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글 수 521
흔히 인간의 내부를 소우주라고 부르곤 한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의 작은 점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인간과 인간의 사이라는 것도 우주의 연장선상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각각의 개인들은 도시라는 넓고 아득한 어둠의 공간 속에서 안타까운 자전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며 알 수 없는 공전궤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딩동! 딩동!”
요란하게 울리는 기계적인 벨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앞자리에 앉은 여자의 긴 갈색머리가 내 책상위에 그 끝을 흩고 있었다. 나는 입을 조금 벌렸다. 한숨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보세요. 실례합니다만 머리카락 좀 치워주시겠어요? 별로 어렵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너무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뭐라고 생각할까?
‘덜컥!’
망설이는 사이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고 삼십 중반의 강사가 들어 왔다.
“자, 여러분 오늘은 일치에 대해 강의하겠습니다. 일치는 매 시험마다 최소 2문항은 출제가 되니까…….”
강사의 말을 어렴풋이 흘려들으며 책상 밑의 가방에서 교재와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앞에 앉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피해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고 펼쳤다.
“더 스터디 쇼우즈 댓 다이어츠. 여기서 댓 다이어츠가 복수니까…….”
강사는 설명과 교재CD의 재생을 번갈아가며 강의를 진행했다. 나는 열심히 볼펜으로 교재에 줄을 긋고 주석을 달았다. 글쎄……. 하지만 이런다고 내가 정말로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 저번 시험결과를 생각하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생각해보면 영화를 볼 때는 자막이 있고 해외여행 따위를 갈 수 있을 여유도 없고 나중에 취업을 한다고 해도 해외출장을 반드시 가게 된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영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영어를 어디에 쓸 것인가 하고는 별도로 영어가 나의 쓸모를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태양계의 중심이 태양이듯 영어는 어떤 종류의 우주의 중심이다. 그 우주에서 영어에 대한 나의 필요성이나 나라는 존재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후우…….”
‘달칵!’
목에 걸려있던 것 같던 한숨이 작게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한숨에 흩어지듯 쥐고 있던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발의 대각선 앞쪽으로 미끄러지듯 굴러서 멈추는 볼펜을 내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봤다.
왼쪽 옆으로 한 자리를 비우고 앉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한명. 그 남학생의 뒤, 그러니까 내 왼쪽 대각선 뒤로 비슷한 교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통통한 여학생이 한 명. 내 우측으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자리에 귀에 피어싱을 한 짧은 노랑머리에 힙합스타일의 이십대 초반 그러니까 내 또래로 보이는 청년 한 명. 그리고 그 남학생의 앞자리에 약간 다부진 인상에 회사원으로 보이는 이십대 중후반의 여자 한명.
하지만 누구도 나를 눈여겨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누군가 볼펜을 떨어뜨리고 또 그것을 줍는 들 그것은 강사를 포함해 일곱 명. 아니, 일곱 행성으로 구성된 우주에 있어서 너무나 사소한 일일 것이다.
나는 안심하고 천천히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볼펜 자루가 살짝 잡혔다. 그 순간 나의 시선은 바닥이나 바닥의 볼펜이 아니라 앞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뭐 그 순간까지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상 옆으로 보이는 앞자리 긴 갈색머리 여자의 허벅지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었다. 오늘은 검은 색의 짧은 주름치마였다. 적당히 살이 잡힌 허벅지에서 미끄러진 시선은 매끈한 종아리를 따라 떨어져서 끈이 가는 흰 샌들을 신은 작은 발까지 담아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앞자리의 여자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교재CD를 재생하느라 기계를 만지고 있는 강사 역시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만족하며 다시 한 번 곁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왼쪽 앞뒤로 앉은 남여 두 학생은 교재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 앞의 여사원은 강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앗! 오른쪽 옆자리의 피어싱 청년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 챈 걸까? 화를 내는 걸까? 하지만 왜? 그간 보아온 것으로는 내 앞자리의 여자와 그는 아무 관계도 아닐 텐데.
나는 태연스레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하면 잘못 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과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그는 코 옆을 한차례 씰룩이긴 했지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강의에 집중하는 척 강사가 교재CD를 재생하는 것을 쳐다봤다.
그간의 일을 정리하자면 이 강의실에는 대개 일곱 명이 들어왔다. 가끔 한두 명 못 보던 얼굴들이 뒤쪽에 앉아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강의시간이 늦어서인지 강사의 학력이 애매해서인지 그런 얼굴들이 이틀 이상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교단에 서는 강사를 제외하면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수강생들이 앉는 자리는 언제나 일정했다.
중앙 맨 앞자리에는 긴 갈색머리의 이십대 초반 여자가 앉았다. 지금은 뒷모습만 보이지만 강의시작하기 전이나 끝나고 자리에 일어서거나 앉으며 본 얼굴은 갸름하고 짙은 화장이 거부감 없이 어울렸다. 아슬아슬한 옷차림을 자주 했는데 그래도 강의는 열심히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왼쪽 앞자리를 비우고 그 뒷자리, 그러니까 내 왼쪽 옆자리로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앉았다. 강의 중에 조는 일이 많은 것을 보면 일단 듣기는 하지만 그리 열심은 아니었다.
남학생의 뒤, 내 왼쪽 뒷자리에는 남학생과 같은 학교의 여학생이 앉았는데 남학생과 모르는 사이는 아닌 듯 간혹 졸고 있는 남학생의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찌르기도 했다.
오른쪽 맨 앞자리에는 여사원이 앉았는데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듣는 사람이었다. 다부진 얼굴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것뿐으로 수수한 차림에 평범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모 때문인지 그리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여사원의 뒤, 내 오른쪽 옆자리에는 힙합청년이 앉았는데 이따금 귀의 피어싱이 몇 개 더 늘거나 머리색이 빨갛게 노랗게 변하곤 했다. 힙합청년은 이따금 며칠 안보이기도 하고 슬그머니 늦게 들어오거나 먼저 나가기도 했는데 언젠가 강의가 끝나고 강사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봐서는 사실 영어는 제법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왜 강의를 듣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여학생과 남학생의 관계가 좀 불분명하고 내가 앞자리의 여자를 은근슬쩍 곁눈질하곤 한다는 것이 사소한 예외이긴 했지만, 강의실은 영어강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느슨하고 완만하게 공전하고 있는 수강생이라는 행성들로 이루어진 작은 태양계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보면 좋아하겠구나 싶을 모습 아닌가.
“딩동! 딩동!”
기계적인 벨소리의 요란함이 나의 잡다한 생각을 흩어 놨다.
“자,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부분을 나타내는 대명사 뒤에 복수명사, 단수명사, 복수동사, 단수동사 어떻게 오는지 집에 가서 꼭 다시 봐두시고요. 다음 시간엔 동사의 종류 들어갈 테니까…….”
강사는 몇 마디를 더하더니 교재와 교재CD를 챙겨들고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앞문으로 나갔다. 태양계에서 태양이 사라진 셈이다. 어찌되겠는가? 가위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빼버리는 것과 같다. 함부로 실험해보는 위험을 자처할 필요도 없다. 가위가 멋대로 날아갈 거란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다. 수강생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둘 일어서서 강의실을 빠져나갈 것이다. 태양계의 종말. 그러나 우주란 본래 수 없이 많은 별과 행성계들이 시간과 공간을 엇갈리며 생멸을 거듭하는 곳이 아닌가. 다들 저마다의 길고 짧은 별들의 여행을 통해 또 어느 우주의 한편에 닿을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교재와 볼펜을 챙겨 담았다. 그랬다. 나는 언제나 강의실을 늦게 나가곤 했다. 정확히는 앞자리의 갈색머리 여자가 일어난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뒷모습을 좀 더 관찰하기 위해서.
“가자!”
갑작스런 앳된 여자 목소리에 놀라서 흘끗 시선을 돌렸더니 여학생이 남학생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라? 둘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졌지?
“얼른 안 나오고 뭐해?”
여학생과 남학생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가기가 무섭게 그 문틈으로 누군가 머리만 내밀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강사였다. 왜 다시 들어왔지? 누굴 부르는 거지?
“자기도 참! 급하기는.”
누군가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강사에게 대답했다. 다부진 얼굴의 회사원이었다. 수강생이 아니라 강사의 애인이었던 걸까? 아니면 수강생이었는데 어느새 강사의 애인이 된 걸까?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태양계의 모습이 내 안에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봐요?”
내가 잠시 멍해있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긴 갈색머리 여자가 어느새 일어나서는 가볍게 웃음 띤 얼굴로 날 부르고 있었다.
“네?”
나는 조금 놀라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하고 뭔가 모를 기대감을 품기도 한 채 대답했다. 그리고.
‘짝!’
볼이 화끈했다.
“내가 왜 때리는지 알지? 며칠 동안 참았지만 더는 못 참겠어. 너 앞으로 오지 말던지 아니면 와서 저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알았어?”
“네에…….”
나는 볼을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굽이 높은 샌들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멨다. 그래 뭐 우주적인 긴 시간에서 보자면 가끔은 이런 날도 있겠지. 그런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강의실에는 뭉그적뭉그적 일어설 준비를 하는 힙합청년만 남아있었다.
“야! 너 혹시 XX고 3학년 1반 아니었어? 나 동민이야!”
문을 나오려는데 힙합청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몸이 멈췄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확신을 잃은 목소리가 아닌가?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작게 들렸다. 내가 그렸던 태양계의 지도는 완전 엉터리였나 보다. 하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정지해있다고 하지만 우주자체도 팽창하고 있다는데 태양이라고 정말 고정된 것일까? 하물며 별들의 거리와 궤도란 것이 얼마나 확신할만한 것일라고.
인간이라는 작은 우주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를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주에 대해서는 무엇을 확신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각각의 개인들은 도시라는 넓고 아득한 어둠의 공간 속에서 안타까운 자전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며 알 수 없는 공전궤도를 그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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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페니쿠스, 코페르니쿠스.... 이 양반 이름도 제법 헷갈린다는 =ㅅ=)y~~~
“딩동! 딩동!”
요란하게 울리는 기계적인 벨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앞자리에 앉은 여자의 긴 갈색머리가 내 책상위에 그 끝을 흩고 있었다. 나는 입을 조금 벌렸다. 한숨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보세요. 실례합니다만 머리카락 좀 치워주시겠어요? 별로 어렵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너무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뭐라고 생각할까?
‘덜컥!’
망설이는 사이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고 삼십 중반의 강사가 들어 왔다.
“자, 여러분 오늘은 일치에 대해 강의하겠습니다. 일치는 매 시험마다 최소 2문항은 출제가 되니까…….”
강사의 말을 어렴풋이 흘려들으며 책상 밑의 가방에서 교재와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앞에 앉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피해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고 펼쳤다.
“더 스터디 쇼우즈 댓 다이어츠. 여기서 댓 다이어츠가 복수니까…….”
강사는 설명과 교재CD의 재생을 번갈아가며 강의를 진행했다. 나는 열심히 볼펜으로 교재에 줄을 긋고 주석을 달았다. 글쎄……. 하지만 이런다고 내가 정말로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 저번 시험결과를 생각하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생각해보면 영화를 볼 때는 자막이 있고 해외여행 따위를 갈 수 있을 여유도 없고 나중에 취업을 한다고 해도 해외출장을 반드시 가게 된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영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영어를 어디에 쓸 것인가 하고는 별도로 영어가 나의 쓸모를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태양계의 중심이 태양이듯 영어는 어떤 종류의 우주의 중심이다. 그 우주에서 영어에 대한 나의 필요성이나 나라는 존재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후우…….”
‘달칵!’
목에 걸려있던 것 같던 한숨이 작게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한숨에 흩어지듯 쥐고 있던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발의 대각선 앞쪽으로 미끄러지듯 굴러서 멈추는 볼펜을 내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봤다.
왼쪽 옆으로 한 자리를 비우고 앉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한명. 그 남학생의 뒤, 그러니까 내 왼쪽 대각선 뒤로 비슷한 교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통통한 여학생이 한 명. 내 우측으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자리에 귀에 피어싱을 한 짧은 노랑머리에 힙합스타일의 이십대 초반 그러니까 내 또래로 보이는 청년 한 명. 그리고 그 남학생의 앞자리에 약간 다부진 인상에 회사원으로 보이는 이십대 중후반의 여자 한명.
하지만 누구도 나를 눈여겨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누군가 볼펜을 떨어뜨리고 또 그것을 줍는 들 그것은 강사를 포함해 일곱 명. 아니, 일곱 행성으로 구성된 우주에 있어서 너무나 사소한 일일 것이다.
나는 안심하고 천천히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볼펜 자루가 살짝 잡혔다. 그 순간 나의 시선은 바닥이나 바닥의 볼펜이 아니라 앞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뭐 그 순간까지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상 옆으로 보이는 앞자리 긴 갈색머리 여자의 허벅지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었다. 오늘은 검은 색의 짧은 주름치마였다. 적당히 살이 잡힌 허벅지에서 미끄러진 시선은 매끈한 종아리를 따라 떨어져서 끈이 가는 흰 샌들을 신은 작은 발까지 담아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앞자리의 여자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교재CD를 재생하느라 기계를 만지고 있는 강사 역시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만족하며 다시 한 번 곁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왼쪽 앞뒤로 앉은 남여 두 학생은 교재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 앞의 여사원은 강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앗! 오른쪽 옆자리의 피어싱 청년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 챈 걸까? 화를 내는 걸까? 하지만 왜? 그간 보아온 것으로는 내 앞자리의 여자와 그는 아무 관계도 아닐 텐데.
나는 태연스레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하면 잘못 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과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그는 코 옆을 한차례 씰룩이긴 했지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강의에 집중하는 척 강사가 교재CD를 재생하는 것을 쳐다봤다.
그간의 일을 정리하자면 이 강의실에는 대개 일곱 명이 들어왔다. 가끔 한두 명 못 보던 얼굴들이 뒤쪽에 앉아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강의시간이 늦어서인지 강사의 학력이 애매해서인지 그런 얼굴들이 이틀 이상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교단에 서는 강사를 제외하면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수강생들이 앉는 자리는 언제나 일정했다.
중앙 맨 앞자리에는 긴 갈색머리의 이십대 초반 여자가 앉았다. 지금은 뒷모습만 보이지만 강의시작하기 전이나 끝나고 자리에 일어서거나 앉으며 본 얼굴은 갸름하고 짙은 화장이 거부감 없이 어울렸다. 아슬아슬한 옷차림을 자주 했는데 그래도 강의는 열심히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왼쪽 앞자리를 비우고 그 뒷자리, 그러니까 내 왼쪽 옆자리로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앉았다. 강의 중에 조는 일이 많은 것을 보면 일단 듣기는 하지만 그리 열심은 아니었다.
남학생의 뒤, 내 왼쪽 뒷자리에는 남학생과 같은 학교의 여학생이 앉았는데 남학생과 모르는 사이는 아닌 듯 간혹 졸고 있는 남학생의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찌르기도 했다.
오른쪽 맨 앞자리에는 여사원이 앉았는데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듣는 사람이었다. 다부진 얼굴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것뿐으로 수수한 차림에 평범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모 때문인지 그리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여사원의 뒤, 내 오른쪽 옆자리에는 힙합청년이 앉았는데 이따금 귀의 피어싱이 몇 개 더 늘거나 머리색이 빨갛게 노랗게 변하곤 했다. 힙합청년은 이따금 며칠 안보이기도 하고 슬그머니 늦게 들어오거나 먼저 나가기도 했는데 언젠가 강의가 끝나고 강사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봐서는 사실 영어는 제법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왜 강의를 듣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여학생과 남학생의 관계가 좀 불분명하고 내가 앞자리의 여자를 은근슬쩍 곁눈질하곤 한다는 것이 사소한 예외이긴 했지만, 강의실은 영어강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느슨하고 완만하게 공전하고 있는 수강생이라는 행성들로 이루어진 작은 태양계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보면 좋아하겠구나 싶을 모습 아닌가.
“딩동! 딩동!”
기계적인 벨소리의 요란함이 나의 잡다한 생각을 흩어 놨다.
“자,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부분을 나타내는 대명사 뒤에 복수명사, 단수명사, 복수동사, 단수동사 어떻게 오는지 집에 가서 꼭 다시 봐두시고요. 다음 시간엔 동사의 종류 들어갈 테니까…….”
강사는 몇 마디를 더하더니 교재와 교재CD를 챙겨들고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앞문으로 나갔다. 태양계에서 태양이 사라진 셈이다. 어찌되겠는가? 가위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빼버리는 것과 같다. 함부로 실험해보는 위험을 자처할 필요도 없다. 가위가 멋대로 날아갈 거란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다. 수강생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둘 일어서서 강의실을 빠져나갈 것이다. 태양계의 종말. 그러나 우주란 본래 수 없이 많은 별과 행성계들이 시간과 공간을 엇갈리며 생멸을 거듭하는 곳이 아닌가. 다들 저마다의 길고 짧은 별들의 여행을 통해 또 어느 우주의 한편에 닿을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교재와 볼펜을 챙겨 담았다. 그랬다. 나는 언제나 강의실을 늦게 나가곤 했다. 정확히는 앞자리의 갈색머리 여자가 일어난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뒷모습을 좀 더 관찰하기 위해서.
“가자!”
갑작스런 앳된 여자 목소리에 놀라서 흘끗 시선을 돌렸더니 여학생이 남학생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라? 둘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졌지?
“얼른 안 나오고 뭐해?”
여학생과 남학생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가기가 무섭게 그 문틈으로 누군가 머리만 내밀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강사였다. 왜 다시 들어왔지? 누굴 부르는 거지?
“자기도 참! 급하기는.”
누군가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강사에게 대답했다. 다부진 얼굴의 회사원이었다. 수강생이 아니라 강사의 애인이었던 걸까? 아니면 수강생이었는데 어느새 강사의 애인이 된 걸까?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태양계의 모습이 내 안에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봐요?”
내가 잠시 멍해있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긴 갈색머리 여자가 어느새 일어나서는 가볍게 웃음 띤 얼굴로 날 부르고 있었다.
“네?”
나는 조금 놀라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하고 뭔가 모를 기대감을 품기도 한 채 대답했다. 그리고.
‘짝!’
볼이 화끈했다.
“내가 왜 때리는지 알지? 며칠 동안 참았지만 더는 못 참겠어. 너 앞으로 오지 말던지 아니면 와서 저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알았어?”
“네에…….”
나는 볼을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굽이 높은 샌들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멨다. 그래 뭐 우주적인 긴 시간에서 보자면 가끔은 이런 날도 있겠지. 그런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강의실에는 뭉그적뭉그적 일어설 준비를 하는 힙합청년만 남아있었다.
“야! 너 혹시 XX고 3학년 1반 아니었어? 나 동민이야!”
문을 나오려는데 힙합청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몸이 멈췄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확신을 잃은 목소리가 아닌가?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작게 들렸다. 내가 그렸던 태양계의 지도는 완전 엉터리였나 보다. 하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정지해있다고 하지만 우주자체도 팽창하고 있다는데 태양이라고 정말 고정된 것일까? 하물며 별들의 거리와 궤도란 것이 얼마나 확신할만한 것일라고.
인간이라는 작은 우주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를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주에 대해서는 무엇을 확신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각각의 개인들은 도시라는 넓고 아득한 어둠의 공간 속에서 안타까운 자전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며 알 수 없는 공전궤도를 그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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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페니쿠스, 코페르니쿠스.... 이 양반 이름도 제법 헷갈린다는 =ㅅ=)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