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내 기억 속에서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제, 저도 갈래요.”
눈이 감겨왔다. 온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더 이상 몸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끝이라는 단어가 죽어가는 뇌세포 사이에서 울려댔다.
“안녕, 내 소중했던 사람…….”
마지막 미소가 입안으로 퍼지면서, 눈이 감기었다. 곧 하얗고 차가운 것이 나의 몸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내 자신에게 남은 단 하나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1.
오늘은 비가 왔으면 했는데. 날씨는 나를 어지간히 좋아하나 보다. 그런 부탁을 하자마자 내 방의 회색 빛 커튼에 잘 어울리는 날씨를 만들어주고 비까지 뿌려주니 말이다. 물론 나는 오늘 아침 내 방에 있지 않아서 커튼과의 오묘한 조화는 볼 수 없었지만 기분 좋은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빗물을 막을 만한 허름한 지붕조차 없는 이 텅 빈 전철 플랫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물론 밤이고 비가 오면 더욱 좋다. 무엇보다 그 곳에 서있으면 나에게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오른손이 들고 있는 허름한 우산이 강하게 내리치는 빗물을 힘겹게 받아내고 있다. 우산을 겨우 피한 듯한 빗방울이 나의 옷과 손에 간간히 안착하였다. 겨울에 내리는 비는 마치 얼음송곳 같다.
역사 내의 수명이 거의 다한 형광조명이 작은 물방울 분자들로 흐릿하게 퍼져나간다. 뭐라 할 수 없는 몽환적인 느낌과 함께 전철이 들어올 내 오른쪽 레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일 위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야경이 빗물에 엉켜 나의 시신경을 오묘하게 간질거린다. 바람이 순간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수많은 색들의 향연 가운데 두 개의 둥그렇고 뿌연 흰색의 불 등이 번쩍였다. 그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 하는 것 조차 손해인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표현해주자면 내가 서있는 역사 내로 들어올 전철이었다.
-빠아아아아앙-
비에 젖은 레일을 달리는 전철이 난폭스럽게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11시. 기관사가 술 먹고 운행을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곧 그 흉물은 내 얼굴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었다. 마치 가려운 곳이 다듬어지지 않은 손톱으로 파헤쳐 지는 듯 시원스러웠다. 길게 움직이는 어눌한 빛의 창문 안으로 보이는 몇몇 알 수 없는 군상들은 모두 악마의 웃음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가볍게 아래를 툭 쳤다. 길쭉한 담배가 자신을 물어달라는 듯,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며 나의 입 앞으로 나왔다. 나는 그것을 거역할 만큼 나약한 남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덥석 물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중국제 지퍼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 우.”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는 정체 되어 내 쪽에서 잠시 머물렀다 곧 바람에 쓸려 갔다. 내 앞을 재빨리 지나갔던 전철은 점점 속도가 늦추어지더니 이내 서버렸다. 나는 나의 눈알을 살짝 밑으로 굴려 출입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3-4> 정확했다. 이내 출입문이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덜컹거리며 열렸다. 그곳에서는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한 중년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있었다. 술을 꽤나 먹은 듯한 구겨진 검은 바바리코트 차림의 그 남자는 나를 슬쩍 보더니 곧 비틀거리면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갑자기 발을 헛디뎠는지 크게 한번 흔들린 후 나에게로 쓰려져 왔다. 이곳 저곳을 굴렀을 것이 뻔한 구깃구깃한 코트를 잡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코끝이 근질거릴 정도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 남자는 나를 살짝 쳐다보았다. 술을 먹어 약간 충혈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살아있었다. 그는 나에게서 떨어져 무슨 더러운 것이 자신의 옷에 닿았던 것 마냥 얼굴을 푹 찡그린 채 옷을 툭툭 털어대었다. 나는 실소했다. 사실 저 행동은 내가 해야 옳은 것이다.
“담배 있소?”
그 사람은 뜬금없이 담배를 구걸했다. 하지만 뜬금없다는 것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할지는 미지수긴 하다. 나는 말없이 웃옷 주머니에 준비한 약간 해진 담배 한 개비를 그 사람 입에 물려주었다.
“이제 끝이니 빨리빨리 합시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 남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더니 그 허름하고도 조그마한 상자곽 안에 있는 빳빳한 느낌의 성냥 한 개비를 덜덜 떨리는 손에 들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도 기분이 좋은지 누런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 사람을 보니 속이 다 뒤집어 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도 꽤 부는데다가 비도 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에 성냥개비에 불을 붙인 다음 곧 그것으로 자신의 입에 달려있는 꼬깃한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말라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담배연기가 뱀처럼 흘러 나왔다. 담배연기는 요염한 움직임으로 그의 추한 모습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듯 하다가 이내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이 담배 맛은 언제나 좋다니까.”
그는 곧 피식 웃으며 나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누런 봉투를 슬쩍 넘겨주었다.
“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게 됐소.”
사과인지 비꼬음 인지 모를 말을 뱉어낸 후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개찰구로 발을 옮겼다. 나는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추악한 한 괴물이 비틀거리며 걷는, 다시는 보기 싫은 모습이 내 눈앞에서 없어질 때까지. 그것은 내 자신이 그런 추한 모습을 다시는 안 보겠다는 확신과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군.”
물고 있는 담배는 이미 반 이상이 태워졌다. 태워진 몸체는 길고 우아한 하얀 재가 되어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 나를 알아달라고, 자신이 한 일을 잊지 말라는 듯 담뱃재는 절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순히 귀찮은 털어버릴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어 넣고 내 입에서 담배를 띄어 놓은 다음 가볍게 털어 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재는 물이 흥건히 젖은 바닥에 힘없이 사그라져 갔다.
“이 지긋지긋한 일도.”
찰박거리는 기분 좋은 느낌을 두발로 느끼며, 졸고 있는 역무원 옆에 조용히 표를 놓은 다음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뿌옇고 흐릿한 분위기의 역내와는 달리 바깥은 온통 어둠이었다. 나는 이 때 느껴지는 감정이 가장 싫다. 하지만 그 곳은 내가 최소한의 휴식을 위해서라면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래도 그곳을 걷다 보면 이 기분 나름대로의 낭만을 찾아내 어느새 즐기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낭만이 생길만하면 어느새 내가 살고 있는 허름한 오피스텔에 도착해있는 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똑같다. 지겨움. 안도감. 이것은 날 참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나는 오피스텔 옆에 붙어있는 작은 편의점에 들어간다. 아무리 늙게 봐줘도 고등학생인 남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카운터에는 풀다가 만 수학 문제집이 놓여있었다. 내가 들어와도 모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어지간히 피곤한가 보다. 나는 조용히 온장고 쪽으로 가 언제나처럼 병에 들은 두유 두 개를 꺼내 카운터로 가져갔다. 종업원은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를 살짝 두어번 쳤다. 그는 눈을 뜨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보고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88 골드 하나.”
나는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피우던 담배를 주문했다.
“아...아 예!”
녀석은 워낙 당황했는지 늘 봐왔을 담배 진열대조차 찾지 못해 허둥거렸다. 나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그것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그 후로도 녀석이 한참을 허둥지둥 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4500원입니다.”
다행히도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녀석이 나의 물건을 넣어준 비닐봉지를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죄송합니다!”
깍듯이 인사하는 녀석의 마음이 내 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혀에서 씁쓸한 감각이 느껴졌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작은 보금자리는 이 허름한 오피스텔 맨 위층이었다. 40층. 현기증이 날 정도의 높이이다. 가끔씩 바람이 많이 불면 흔들거리는 게 꽤 위태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내 자신이 신발을 벗고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으로서 나에게는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나는 언제나 내 보금자리 앞에 와서는 초인종을 한번 지긋이 눌러본다. 그때마다 식상한 멜로디가 내 귀를 가볍게 흔들어 놓는다. 이 후 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내 자신이 알 수 있는 명확한 한 가지는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문에 달린 열쇠구멍에 지긋이 넣어 돌린다는 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 반기는 것은 K라고 불리는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이다. 나랑 산지 벌써 4년이 넘은 이 고양이는 이 무미건조한 방에서 삶의 90%을 보낸 놈답지 않게 꽤 활발한 녀석이다.
K는 날쌔고 조용하게 내 어깨 위로 올라 왔다. 솜털같이 가벼운 녀석은 나의 얼굴에 녀석의 채취를 남긴다. 나쁘지 않은 느낌. 나는 문을 닫고 신발을 벗은 다음 나의 자유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치장이 되어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느낌의 정사각형 회색공간에 덜렁 놓여진 흰 침대는 마치 내 자신이 정신병동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나는 머리를 몇 번 흔든 후 근처의 식탁에 비닐봉투에서 꺼낸 두유 두 병과 담배 한 갑 그리고 누런 봉투를 내려놓았다. K는 내가 지금 즈음 무엇을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 얼른 내 어깨에서 내려왔다. 나는 입고 있던 검은 가죽 코트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식기건조대에서 납작한 접시 하나를 꺼내 식탁에 두었던 두유 한 병의 봉인을 푼 후 그릇에 가득 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K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그릇까지 가서 우아한 자세로 두유를 먹기 시작한다. 나는 K가 두유를 할짝거리는 것을 보며 남은 두유를 한번에 들이켜 버렸다. 세치 혀에서 느껴지는 고소하고 약간 거부감이 드는 듯한 느끼한 맛은 나에게 삶의 활력을 준다.
나는 누런 봉투와 새로 사온 담배 갑을 들고 나의 침대 쪽으로 와서 털썩 앉았다. 푹신푹신한 침대는 빨래를 거의 하지 않아 냄새가 나지만 나는 마냥 편하기만 하였다. 나는 누런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봉해진 봉투의 끝을 손으로 부욱 찢어 냈다. 흉측하게 뜯어진 종이봉투 안에는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이 달랑 들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Another Double
Location: RC Church-
종이에는 단 두 줄 밖에 써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 하더니 이내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원스럽지도 않은 끈적거리고 더러운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곧 나는 종이를 구긴 다음 내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던져진 종이는 정확히 쓰레기통에 안착을 했지만 그 전에 쌓였던 쓰레기들 때문에 다시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별로 신경 쓸 것은 아니다. 나는 들고 있던 담배 갑의 포장을 푼 다음 담배 한 개비를 조심스럽게 뽑아 입에다 물렸다. 그 후는 언제나처럼 중국산 지퍼라이터로 불을 붙여 길게 풀무질을 하는 일뿐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이 집에 있는 단 하나의 창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회색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 밖을 가볍게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짙은 어둠과 비로 갇힌 네온사인이 만발한 도시가 보이고 있었다.
“끝내 배신인가.”
연기가 입에서 푸욱 피어 올랐다. 하얀 안개가 내 왕국 곧 곧을 뿌옇게 장식한다. K는 답답한지 연신 야옹 거리며 울어댄다. 담배는 어느새 짧디 짧은 필터만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철제 재떨이에 남은 불씨를 제거한 다음 K를 안았다. 소름 끼치게 부드러운 K의 털은 내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뭐, 상관 없겠지.”
K는 내 품에서 연체 동물인양 가볍게 빠져 나온 다음 190cm정도의 높이를 가볍게 뛰어 내려 화장실 옆 자신만의 공간으로 몸을 옮겼다. 살짝 피곤함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 앉았다. 눅눅한 이불의 느낌은 언제나 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가만히 누워 방 위를 쳐다보았다. 회색의 벽과 조그만 형광전등이 경망스럽게 껌뻑 거리며 나를 반겼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환영은 질색이다.
나는 목에 걸려있는 얇은 쇠줄을 목에서 걷어내었다. 얇은 쇠줄의 끝에는 보라색 칠이 된 반달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있었다. 나는 그것을 슥 들어 보았다. 빙글빙글, 보라색이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이제, 나에게는 이것 밖에 없는데…….”
나는 다른 한 손으로 펜던트를 꽉 쥐었다. 펜던트 모서리의 날카로운 부분이 내 손바닥을 자극하였다. 가슴 한 곳에서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 듯이 나의 뇌로 쓸려 들어왔다. 자극적인 감정이다. 마치 오르가슴과 같은 이 느낌은 나를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빠져 들게 한다.
“이 것 밖에…….”
-야옹-
이례적으로 나의 얼굴에 부드럽고 따듯한 것이 부비적 거렸다.
눈이 감겼다.
그날 잠은 간만에 참 편안하고 달콤했다.
2.
-double K, 8년만이군. 이렇게 얼굴을 마주 하고 이야기 하는 것도 말이야. -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네. 우리는 자네에게 신세를 많이 졌어. 우리가 자네에게 베풀었던 친절 그 이상으로. -
-10년 전 그들이 일으킨 사건에서 우리는 자네를 구해주었고 자네는 우리를 위해 8년간 일해주었지. 덕분에 그들의 거의 모든 것을 소탕해버릴 수 있었네. 기쁜 일이지. 자네 같은 스페셜 리스트가 우리를 위해 일해준 것은 우리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어. -
-이제 마지막일세.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인연은 끝이라네. 아쉽기는 하지만. -
-보상이 될련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약속한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도록 하지. -
-이번에 생포한 그들 조직의 간부 한 명에게 알아낸 소식인데, 자네가 굉장히 찾던 정보라서 우리도 아주 기뻤네. -
- 마지막 일만 끝내고 나면 이 정보는 자네 것일세. -
-자네가 원하는 정보다. 충분히 만족할 걸.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나서 했던 약속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네. -
-지금까지 고마웠네. -
“…오히려 제가 감사했죠.”
꿈의 끝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3.
내가 침대에서 일어난 시각은 자기 시작한지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후이다. 내가 일을 시작하려 하면 몸은 언제나 이렇게 24시간의 휴식시간을 원한다. 숙면을 취한 느낌은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와 다른 것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도 생각한 것이지만 분명 하늘은 나의 편이다. 나는 보조 등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담배 갑을 열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야옹-
K가 내 발 앞에서 야옹 거린다. 순간 늘 하는 생활패턴이 나의 머리 속을 흔든다.
“이런, 잊을 뻔 했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식탁 쪽으로 가 어제 사왔던 두유를 들었다. 차가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어제의 온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다만 차가운 냉기만이 두유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두유에 온기가 없든 있든 상관 할 것은 없었다. 두유가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나는 두유의 봉인을 풀고 어제 그 접시에 가득 두유를 부어주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K는 그릇 쪽으로 쪼르르 가 언제나 그 포즈 그대로 두유를 먹기 시작한다. 남은 두유를 내가 한번에 들이키는 것도 어제와 변한 것은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담배를 입에서 떼어 놓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예외 요소이다.
고소하고 느끼한 맛을 한껏 경험 한 후 나는 아까 물었던 담배를 다시 문 다음 불을 붙이며 창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비로소 평소 때와 같은 느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후 우.”
불이라도 난 듯 내 입에서 흰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창 밖의 차가운 야경은 내 눈까지 얼려버리는 듯 하다. 담배가 오늘따라 너무나 짧고 잘 타 들어 간다. 기분이 뭐라 말 할 수 없는 희열감에 사로 잡힌다. 이것은 꽤나 이질적인 감정이다.
"배신자에 두번 다시 가기 싫은 공간이라.......”
연기는 꾸준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곧 무엇인가의 생명이 타 들어간다는 뜻이다.
내 입에 물려있던 담배 한 개비는 곧 그 생명을 다하고 자신의 무덤으로 몸을 맡기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침대 밑에 있는 검은 서류용 가방을 하나 꺼냈다. 깨끗한 외관의 이 가방은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가방이다. 나는 가방을 들고 식탁까지 와서 어제 걸쳐두었던 검은 가죽 코트를 입었다. 차가운 코트의 느낌이 나의 몸뚱이를 잔인하게 감싸 안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느낌을 변태같이 즐겨본다. 절정의 순간이 지난 후 나의 몸은 한층 더 자극을 원하는 몸으로 탈바꿈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K가 내 옆에서 빙글빙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K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침에 맛있는 거 사다 줄 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야 아옹-
이례적으로 길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것이란 것 이라 봤자 두유라는 것을 K는 알고 있어서 일까? 언제나 일정한 톤과 길이로 우는 K답지 않았다.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별거 아니겠지.”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K가 나에게서 두 발자국 물러섰다. 나는 K를 보았다. 살짝, 내 얼굴 근육이 미소를 짓는 듯 했다.
“다녀올게.”
4.
[끼이이이익]
빈 공간에 싫지 않은 소리가 은은히 퍼져 나간다. 기분 좋은 소리이다. 문을 사이로 해서 가로막혔던 빗소리가 빈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기 시작하였다. 나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바닥에 떨어져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 낸다. 나의 눈동자에는 길게 늘어서 있는 목재로 된 긴 의자의 종렬 위로 색색의 아름다운 유리로 조각 된 아치형 구조물을 뒤로 보랏빛 광채의 순백색 십자가가 비추어졌다.
10년만에 들린 이곳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한 곳이다. 하지만 그 특별한 것을 잊기 위해 두번 다시 오지 않았던 이곳을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 왔어요.”
나는 맨 앞에 위치한 의자 중앙에 가볍게 앉았다. 오래된 미사용 목재 의자에서 나는 끼익 거리는 소리가 검은 공간을 뒤흔든다. 은은한 흰색 조명으로 비추어지는 대충 잡아도 3층 높이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은 내 심장을 강하게 조인다. 나의 바로 앞쪽에 달려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내 자신을 정화시키려는 듯 위압적인 각도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검고 넓은 양 옆 뒤의 공간에서는 날이 잘 선 칼날처럼 고요함을 내뱉었다. 차라리 앳된 처녀의 비명 소리라도 났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다. 평온하면서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긴장된 분위기가 내 전신을 부드럽고 요염하게 감쌌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고난일 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었다. 그 다음 그것을 가슴 쪽으로 조용히 가져다가 대었다. 눈을 감았다. 나를 조이고 있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사라졌다.
“정말로......”
무엇인가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이 푸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좋았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안한 감정. 아무런 긴장 없이 숨 쉴 수 있는 천국의 세상. 나는 그곳에 온 듯한 기분에 푹 빠져든다. 내 자신이 이곳을 찾는 단 하나의 이유는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개구쟁이! 여기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
멀리서 들려오는 아늑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눈을 떴다. 천국의 세상도, 나를 감싸준 어깨의 부드러운 느낌도 일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나는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전 나를 짓누르려 했던 것들만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 일까? 알 수 없었다. 나의 눈이 점점 충혈됨을 느꼈다. 따가웠다.
“이런 것은 원하지 않았었는데.”
나야 할 것이 나지 않았다. 흐름을 막아서는 것. 그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난......”
깍지를 천천히 풀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얼했다. 아팠다. 굉장히. 무지하게. 손가락에서 느껴진 고통이 팔에서부터 어깨를 통해 나의 몸 전체를 돌며 전율적인 고통을 선사하여 주었다. 시간이 일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 같았다. 마치 비디오의 일시 정지를 누른 듯, 나의 모든 감각은 정지해버렸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구나. 너란 아이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몸에 명령하는 법을 잊은 듯 나는 무감각의 세계에 빠져 들고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그런 무책임한 자아에 뱃머리를 맡긴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끼이이익]
익숙한, 기분 좋은 소리가 마치 데자뷰처럼 반복되었다. 멍청한 뱃사공이 노를 놓친 순간이다. 다시 똑똑한 뱃사공이 노를 잡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외적인 일. 나는 내 옆에 놓여진 검은 가방으로 눈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조용하게 인사를 건네봤다.
"네가 왜 여기있는 거지......?"
나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짐을 느꼈다.
"그건, 내 마음이지요."
나는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보랏빛 연기가 나의 눈을 혼란 시켰다. 무릎에 가져온 가방을 놓았다. 비에 젖은 가방 가죽이 내 허벅지를 차갑게 냉각시켰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검고 딱딱한, 윤기 있는 몸체를 자랑하는 스미스&웨슨제 리볼버 한 정과 한 개의 탄이 가득 장전된 탄창이 들어있었다.
"넌...넌......이...나쁜......"
차갑고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
"사실 이곳은 저에게도 참 중요한 공간입니다만......."
나는 재빨리 리볼버에게 탄창을 끼웠다. 두 어 번의 달그락 철컥거리는 소리들이 검은 공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소름 끼치도록 기분 좋은 소리. 나는 그것들을 오른손에 쥐었다. 차갑고 약간 무거운 듯한 느낌이 내 가슴을 주체할 수 없이 흥분시킨다.
그와 동시에 저쪽 어딘가에서도 날카로운 쇠의 부닥김을 느낄 수 있었
던건 분명 내 착각이 아닌거 같다.
“왠만하면 빨리 끝내죠. 이곳이 크게 훼손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닥쳐!"
-탕-
총탄이 나의 머리 바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 자신도 몸을 숨기기 좋은 곳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차라리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타다다닥. 조용했던 성당 안은 내 자신의 발소리와 상대의 발소리로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흡사 타락한 거리의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듯 하는 그 발소리는 내 자신이 둥근 주축 기둥에 몸을 숨기고 나서 음량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탕탕-
-파가각-
기대어 있는 기둥에 진동이 나의 몸까지 파고들었다. 대리석이 파괴되는 소리는 흡사 내 고막에 대리석 조각이 박히는 듯 끔직한 소리였다. 발소리가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고요가 내 몸 주위를 감쌌다. 나는 소리가 멈춘 곳을 감각적으로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나의 오른쪽 이었다. 하등 동물 같이 감각적인 것은 너무나 잘 찾아낸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리볼버의 총구를 소리가 멈춘 쪽으로 겨누었다.
-탕-
오른손에 묵직하고도 가벼운 진동이 내 온몸을 흥분시켰다. 투둑, 길게 늘어져 있던 담뱃재가 떨어졌다. 타다 닥 멀리서 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나도 다시 발 놀림을 바쁘게 움직였다. 성당 안은 다시 시끌거리기 시작하였다.
“너를 없앨 거야!”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의 고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거북스러운 느낌이 나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날 형편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내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바로 약간의 당황함이다.
“평소의 Double G 같지 않은걸.”
나는 그녀를 직접 본 적은 한번도 없다. 하지만 내 조직에서 녹화한 비디오에서 본 그녀의 솜씨는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녀가 비즈니스를 행할 때의 행동은 훤히 꿰고 있었다. 순백색의 타이즈 부분 부분과 흩날리는 은색의 긴 머리만이 간간히 눈에 잡히기만 하는 날렵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령과 같았다. 칼끝이 휘어진 변형된 단검 두 개와 손가락 크기만한 암기를 무기로 쓰며 5분 안에 목표의 사지를 모두 해체 내버리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다. 비즈니스 중에는 숨도 쉬지 않는 듯 조용하며 얼굴조차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백귀(白鬼). 내 자신만이 그녀에게 붙인 애칭이다.
그런 나의 머릿속에 박힌 백귀의 이미지는 바로 지금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타다다당-
내 바로 뒤쪽에서 대리석이 튀어 날라 왔다. 섬뜩한 느낌이 뒷골을 냉각시켰다.
“예외...라는 것이군”
나는 지금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일 필요성을 느꼈다. 백귀는 나보다 빠르다. 그것을 잡으려면 최대한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그녀를 한 번에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기회는 그 때뿐. 그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타다다당-
“내 소중한 것을 내놔!”
무엇인가 간절히 원하는 자의 목소리인 듯싶었다. 무엇을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그것을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내 자신도 받을 것이 있고 저 상대방에게서 이겨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라는 거다.
물고 있는 담배는 어느새 필터의 일부분까지 태운 채 내입에 종이 조각처럼 물려져 있었다. 평소의 일 처리에 비해서 너무나 시간을 끌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게 되는 걸.”
나는 쥐고 있는 리볼버를 다시 한 번 되 쥐어 보았다. 약간 달구어진 듯한 총신이 내 손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눈동자를 굴려 어느 곳이 좋을지 검색해 본다. 이런 곳에서는 딱히 좋은 곳이 없다.
“빨리 끝내야 할 텐데……”
저쪽에서 근접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럴 때는 감각에 몸을 맡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탕탕 탕탕-
-타다 닥-
나는 상대편의 총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총소리가 난 곳을 주시하였다. 끈적거리는 검은 뭉탱이 안에서 무엇인가 지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 오른손에 들고 있는 총을 겨누고 가볍게 방아쇠를 한번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당겨줬다.
-탕-
-......!-
약간은 둔탁한, 타격 감이 나의 육감을 자극했다. 맞았다. 치명타를 입지는 못했지만 신체의 어느 부분인가 타격은 분명히 주었다. 이겼다.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받고 못 이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제 결정타만주면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약간 긴장이 풀어지는 듯, 행동이 약간 둔해짐을 느꼈다.
-휘릭!-
-푹-
“…아차.”
오른 어깨가 갑자기 뜨거워짐을 느꼈다. 순간 오른손에 들려있던 리볼버를 놓칠 정도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겨우 놓치지는 않았다. 나는 재빨리 근처의 기둥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경계를 천천히 오른 어깨 쪽을 돌아봤다. 은도금이 된 복잡한 문양의 단검이 내 어깨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왼손으로 재빨리 어깨의 단검을 뺐다. 푹, 턱이 수축되는 느낌과 함께 검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주욱 튀는 것이 느껴졌다. 검지 2개를 늘어뜨린 길이보다 약간 짧은, 흡사 송곳 같은 모양의 암기가 내 눈에 비추어 졌다.
“암기를 썼었지.”
다행히도 독은 발라져 있지 않은 듯 했다. 나는 그 암기를 바닥에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다음 오른 손에 쥐어져 있는 나의 무기를 왼 손에 바꾸어 쥐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입에 물려져 있던 담배 같지도 않은 담배를 거칠게 내뱉었다. 방심이었다. 완벽한 방심이었다.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내 자신이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미래다.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는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녀의 실력은 내 심장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음에도 어깨를 맞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그쪽에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반증이다.
“이제 곧 끝나겠군.”
나는 본능적으로 이번 공격으로 승패가 결정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조금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해볼까.”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최대한 부드럽고 가볍게 내쉬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함께 느껴졌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날뛰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덩어리는 바로 역겨움이었다.
나는 온몸에 힘을 천천히 주기 시작했다. 긴장의 극한 속에서 나는 타이밍을 점쳐보고 있었다. 그것은 쉬운듯하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지금이다!”
나는 잔뜩 긴장되어 있는 몸을 릴리즈 시켰다. 몸이 고무줄처럼 튀어 올랐다. 나의 목표는 성당 중앙의 맨 앞에 있는 십자가. 나의 육감은 그쪽으로 달려 나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파파파팍-
내 뒤의 한 치도 안 되는 곳에서 방금 전 내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던 암기들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나를 압박했다. 땀방울인지 핏방울인지 모르는 것이 내 몸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긴장이라는 것은 돌아버릴 정도로 무섭다.
“제길…….”
나의 입에서는 저절로 상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때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최고와의 대결이 힘들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목에 걸린 소중한 펜던트가 웃옷에서 빠져 나옴을 느꼈다. 볼 수는 없었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쇠줄의 느낌은 펜던트가 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해주었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내가 목표를 했던 곳에 도착해있었다. 이제 때가 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온 것이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어진다면 나는 그대로 끝장이다!
“이야 아아!!“
나는 뒤쪽으로 몸을 휙 틀었다.
-…….-
목 주변이 시원했다.
“…….”
“…….”
총구는 그녀의 심장에 정확히 조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날카로운 단검이 나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보랏빛 십자가. 그 위에 색색의 유리로 수놓아진 구세주가 평온한 얼굴로 나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에 빠졌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쁜 자식.”
백귀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오른팔은 살짝 늘어져있었다. 백색의 타이즈는 군데군데 핏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조직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다는 백귀의 얼굴이다. 보랏빛을 은은하게 반사시키는 은발 속에 잘 조각된 얼음 조각이 나의 눈에 비추어졌다.
울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구슬 같은 것이 얼음조각을 타고 끊임없이, 톡톡 바닥에 떨어졌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런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백귀와는 너무나 달랐다. 저런 식의 감정표현은 이 비즈니스 상에서 금기 시 되는 것이다. 나는 저절로 충고를 해주려고 열리는 입을 서둘러 단속해야만 했다.
“너는 나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빼앗았어.”
안식처.
무슨 말을 하는 것 일까? 설마 이곳을 말하는 것인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을 보면 충분히 그런 뜻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할말은 있다.
“당신도 마찬가지지요.”
"뭐?“
침묵. 나도. 백귀도. 아무 말도 없었다. 순간 말하는 법을 잃은 듯, 조용했다. 나와 그녀의 사이에서 부드러운 살기가 감돌았다.
백귀는 나를 쳐다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맑아 보였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순간 눈동자가 그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듯한 기색이 나타났을 것이다. 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누군가와 눈빛이 너무나 닮아있었지만 아닐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이야기가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넌.”
백귀는 나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 가득 메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곧 평상심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듯 나를 다시 천천히, 그리고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나를 자세히 관찰하던 백귀의 눈이 나의 목에서 멈칫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했던,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린 듯 그녀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더니 순간 그녀의 눈빛이 빠르게 나에게로 꽂혔다.
“이곳에서 그녀에게 고백한 날짜는 언제지!!”
“아……?”
의외의 질문.
“그녀에게 고백한 날짜는 도대체 언제야!!”
격앙된 목소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곳에서 고백했잖아!!”
순간 머리 속을 텅 하고 맞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백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절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할 대사가 아니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며칠이냐고!”
백귀는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자신에게서 알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서 또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 일까? 백귀와 나는 한번도 만난 적도 없거니와 무엇 하나 공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니, 아니다.
순간 나의 머리 속에서는 방금 전에 지워버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제멋대로 복구가 되어 나의 머리 속을 뛰놀고 있었다.
절대 일어 날 수 없는 상상이 불쑥 내 앞으로 커다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난감한 눈빛이 나의 눈동자에서 흐릿한 색감을 과시 했다.
“뭐, 뭐야…….”
갑자기 나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생겨났다. 하지만,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하였다. 저쪽, 그리고 내 쪽은 이런 식의 행동은 절대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란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좋을까? 무엇을 해야 내 자신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12월 31일 밤……”
입은 나도 모르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
나는 경망스러운 입을 황급히 닫고 백귀를 살짝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고이는 것이 비추어졌다. 뭔가 확신이 서가는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어.”
때구르르르.
“말도 안돼……”
백귀의 혼잣말이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 지는 듯, 그녀의 칼이 흔들렸다. 기회였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은 원상태 그대로였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칼은 곧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그녀와…처음으로 만난 장소는 어디지.”
백귀는 아까보다 좀더 긴장한 상태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 곳……”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녀와 헤어졌지?”
그녀의 눈빛에서 살짝 빛나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순간 뭔가 이상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 사람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추궁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정보를 빼가려고 하는 음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사실 몇 개만을 알아 내어, 이 후의 정보를 알아 내는 전형적인 수법 말이다. 나는 풀어졌던 경계심을 다시 조였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을 물어 보는 거지?”
“묻는 말에 대답하란 말야!”
순간 내 총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외침이 메아리 쳤다. 강압적인 말투. 그것은 내 자신에게서 반작용이 일어나기에 너무나 안성맞춤이다.
“내가 왜 당신에게 대답해야 하는 거지?!”
“난 이럴 권리가 있어!”
권리? 도대체 무슨 권리가 있다는 것이지? 난 머리를 아무리 굴려 생각해봐도 생각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 머리가 순간 지끈 해질 정도로 머리 속을 뒤졌다. 결론은 당연히 없다 이다. 그녀가 나에게 권리를 따질 권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없다. 지금 내 앞의 여자가 나의 정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여자를 믿고 내 자신이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
“레드 파크였지? 10년 전 날씨가 아주 많았던 그 날 말이야!!”
“아?”
무엇인가, 내 머리 속의 것을 강제로 꺼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넌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이것 저것 맛있는 것을 먹으며
재미있게 놀았어! 맞지? 그렇지?!”
사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앞 뒤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흥분했다. 몸이 극도로 흥분되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아는 거야!”
“그 후, 어떻게 됐지?”
그녀는 방금 전 보다 훨씬 침착한 상태였다. 그 분위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극도로 흥분한 가슴은 천천히 진정되어 갔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강하게 찌르는 듯하면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그녀는…누나는…….”
나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지만 곧 입을 닫았다. 앞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의심. 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저쪽은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자신이 유도심문에 말려 들어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대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살해 당했어.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다행히도 이성보다는 나의 몸이 먼저 반응 해주었다. 나의 고민을 덜어준 셈이다.
이로서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말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의 해답을 얻어내는 것 뿐이다. 나는 천천히 내 앞에 있는 백귀를 쳐다 보았다.
“…그렇구나.”
가슴이 아팠다.
무엇인가 허탈한 듯한 목소리가 나의 가슴을 순간 짓눌렀다.
무엇인가. 도대체 이 것은 무엇인가 이상했다.
왜 이러는 거지.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땡그랑.
나의 목을 노리고 있던 것이 바닥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찬스다.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이라는 것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내 앞에 있는 그녀도. 나는 조용히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렸다. 나의 행동에는 상관없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여성은 가냘픈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조용하고 세게 감아 쥐고 있었다. 오른 어깨에 피가 간헐천처럼 솟아오르며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생을 마쳐가는 동물의 그것처럼. 그녀의 동그란 동공이 작아져, 뾰족한 침을 연상케 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럴 수가 있어……?”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였지만 워낙 조용히 중얼거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지 다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자신에게 생긴 커다란 궁금증의 해답이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물음은 대답했다. 이제, 내 자신이 물어볼 차례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였다. 무엇인가 나사 하나가 탁 빠진 듯한 느낌. 솔직히 이런 식으로 말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실제로 표현하는 것은 결국 이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살짝 웃어 보였다. 힘이 없는 듯, 허무한 미소처럼 보였다. 천천히, 잡고 있던 자신의 양쪽 어깨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을 목에서 천천히 걷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잘 보이도록, 내 앞으로 내밀었다.
스륵, 나의 옷에 살며시 걸쳐져 있던 무엇인가가 옷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봐.”
눈에 익은 보라색 물체.
보라색 칠이 된 반달 모양의 것.
그것은 내 자신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다…당신은?”
아냐.
말도 안돼.
“난 네가 알고 있는 사람.”
어떻게 이런 일이…….
“같은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분명…내 앞에서…….
“드디어 찾았어.”
내 품 안에서…….
“…누…나?”
피를 흘렸었는데…….
머리 속의 혼란을 수습을 할 수 없는 듯, 아무렇게나 입이 움직였다. 부정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느끼고 있는 원초적인 감각에 의해서 결론 내려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울고 있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녹아 흐르고 있었다. 작은 미소가 느껴졌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미소.
뭐라 해야 할까. 지금 내 자신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설명 할 수 없는 사실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반론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나의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떠하든 분명 기쁜 것만은 사실이었다. 누나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누나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던 저 사람은 내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었다. 이제 곧 저 사람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내 앞에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꿈만 꾸어오던, 그림 같은 소원이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하지만 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냐.”
…아?
순간 모든 느낌이 정지 되는 느낌.
“넌, 그 아이가 아니야!”
외침.
띵했다. 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세게 후려갈겨진 것 같은 띵함이 전해져 들어왔다. 머리가 근질근질했다. 몸이 비틀거렸다. 동공이 순간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것은 절대 아니다. 이상한 거다. 그래, 정말 이상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밖에 들지 않았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나! 난 누나의…….”
나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식의 사치스런 생각은 순간 모두 없어져 버렸다. 단지 내가 생각했던 멋진 결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녀. 그러니까 지금 누나라고 믿고 싶은 사람은 나의 행동에 상관없이 슬픈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 때 죽은 사람은……”
누나는 나를 살짝 쳐다보았다.
“바로 그 아이……”
슬픈 눈가의 주변에 다시 녹아버린 다이아몬드가 찰랑거리기 시작하였다.
“너였단 말야.”
주륵.
“누…나?”
나의 머리 속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무엇인가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너무 복잡해서 어찌 보면 개꿈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가 나오는 꿈,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전개로, 결국 깨어나면 허무함과 아쉬움만 남는 그런 꿈 말이다. 꿈을 깨자. 나는 혀를 세게 깨물어봤다.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꿈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깨지 않았다. 괴로웠다. 내 정신세계에 커다란 혼란이 오기 시작하였다. 당장이라도 깨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뭐라고도 해야겠다. 부정이라도 해야겠다. 꿈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말…말도 안돼……난…이렇게 살아 있는데?”
“거짓말이 아냐.”
떨리는.
“그 때 너는…….”
가냘픈 목소리.
“피를…많이 흘리면서……”
슬픔.
“내 앞에서 나뒹굴어졌어.”
괴로움.
“그 때의 너의 뜨거운 핏물을 잊지 못해.”
한(限).
“하늘을 저주하면서 울었어!”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미친 듯이!”
절규.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었어!”
지금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이 정도 말밖에 기억해내지 못하겠다.
뭐, 이제 상관하지 않겠어.
“이리저리 녀석들에게 끌려다니다가 T.B.S에 의해 겨우 구출되었지만 너는.......”
꿈이니까, 이런 허구적인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해.
“네가...죽어버린 네가 사라져 버렸어!”
빨리 깨야 한다. 이런 악몽은.
“너를 찾기 위해 난 T.B.S에 들어갔어. 그래...너의 조직, 나의 예전 조직, 나를 구해준 조직 말야.”
하지만, 어떻게 깨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조직을 찾기 위해 난 죽이고
또 죽였어. 미친 듯이 죽였어. 정말 내 자신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있을 듯이 말야."
무엇을 해야 깰 수 있을까.
"하지만 난 T.B.S에서 내가 원하는 조직의 정보를 얻지 못했어. 준다고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지."
아참.
“그래서 난 찾기 시작했어. 그 조직의 실체를. ”
“그리고 내가 그 조직을 찾아 궤멸 시키고 그 조직의 우두머리를
만났을때...... ”
그 방법이 있었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
내 앞에 있는 허구를 지우면.
“나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다던 T.B.S는 너를 복제해버린 거였어!”
모든 것이 해결 되지 않을까.
“나에게 가장 소중 한 너를……!”
하지만 이것이 진짜라면?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너를 살인자로, 그것도 대량생산
하기 위해서!! ...조직은 그냥 이용된 것 뿐이었지!”
아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어.
“...난 지금 까지 수많은 너를 죽여왔어. 입수한 T.B.S내부문건에
따른 너의 복제숫자는 100명......”
꿈이야.
“…난 99명의 너를 죽였어.”
꿈이라고 목걸이는 줄 수 없어.
“마지막까지 널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어.”
이것은, 나의 소중한 것이니까.
“목걸이만 받으면 갈게……”
“줄 수 없어!”
나의 목에서 큰 것이 터져 나왔다. 추잡스럽게 흘러나오는 토사물처럼 그것은 뱉어내면 뱉어낼수록 역겨운 냄새와 함께 나의 속은 뒤집어져 갔다.
“이러지마…….”
누나는 아니 허구 속의 저 인물은 호소하듯, 나를 슬픈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난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악몽일 뿐이고 저 것은 단순한 몽마(夢魔)일 뿐이다. 몽마는 없애버려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꿈이라도 줄 수 없어!”
“꿈이 아니야! 이건… 현실이야!”
몽마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나의 눈에는 흐느적거리는, 눈동자가 없는 어느 한 여자 귀신이 내 앞에서 씨부렁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냐!! 꿈이야!!”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리볼버를 몽마에게 겨누었다. 몽마는 당황한 듯한 얼굴이 살짝 비추어지더니 이내 추악한 미소를 얼굴 가득 품었다.
“제발… 이건 아냐……. 이러지마…….”
목소리 하나 만큼은 누나의 목소리를 가련하게 잘 연기해내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의 정체를 안다. 그 정도로는 속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리볼버에 걸려 있는 검지에 힘을 살짝 주기 시작하였다.
“널 죽이면 모든 것이 확실해질 거야!”
몽마는 드디어 본색을 들어냈다. 떨어져 있던 칼을 다시 집더니 내 쪽으로 다시 칼날을 세웠다. 좋았다. 어차피 둘 다 죽어도 상관 없다. 그럼, 난 꿈에서 깰 테니까.
“끝까지 가보자라는 것이지?!!”
“난 이러고 싶지 않아! 제발 펜던트만 돌려줘!”
몽마의 얼굴이 점점.
“시 끄러! ”
그리워하던.
“제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죽어버려!!”
-탕-
-푸욱-
왜 난 깨닫지 못했을까.
Final Chapter
-이 성당 참 멋지다. 이런 곳도 알다니 둔한 너답지 않은 걸?-
-누나.-
-응? 왜 그러니?-
-누나. 나 말이에요. 누나 좋아해요. 사귀어 주세요.-
-에……?-
-그러니까요. 저 누나 좋아해요!-
-나참 너도… 갑자기 이상한 농담 하지마. 정말인 줄 알잖아.-
-전 진심이에요! 저 누나 좋아한단 말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욱!-
-넌…정말…….-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구나. 너란 아이는. -
그 때의 따듯함.
-누나, 여기 참 좋죠?-
-아니. 그렇지 않은 거 같아.-
-왜요?-
-너랑 놀이 공원을 오니까 빙글빙글 어지럽게 도는 것이나 타고 말야. 나는 이미지에 맞게 회전 목마 같은 것을 타고 싶었는데.-
-에에이~ 누나는 과격하잖아요. -
-요녀석이!-
-아야! 불량 폭력 아줌마다! 이 아줌마가 사람 때려요!-
-뭐라고? 너 잡히기만 해봐!!-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요!-
-내가 너하나 못잡을 줄 알아아!-
그 때의 즐거움.
-머그컵에 이니셜을 새겨봤어요.-
-G&G-
- 난 G보다는 K가 더 맘에 드는데.-
-뭐라면 또 어때요. 아무튼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길 빌면서 새겨봤어요. 어때요? 맘에 드세요?-
-맘에 들기는 한데, 너 정말 낯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게 제 특기잖아요.-
-하긴 그래.-
-하하하!-
그 때의 행복
-이거…받아.-
-누나 이게 뭐에요?-
-풀어봐.-
-이거 팬던트 아니에요?-
-어때?-
-예쁜데요.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내가 만들었어.-
-에? 정말요? 정말 대단해요 누나! 이렇게 예쁜 것을 누나가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아요.-
-왠지 비꼬는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아무튼, 이 것도 봐.-
-어라, 누나 목에도 같은게 걸려있네요?-
-커플 목걸이야.-
-…에?-
-우리 벌써 100일 넘었잖아. 근데 이런 것 도 없으면 왠지...이상해서 말이야. 헤헤-
-누나…….-
-받아…주겠어?-
-저, 말이에요.-
-…….-
-전…지금 너무 기뻐요.-
-받아…주는 거야?-
-그럼요. 평생, 간직할 거에요.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
-고마워…정말 고마워…….-
사랑의 맹세.
-누나, 아이스크림 사왔…-
-꺄아아아악!-
-누나!!-
-이 년 참 반반하게 생겼는데. 나중에 잘 써먹을 수 있겠어. -
-너 이 자식 놓지 못해!!-
-어딜 건방지게! -
-탕-
-아…!-
-과…관수야?-
-으아아아악!-
-관수야아아아아아!!-
-꺄아아악!-
-조용히 해! 죽여버릴 수가 있어!-
-살려내!! 관수를 살려내란 말야!!-
-이년이 귀여워해줬더니!!-
-탕.-
-꺄아아악!-
-…아?-
-관수야…….도…망가…….-
-누…나?-
-도망…가라니…까…….-
-누나아아아아아아!!!-
그때의 슬픔.
-소개하도록 하지. 나는 국제 T.B.S 소속의 최지훈이라고 하네. -
-당신은 도대체 왜 날 찾아 온 거죠? 또 날 비참하게 만들려고 왔나요! 나가요! 당장 나가란 말이에요!-
-아아, 진정하게. 나는 자네를 도우러 온 거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
-복수를 하고 싶지 않겠냐고 물었어.-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자네가 싫어하는 무리를 몽땅 잡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는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
-그런 분이 왜 절 찾아 온 겁니까?-
-이번에 레드 파크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동자들은 악질적인 테러리스트라네. 세계 무기 암시장의 반 이상을 틀어잡고 있는 단체이지. 요즘에는 인간복제까지 손을 댄다더군. -
-그딴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도대체 왜 찾아온 것인지 말해줘요!!-
-…….-
-자네 사격술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네. 세계 최고라지?-
-…….-
-부탁하네. 우리를 도와만 준다면 자네가 원하는 조직의 정보를 주도록하지. 덤으로 처분 건까지 말일세.-
-......-
-...할건가?-
-...제가 대체 무엇을 하면 되는겁니까?-
-고맙네.-
절망 속의 희망
눈이 천천히 떠졌다. 껌벅거리는 빌어먹을 형광등이 나를 반겨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나의 눈동자에 십자가가 비추었다. 아까와 달리 검붉은 색이었다. 군데 군데 흰색으로 물든 붉은 십자가. 저 색은 누구의 색 일까. 내 자신의 색 일까. 아니면 누나의 색 일까.
몸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가슴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 안에서 흐르던 것이 바닥으로 마구 흘러내렸다. 하지만 상관 하지 않았다. 내 몸은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 갑이 나왔다. 이리저리 구겨지고 비릿한 냄새가 나도 나에겐 절실히 필요한 담배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
힘겨운 연기가 푹 하고 피워 올랐다. 차가운 바람과 담배의 매캐함이 어우러져 환상의 2중주를 나에게 선사하였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꿈이 아니었구나.”
나는 십자가 위를 힘겹게 쳐다 보았다. 방금 전 까지 보이던 구세주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단지 깨어져 버린 유리 조각들과 검은 새벽의 밤 하늘이 보일 뿐이었다. 바닥 부분에는 색색의 유리조각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덩어리는 희고 검붉은 사람 덩어리였다.
“바보같이.”
나의 주변에 작고 하얀 깃털 같은 것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나의 몸뚱이에 닿는 순간 흡사 불결한 것을 만지는 듯한 여성의 얼굴처럼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다.
“풋!”
웃음이 나왔다. 난데 없이.
“하하하하!!”
따듯함, 즐거움, 행복, 사랑, 슬픔, 희망
모두.
이 것 모두
모두 내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누구의 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지금으로서 그것을 판단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만의 진실만을 믿은 채 굳게 달려온 나의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심어주고 사라져버린 신은 과연 무슨 기분일까.
“하하…바보같이.”
눈에서 미지근한 물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나의 뺨을 통해 바닥에 떨어졌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런 것일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냥 멍하고 슬프다. 상처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무엇에다가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나는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정말 바보 같이…….”
몸에서 다시 한번 크게 무엇인가가 뒤틀려 나오는 느낌과 함께 나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렇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줘야 할 시간이다. 진실이라는 무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를 한 내 자신이 무대를 떠날 때는 왜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한 것 일까.
나는 멍해진 감각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미 멍해진 몸은 한번 비틀 두 번 비틀거렸지만 그렇게 개의치 않았다. 온 몸이 이곳 저곳을 부딪쳐가며 움직인 것은 바로 십자가 밑이었다. 나의 눈에 방금 전 봤던 검붉은 사람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나…….”
나의 몸이 데구르르 바닥으로 굴렀다. 유리 조각들이 나의 몸에 박히는 듯 했다. 하지만 온몸이 마취가 된 듯 그냥 박힌다는 멍한 느낌만 왔다.
“저…왔어요.”
나의 몸은 차갑게 식은 누나의 몸뚱아리에 힘겹게 걸쳐졌다. 마지막은 이곳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이 사람이 원한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아니면, 이 사람이 내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내 기억 속에서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제, 저도 갈래요.”
눈이 감겨왔다. 온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더 이상 몸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끝이라는 단어가 죽어가는 뇌세포 사이에서 울려댔다.
“안녕, 내 소중했던 사람…….”
마지막 미소가 입안으로 퍼지면서, 눈이 감기었다. 곧 하얗고 차가운 것이 나의 몸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내 자신에게 남은 단 하나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