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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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1)
1-1. 뉴욕
눈을 뜬 곳은 이국의 낯선 도시. 길게 늘어진 회색 빌딩들과 가지런히 심어 놓은 가로수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익숙한 것이지만, 소녀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예를 들면 서울-와는 분명 다르다. 사람들의 머리색은, 소녀에게 익숙한 흑발이 아니라 TV 속에서만 보던 금발이 많다. 염색이 아닌 천연의 갈색이나 주황색의 머리색도 보인다. 한국이 아닌 건 확실하다.
온통 영어로 써 있는, 전혀 읽을 수 없는 간판의 가게들과, 소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 속에 묻혀 소녀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어디로 가야하나,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타박타박, 구두의 굽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아무도 없는 학교의 복도를 걸을 때처럼, 타박타박, 보도를 걷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소녀는 무섭다. 그래서 더욱 속력을 높여 걷는다.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아예 달려버린다. 온 힘을 다해 뛰어가자, 눈앞이 탁 트인다. 광장이다. 시민들의 휴식처인 듯 빌딩숲 가운데에 나무와 잔디가 잘 꾸며져 있다. 천사상이 세워진 분수도 보인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도시.
‘미국....... 엄마가 있는 곳.......’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유 없는 강렬한 확신이 소녀의 뇌리를 스친다. 소녀의 얼굴에 차츰 소녀다운, 나비 같은 화색이 돈다.
1-2. 병원
“선생님, 애 상태는 좀 어떤가요.”
흰 가운의 의사는 그저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외상은 그리 깊지 않은데, 어째서 아직까지 의식불명인지는 저희도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아직도 누워있는 소녀를 보며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여자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금세 방을 나갔다.
여자는 의사가 나간 문을 멀거니 바라보다, 다시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굳게 닫힌 창문 밖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6월에 접어들어, 노을빛은 몹시 나른한 기색을 띠고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풀렸다. 여자가 멍하니 시선을 옮긴 창 밖에선 어린아이와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나무 그늘에서 바람을 쐬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창문이 닫혀 있는 병실 안은, 에어컨 탓으로 적당히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왠지 몸이 답답하고 열이 났다. 여자는 문득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소녀의 옆에 가까이 의자를 끌어 당겨 그 조그만 손을 꼭 잡았다.
작고 통통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여자는 그녀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 아이에게 아무 이상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앞으로는 혼자 두지 않을게. 미안하다, 애리야.......’
똑같이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과 여자의 얼굴은 전혀 닮은 데라곤 없었다.
2-1. 하늘
하늘 위로 하얀 새떼가 지나간다.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녀의 등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 흰, 비둘기를 닮은 날개다. 소녀는 등어리에 신경을 집중하여 날개를 퍼덕여본다. 오오, 움직인다. 소녀가 달음박질치자 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빌딩 벽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위로, 위로, 계속 올라간다. 바람마저 소녀의 뜻대로 부는 것 같다.
마침내 사람이 개미같이 보이는 높은 상공으로 날아오르는데 성공한다. 더욱 더 높이 치솟아, 이젠 도시조차 장난감처럼 보이는 하늘을 날게 된다. 흰 구름 사이 시원스레 하강과 상승을 반복한다. 새벽에 마시는 공기보다 신선한 공기가 소녀의 피를 깨끗하게 씻겨준다. 머리가 개운해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아무런 장애가 없는 공중을 순회한다.
소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에서 하늘을 본다. 아래고 위고 온통 푸르다. 이렇게 푸르른 것이 땅 위에 존재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모든 것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가, 하늘에 있다. 쓸쓸하기조차 한 자유로움이 그 곳에 있다.
2-2. 화재, 그리고 추락
피부가 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소녀는 방을 나섰다. 손 안에는 엄마와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꼭 쥐고서, 한발 한발을 내딛었다. 현관문 쪽엔 불길이 거세서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신선한 공기를 찾아 베란다 쪽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갔다. 숨쉬기가 힘들어서 걸어가는 것도 많은 기력을 요구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외출 중이어서, 집에는 소녀 혼자뿐이었다. 불이 왜 났는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소녀는 벽을 짚어 걸음을 옮겼다. 시간 감각조차 잃어버릴 듯 강렬한 화기(火氣)를 뚫고, 겨우 베란다의 알루미늄 셔터를 열었다. 컥컥거리며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뜨겁게 달라올라 있었다. 베란다 아래를 무심코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위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이 점점 거세졌다.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의 얼굴은 이미 땀과 검댕이로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다시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더 늘어나있고,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해있었다.
영원 같았던 몇 초 후에, 소녀는 5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소녀는 액자를 두 손 안에 껴안은 채로 정신을 잃었다.
3-1. 인어
도시의 상공을 순회하던 한 마리의 작은 새, 혹은 한 명의 작은 천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자신을 계속 옭아매던 무언가에서 벗어난 기분에, 페퍼민트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처럼 온 몸이 상쾌하고, 근질근질하다.
날개를 사용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소녀는 멀리 멀리 날아가다, 산속의 폭포를 발견한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다. 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리는 폭포에 가까이 다가가니, 우렁찬 소리가 귀를 때린다. 쏴아아아아-쉬지 않고 떨어지는 물의 압력에, 흰 물보라가 하얗게 일어나 장관을 이룬다. 소녀가 날개를 접고 바위에 내려선다. 날개에 튀기는 물방울들 때문에 반사적으로 날개가 부들, 떨려 깃털이 떨어진다. 깃털이 수면 위에 떠다닌다. 폭포에서 이어지는 강물의 수면 위로 두둥실 떨어진 깃털이 흘러간다. 누군가의 손이 수면 위로 나타나더니 깃털을 잡는다. 조금 푸른빛을 띤, 가느다란 손가락이다. 촤아악, 물결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한 명의 인어(mermaid)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자의 몸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와 지느러미인, 전형적인 인어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엔 소녀의 날개 깃털이 쥐어져 있다. 소중한 듯 그것을 감싸 쥐고 소녀에게 나아간다. 소녀는 물을 양 손에 머금어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가 다가오는 걸 소리를 통해 알았다.
“누구세요? 와, 인어다! 안녕하세요!”
“후후, 안녕하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꼬마 아가씨.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어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에, 부탁이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대체 무엇일까?
인어의 눈동자 위엔 눈썹 대신 푸른 비늘이 돋아나있고, 머리카락 역시 푸른색으로, 매우 길게 길러 물 위로 흩어져 물결에 따라 넘실넘실 춤추고 있다. 인어의 눈동자는 흰 자위 대신 검은자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 빛나고 있는, 동공이 마름모 모양을 하고 있다. 소녀는 그 독특하고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본다. 보고 있자니 마치 고요한 새벽녘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저 폭포 위로 올라가, 상류로 가면 커다란 하마가 살고 있을 거예요. 그 하마를 부디 없애주세요. 아직 물을 안 마셨군요. 한 번 살짝 맛을 봐보세요. 틀림없이 이상한 맛이 날거예요.”
소녀는 반신반의하며 양 손에 물을 떠서 혀를 낼름 대어본다. 그러자 화악, 하고 구역질나는 맛이 혀끝을 쓰라리게 했다.
“그게 다 하마의 배설물 때문이에요. 우리들의 피해가 막심하답니다. 부탁드려요.”
“하지만 어떻게......”
인어의 옆에 또 다른 인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올려 묶은 그녀의 눈동자는 검은 자위에 노란색의 홍채를 띠고 있다. 그녀는 한 자루의 단검을 공손하게 떠받쳐 소녀에게 내민다. 물빛을 띤 검신은 소녀가 아는 금속 중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아 있었다. 고요히, 은은한 빛을 내뿜는 그것을 쥐고 소녀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3-2. 부재
어느 날은, 마음잡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엄마는 귀신이 잡아가기라도 했는지 머리카락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소녀도 사실은 아무리 찾아도 엄마를 찾을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엄마는, 먼 곳에 간단다, 아리야. 미국이라는 곳이야. 하지만 아리가 어른이 된 다음엔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때까지 건강하고, 아빠 말, 새엄마 말 잘 들을거지? 자, 약속!”
엄마가 슬픈 얼굴로 그런 소리를 했었던 것이, 분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꽉 찍었던 순간의 온기도 기억하고 있다. 미국에 간 엄마를 동네에서 찾아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등굣길에는 엄마가 늘 반찬거리를 사던 슈퍼에 들려보고, 하굣길에는 엄마가 자주 가던 한식집에도 들려봤으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낙심하며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울었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어느샌가 다가와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가 이제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저 울기만 했다.
“엄마... 엄마...”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건 당연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어서 어른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4-1. 용기
폭포의 위쪽, 강의 상류로 날개를 퍼덕이며 올라가본다. 회색빛의 단단한 피부의 하마가 보인다. 3미터는 넘을 법한 육중한 몸을 물속에 반쯤 담근 채 똥을 싸고 있었다. 인어가 건넨 단검을 쥐고 하마에게 다가간다. 하마가 금속성 울음소리를 내며-필시 그 하마는 소녀가 아는 ‘하마’가 아닌 ‘하마’인 것이다- 소녀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린다. 소녀는 힘껏 날개짓을 해 하마의 머리 위로 올라가 단검으로 정수리를 내리찍는다. 그러자 하마는 더욱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간다. 하마가 싼 똥들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흙탕물처럼 더럽던 강의 상류가 차츰 깨끗해진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은 물방울로 변하더니, 소녀의 가슴 속으로 쑥 하고 들어간다. 가슴 속이 차가워지면서, 동시에 뜨거워진다.
폭 포 쪽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위로 날아올라, 폭포를 내려다보니 수많은 인어들이 수면 위로 몸을 드러내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청아하고 맑은, 물결과도 같은 목소리다. 오랜 옛날 바다의 인어들의 노래는 너무나 아름다워 배를 타고 있던 선원들이 그 노래를 좀 더 듣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저절로 믿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다.
“꼬마 아가씨, 슬픔을 잊어요. 고독이 그대를 쫓아오더라도. 언제나 그대를 괴롭히는 건 그대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답니다.
꼬마 아가씨, 웃음을 잃지 말아요. 불행이 그대를 쫓아오더라도. 언제나 그대의 곁에는 그대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노래를 들으며 소녀는 서서히 졸리기 시작해, 날개를 접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 잠을 청했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서 그리운 향내가 난다.
"엄마......."
4-2. 새엄마
부모님이 이혼한지 2년 뒤, 소녀도 11살이 되었을 무렵, 아빠가 낯선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다. 우연히 봤던 아빠의 지갑에 넣어져 있던 사진의 그 여자였다.
“엄마는?”
“그래, 내가 이제부터 네 엄마란다. 어디 한 번 불러보렴.”
“여보, 아직 너무 이르잖소. 다음에.......”
“그럴까? 그럼 편하게 아줌마라고 부르렴~”
낯선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붉은색의 반짝이는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클로즈업되어, 그 사이로 가지런한 흰 이가 보였다. 소녀의 볼을 쓰다듬는 손가락엔 붉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뾰족하게 나있었다. 할퀴면 피가 날 것 같은 손톱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의 다리는 선이 가늘고 고왔다. 살색 스타킹을 신었는지 매끈하게 빛이 반사되었다.
소녀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엄마는 저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존댓말을 썼다. 엄마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늘 입술이 연분홍이라 예뻤다.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다. 치마도 거의 입지 않고, 대부분 바지를 입었다. 가끔 입어도 롱스커트를 입었지, 결코 미니스커트를 입진 않았다.
아빠는 낯선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아빠가 출근할 때, 새엄마가 볼에 뽀뽀를 해주었는데, 그 때마다 아빠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소녀는 아빠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새엄마는 조용하고 얌전한 소녀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아침마다 소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핀을 꽂아주었다. 소녀의 손톱에도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다. 새엄마와는 달리 분홍색의 매니큐어였다. 엄마는 매니큐어는커녕 소녀가 하고 싶던 머리 염색도 해주지 않았다. 어린애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고, 혼나기까지 했다. 새엄마에게 말하면 아마 염색도 시켜줄 것 같았지만, 소녀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엄마는 주말이 되면 다양한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바움쿠헨, 초콜릿 비스코티, 가토오쇼콜라 등 소녀가 이름도 처음 들어본 것들도 많았다. 처음엔 안 먹으려고 했지만, 그 달콤한 향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 먹게 되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새엄마가 만든 쿠키를 학교에 가져가면, 소녀는 금방 인기인이 되었다. 아이들은 소녀의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너희 엄마 솜씨가 대단하다’, ‘우리 엄마도 너희 엄마 같았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해서 소녀는 조금 혼란스러워져,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엄마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소녀를 아예 잊은 걸지도 모른다. 소녀의 책상 위엔 아직도 엄마와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액자 속에서 웃고 있었다.
5-1. 문지기
소녀는 낮잠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사이로 한 동굴이 보인다. 소녀는 호기심이 동해 동굴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선다. 한참을 가도 회색의 바위만 나올 뿐이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왔지만, 어디에서 물이 흐르는건지 소녀가 있는 곳에선 확인이 불가능하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서늘한 공기때문에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소녀는 조금 무서워진다. 괜히 들어왔나, 발길을 돌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슬며시 잡는다.
"히익!"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소녀의 눈이 더욱 커진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리봐도 목욕탕 전신 거울에서나 보던 자기 자신이 틀림없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늘 조용하고 약간 우울함마저 배어있는 표정의 소녀와는 달리, 눈 앞에 나타난 소녀와 꼭 닮은 정체불명의 아이는 방긋방긋 활기찬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었다.
소녀는 한 손을 들어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만져본다. 체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환상은 아니다.
"넌, 누, 누구야?"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난, 도플갱어. 너의 도플갱어."
도플갱어(Doppelganger).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소녀는 언뜻 들었던,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소리를 기억해내곤, 도플갱어의 뺨에 닿아있는 자신의 손을 재빨리 떼어낸다. 어깨가 살짝 떨리고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제 와서 보이는 거지만, 도플갱어의 뒤로는 커다란 돌문이 있다. 가운데가 자물쇠로 잠겨져 있고, 자물쇠 양 옆엔 조각이 새겨져 있다.
"난 널 해치지 않아."
문득 도플갱어가,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거울을 보는 것 같지만, 자신과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도플갱어를 보니 소름이 쫙 끼친다.
"무슨 소리야."
"난 널 해치지 않는다구. 나는 너에게서 나온 하나의 파편. 그러니까, 내가 없어지길 바란다면 날 다시 가져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나를 가져가는 것? 간단해. 네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빙글, 도플갱어는 춤추듯이 스텝을 밟으며 몸을 돌린다. 왜인지 익숙한 멜로디의 콧노래를 부르며 소녀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는다. 겨울의 얼어버린 연못 옆에서 피어난 수선화처럼, 강인하고 아련한 순수함을 간직한 미소였다.
소녀는 왠지 쑥스러워져, 피식, 작게 입 꼬리만 올려 웃는다. 도플갱어는 그런 소녀를 재촉하듯, 폴짝 폴짝 뛰어다닌다. 돌바닥 위를 리드미컬하게 뛰면서 콧노래가 아닌 가사가 담긴 노래를 흥얼거린다.
"뭐하는 거야. 아하하핫!"
가슴 속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소녀가 깔깔거린다. 도플갱어는 그제야 만족하며 노래를 멈추고 상냥하게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에게서 태어난 분신, 도플갱어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모습의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앞으로는 잃어버리지 마. 웃음을. 행복을. 노래를."
어두운 동굴 속, 유일하게 빛나던 도플갱어는 스르륵 연기처럼 몸이 흩어지며 그 존재를 감추었다.
소녀는 무심결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본다.
5-2. 악몽
“애리는 어떻게 하려고요!”
“애리는 내가 키울 테니 당신은 그 좋아하는 공부나 계속 해! 언제까지 살림을 팽개쳐둘 셈이야?”
“내가 언제 살림을 내팽겨쳤죠? 내 직업 모르고 결혼한 거 아니잖아요? 이번에 잘 하면 당신이랑 애리 둘 다 같이 미국으로 갈지 모르는데, 왜 그래요, 대체?”
“그 놈의 미국! 미국 간다고 당신이 달라져? 한 달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 하는 게 어디의 엄마냐고!”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뒤틀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짭짤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부모님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방 안은 이렇게나 고요한데, 방 밖에선 아빠의 우렁찬 고함 소리와 엄마의 침착하지만 새된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뤄 귓가에 파고들었다. 소녀는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줬던 곰돌이를 꼭 껴안으며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는데도 부모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데, 이런 악몽은 깨고 싶은데, 소녀는 울먹이면서 침대 안에서 몸을 떨었다. 가슴팍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것처럼 무언가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6-1. 바다에서의 재회
자물쇠 양 옆에는 선녀옷을 입은 여자와 소녀를 닮은 작은 아이가 새겨져 있다. 소녀는 돌문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물쇠에 손을 갖다 댄다. 차가운 쇠의 느낌이 전해져오는 자물쇠의 가운데 구멍에 눈을 가까이 가져가본다. 반대편에 무엇이 있을 것만 같다.
그 순간, 자물쇠의 구멍, 즉 돌문의 반대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소녀의 눈을 따갑게 적신다.
소녀가 눈을 뜨자 그 곳은 새파란 물속이었다. 반짝이는 비늘의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니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등을 만져보니 날개는 사라져 있고, 대신 목 근처에 아가미 같은 것이 만져진다. 규칙적으로 팔락이는 느낌이 심장의 고동 소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숨을 쉴 수 있는 건가.’
소녀는 쉽게 납득하며, 수영 교실에서 배운 대로 팔 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가본다. 물살을 가르는 손발이 몹시 가볍다. 수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공중을 나는 느낌이다. 소녀가 앞으로 나아가자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다. 소녀는 ‘고마워.’라고 말을 하려 하지만 보글거리며 물방울만 피어오른다. 물을 마셔도 목구멍으로 넘기는 느낌이 들지 않을뿐더러, 혀끝으로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다. 혀도 물고기처럼 변했을지도 모르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불안한 듯, 혀로 입 안을 훑어본다. 혹시 정말로 물고기처럼 이빨도 없어졌을까 해서. 하지만 이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서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보글보글. 한숨이 물방울로 피어오른다.
멀리서 성이 보인다. 서양식 성이 아니라 동양식의 성, 이를테면 동화책에서 본 용궁과 같은 모습이다. 한옥보다는 일본의 성이나 중국의 성을 닮은, 큰 건축물이다. 소녀는 용궁에 들어간다. 쭉 뻗은 대로를 지나, 무언가에 이끌리듯 들어선 작은 문 안에는 정원이 있었다.
"우와, 멋있다. 어라, 목소리가 나오네!"
물방울이 보글거리면서 나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현실감이 없다. 양쪽 귀를 막았을 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인 것이다.
물속인데도 예쁘게 꾸며진 나무와 꽃, 잔디가 신기해 이리저리 둘러본다. 물고기가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광경은 흡사 꿈 속 같다.
“애리야?”
“엄마? 진짜 엄마다! 우와, 그 옷은 뭐에요?”
소녀의 엄마는 하늘하늘한 선녀옷으로 보이는 중국 전통 복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동양의 전설 속의 공주 같다. 평소 쓰고 있던 안경은 그대로 쓰고 있는데도, 복장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녀는 신이 나 달려가서, 엄마 품에 안긴다. 오랜만에 안겨보는 엄마 품은 무척이나 따스하다. 비단의 감촉이 볼에 느껴져 기분까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애리야, 엄마는 늘 네 곁에 있단다. 알고 있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오랜만에 들어보는 엄마의 목소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닮아 부드럽고 상냥해서, 녹아버릴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은 전부가 아니다, 소녀는 되뇐다.
"정말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그걸 잊지 마려무나.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엄마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테니......."
엄마는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새엄마가 핀을 꽂아줬지만 약간 흐트러진 소녀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그런 행동은 새엄마가 생각나게 한다. 아니, 새엄마가 소녀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줄 때마다 소녀는 엄마를 생각한다.
소녀는 조금 혼란스러워, 인상을 찡그리고 엄마를 올려다본다.
"우리 애리, 웃어야지."
엄마가 손가락을 소녀의 입가 양 끝에 대어, 살짝 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 소녀는 헤실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 착하지. 엄마가 항상 애리 곁에 있을테니까, 웃어야 예쁘지?"
"응. 헤헤."
엄마는 소녀의 손을 잡고, 돌고래가 이끄는 연꽃 모양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주었다. 소녀는 엄마와 헤어지는 게 몹시 아쉬웠지만, 지금 헤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차 안에서 고이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멀어지고 있다. 동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에, 소녀는 한참동안 눈을 굴렸다.
6-2. 어른과 아이의 차이
엄마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무슨무슨 박사인가, 소녀에겐 말만 들어도 대단할 것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소녀는 잘 알지 못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다.
소녀가 학교를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집에서 소녀와 이야기하거나 놀아 주는 건 주로 아빠였는데, 아빠는 요리도 무척 잘 하고, 청소나 빨래도 곧잘 하였다. 소녀가 학교 숙제 때문에 끙끙 앓고 있으면 능숙하게 도와주기도 하였다. 밤늦게까지 아빠와 숙제를 하고 나면, 피곤하긴 했지만 왠지 즐거웠다.
엄마는 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만큼 만나면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동화책도 읽어주고 영어도 가르쳐주었다. 소녀에게 영어는 정말 어려워서 배우기 싫었지만, 동화책 읽어주는 것만은 정말 좋았다. 엄마의 곧은 발음으로 듣는 동화 이야기는 귓가에 속속 박혀서 머릿속에 고스란히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동화를 들려준 날 밤에는, 꼭 꿈에 그 동화 이야기가 나와서 재밌었다. 아침에 깼을 땐 제대로 기억해낼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동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 나, 요정 봤어."
"그런 건 없단다. 잘못 본거야. 벌레일 수도 있고."
엄마는 요정뿐만이 아니라 도깨비나 유령도 실제로 없다고 말했지만, 소녀는 엄마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다. 아무리 똑똑한 엄마라고 해도, 어른들이 흔히 그렇듯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꽃 주변에서 날고 있는 건 분명 벌레가 아니라 요정이었다. 그것은 몇 초 만에 소녀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사람의 몸에 투명한 잠자리 날개가 달린, 틀림없는 요정의 모습이었다. 분명히 봤는데도, 엄마는 없다고 했다. 다른 어른들에게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소녀는 일기장에 자신이 본 요정의 모습을 그려 넣다가 잠이 들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하루였다.
7. 껍질을 깨다
수면 위로 박차고 올라가자, 등에 다시 날개가 솟는다. 새파란 창공은 갑작스레 뛰어드는 소녀를 시원스레 맞이한다. 청명한 바람이 소녀의 피부 속에 들어가 혈관까지 스며든다.
이대로 줄곧 올라가면, 아마 이 곳을 벗어나는 출구가 보일 것이다. 왜인지 몰라도, 소녀는 저 높이 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가서, 나가면, 나는.......'
소녀는 눈을 감고, 턱을 높이 들고 날개짓을 한다. 위로, 위로 올라가서, 다시 태어나는 거다.
알에서 깨어나, 이제는 정말로 날개가 있으니, 이곳을 벗어나 좀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런 강한 믿음이, 용기와 함께 소녀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8. 변화
새하얀 불빛이 있다. 새하얀 천장이 있다. 새하얀 벽이 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있다. 새하얀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있다. 온통 새하얀 광경에, 녹아버릴 것만 같다고, 소녀는 생각한다.
“정신이 드니?”
약간은 울음 섞인 낯익은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새엄마가 소녀를 보고 있다. 전에 비해 많이 마른 얼굴엔, 화장기가 전혀 없다. 입술엔 립스틱도 바르지 않았다. 소녀는 힘겹게 입가를 끌어 당겨 미소를 짓는다.
소녀는 새엄마를 빤히 보다가 위화감을 느낀다. 저렇게까지 마를 수가 있을 정도로, 새엄마의 얼굴과 몸은 길쭉하다. 예전에 놀이공원에서 본, 마술 거울에서 본 것처럼 이상한 모습이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의사와 간호사가 걱정스레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있다. 그들의 말에 집중할 수 없는 건, 그들의 모습 때문이다. 흰 옷을 입은 그들은 천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툭 퍼진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살이 찐 천사 같다. 기이할 정도로 몸통은 둥그렇게 살이 쪄 있는데, 팔 다리는 가냘프다.
“꺄하하하하하!”
“애리야?”
“푸훗......! 이상해. 의사 선생님하고 간호사 언니, 너무 이상해.”
까르르 웃는 소녀의 모습은, 이전의 우울하고 소극적이던 모습과는 무척 대조되었다. 하지만, 소녀가 하는 소리는 어딘가 겉돌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데도, 저 먼 곳으로 가버린 불안한 기분에 새엄마는 어쩐지 매우 슬퍼졌다.
1인실의 조용한 병실에서, 소녀의 웃음소리만이 홀로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이후에도 종종 원인불명의 환각 증세를 보였다. 정신과 의사들이 간신히 알아낸 소녀의 병명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s syndrome)’으로,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환각 증세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정작 특이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소녀는 오히려 화재 사고 전보다 더 밝은 성격으로 변해, 웃음을 잃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엄마에게도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새엄마라고 불렀다. 학교에서도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활발해진 소녀는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공부도 착실히 해 선생님의 사랑도 받았다.
소녀는 확실히 변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화재 사고 이후, 갑작스런 변화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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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르만 헤세,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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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론 1차 과제로 냈던 글입니다만... 어휴. 너무 부끄럽네요. 뭔가 쓰고자 했던 게 쓰다보니 바뀌고...
마감날에 쫓겨 결말 부분이 좀 허술한 감이 있으나 나름 열심히 썼... 달까. 결말을 수정하고 싶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칭찬/조언/비평 어떤 말이든 환영합니다. 굽신굽신.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지만...
쓴다는 건 역시 즐겁네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1)
1-1. 뉴욕
눈을 뜬 곳은 이국의 낯선 도시. 길게 늘어진 회색 빌딩들과 가지런히 심어 놓은 가로수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익숙한 것이지만, 소녀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예를 들면 서울-와는 분명 다르다. 사람들의 머리색은, 소녀에게 익숙한 흑발이 아니라 TV 속에서만 보던 금발이 많다. 염색이 아닌 천연의 갈색이나 주황색의 머리색도 보인다. 한국이 아닌 건 확실하다.
온통 영어로 써 있는, 전혀 읽을 수 없는 간판의 가게들과, 소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 속에 묻혀 소녀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어디로 가야하나,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타박타박, 구두의 굽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아무도 없는 학교의 복도를 걸을 때처럼, 타박타박, 보도를 걷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소녀는 무섭다. 그래서 더욱 속력을 높여 걷는다.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아예 달려버린다. 온 힘을 다해 뛰어가자, 눈앞이 탁 트인다. 광장이다. 시민들의 휴식처인 듯 빌딩숲 가운데에 나무와 잔디가 잘 꾸며져 있다. 천사상이 세워진 분수도 보인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도시.
‘미국....... 엄마가 있는 곳.......’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유 없는 강렬한 확신이 소녀의 뇌리를 스친다. 소녀의 얼굴에 차츰 소녀다운, 나비 같은 화색이 돈다.
1-2. 병원
“선생님, 애 상태는 좀 어떤가요.”
흰 가운의 의사는 그저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외상은 그리 깊지 않은데, 어째서 아직까지 의식불명인지는 저희도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아직도 누워있는 소녀를 보며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여자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금세 방을 나갔다.
여자는 의사가 나간 문을 멀거니 바라보다, 다시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굳게 닫힌 창문 밖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6월에 접어들어, 노을빛은 몹시 나른한 기색을 띠고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풀렸다. 여자가 멍하니 시선을 옮긴 창 밖에선 어린아이와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나무 그늘에서 바람을 쐬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창문이 닫혀 있는 병실 안은, 에어컨 탓으로 적당히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왠지 몸이 답답하고 열이 났다. 여자는 문득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소녀의 옆에 가까이 의자를 끌어 당겨 그 조그만 손을 꼭 잡았다.
작고 통통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여자는 그녀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 아이에게 아무 이상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앞으로는 혼자 두지 않을게. 미안하다, 애리야.......’
똑같이 눈을 감은 소녀의 얼굴과 여자의 얼굴은 전혀 닮은 데라곤 없었다.
2-1. 하늘
하늘 위로 하얀 새떼가 지나간다.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녀의 등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 흰, 비둘기를 닮은 날개다. 소녀는 등어리에 신경을 집중하여 날개를 퍼덕여본다. 오오, 움직인다. 소녀가 달음박질치자 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빌딩 벽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위로, 위로, 계속 올라간다. 바람마저 소녀의 뜻대로 부는 것 같다.
마침내 사람이 개미같이 보이는 높은 상공으로 날아오르는데 성공한다. 더욱 더 높이 치솟아, 이젠 도시조차 장난감처럼 보이는 하늘을 날게 된다. 흰 구름 사이 시원스레 하강과 상승을 반복한다. 새벽에 마시는 공기보다 신선한 공기가 소녀의 피를 깨끗하게 씻겨준다. 머리가 개운해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아무런 장애가 없는 공중을 순회한다.
소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에서 하늘을 본다. 아래고 위고 온통 푸르다. 이렇게 푸르른 것이 땅 위에 존재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모든 것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가, 하늘에 있다. 쓸쓸하기조차 한 자유로움이 그 곳에 있다.
2-2. 화재, 그리고 추락
피부가 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소녀는 방을 나섰다. 손 안에는 엄마와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꼭 쥐고서, 한발 한발을 내딛었다. 현관문 쪽엔 불길이 거세서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신선한 공기를 찾아 베란다 쪽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갔다. 숨쉬기가 힘들어서 걸어가는 것도 많은 기력을 요구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외출 중이어서, 집에는 소녀 혼자뿐이었다. 불이 왜 났는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소녀는 벽을 짚어 걸음을 옮겼다. 시간 감각조차 잃어버릴 듯 강렬한 화기(火氣)를 뚫고, 겨우 베란다의 알루미늄 셔터를 열었다. 컥컥거리며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뜨겁게 달라올라 있었다. 베란다 아래를 무심코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위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이 점점 거세졌다.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의 얼굴은 이미 땀과 검댕이로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다시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더 늘어나있고,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해있었다.
영원 같았던 몇 초 후에, 소녀는 5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소녀는 액자를 두 손 안에 껴안은 채로 정신을 잃었다.
3-1. 인어
도시의 상공을 순회하던 한 마리의 작은 새, 혹은 한 명의 작은 천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자신을 계속 옭아매던 무언가에서 벗어난 기분에, 페퍼민트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처럼 온 몸이 상쾌하고, 근질근질하다.
날개를 사용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소녀는 멀리 멀리 날아가다, 산속의 폭포를 발견한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다. 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리는 폭포에 가까이 다가가니, 우렁찬 소리가 귀를 때린다. 쏴아아아아-쉬지 않고 떨어지는 물의 압력에, 흰 물보라가 하얗게 일어나 장관을 이룬다. 소녀가 날개를 접고 바위에 내려선다. 날개에 튀기는 물방울들 때문에 반사적으로 날개가 부들, 떨려 깃털이 떨어진다. 깃털이 수면 위에 떠다닌다. 폭포에서 이어지는 강물의 수면 위로 두둥실 떨어진 깃털이 흘러간다. 누군가의 손이 수면 위로 나타나더니 깃털을 잡는다. 조금 푸른빛을 띤, 가느다란 손가락이다. 촤아악, 물결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한 명의 인어(mermaid)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자의 몸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와 지느러미인, 전형적인 인어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엔 소녀의 날개 깃털이 쥐어져 있다. 소중한 듯 그것을 감싸 쥐고 소녀에게 나아간다. 소녀는 물을 양 손에 머금어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가 다가오는 걸 소리를 통해 알았다.
“누구세요? 와, 인어다! 안녕하세요!”
“후후, 안녕하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꼬마 아가씨.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어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에, 부탁이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대체 무엇일까?
인어의 눈동자 위엔 눈썹 대신 푸른 비늘이 돋아나있고, 머리카락 역시 푸른색으로, 매우 길게 길러 물 위로 흩어져 물결에 따라 넘실넘실 춤추고 있다. 인어의 눈동자는 흰 자위 대신 검은자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 빛나고 있는, 동공이 마름모 모양을 하고 있다. 소녀는 그 독특하고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본다. 보고 있자니 마치 고요한 새벽녘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저 폭포 위로 올라가, 상류로 가면 커다란 하마가 살고 있을 거예요. 그 하마를 부디 없애주세요. 아직 물을 안 마셨군요. 한 번 살짝 맛을 봐보세요. 틀림없이 이상한 맛이 날거예요.”
소녀는 반신반의하며 양 손에 물을 떠서 혀를 낼름 대어본다. 그러자 화악, 하고 구역질나는 맛이 혀끝을 쓰라리게 했다.
“그게 다 하마의 배설물 때문이에요. 우리들의 피해가 막심하답니다. 부탁드려요.”
“하지만 어떻게......”
인어의 옆에 또 다른 인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올려 묶은 그녀의 눈동자는 검은 자위에 노란색의 홍채를 띠고 있다. 그녀는 한 자루의 단검을 공손하게 떠받쳐 소녀에게 내민다. 물빛을 띤 검신은 소녀가 아는 금속 중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아 있었다. 고요히, 은은한 빛을 내뿜는 그것을 쥐고 소녀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3-2. 부재
어느 날은, 마음잡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엄마는 귀신이 잡아가기라도 했는지 머리카락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소녀도 사실은 아무리 찾아도 엄마를 찾을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엄마는, 먼 곳에 간단다, 아리야. 미국이라는 곳이야. 하지만 아리가 어른이 된 다음엔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때까지 건강하고, 아빠 말, 새엄마 말 잘 들을거지? 자, 약속!”
엄마가 슬픈 얼굴로 그런 소리를 했었던 것이, 분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꽉 찍었던 순간의 온기도 기억하고 있다. 미국에 간 엄마를 동네에서 찾아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등굣길에는 엄마가 늘 반찬거리를 사던 슈퍼에 들려보고, 하굣길에는 엄마가 자주 가던 한식집에도 들려봤으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낙심하며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울었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어느샌가 다가와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가 이제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저 울기만 했다.
“엄마... 엄마...”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건 당연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어서 어른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4-1. 용기
폭포의 위쪽, 강의 상류로 날개를 퍼덕이며 올라가본다. 회색빛의 단단한 피부의 하마가 보인다. 3미터는 넘을 법한 육중한 몸을 물속에 반쯤 담근 채 똥을 싸고 있었다. 인어가 건넨 단검을 쥐고 하마에게 다가간다. 하마가 금속성 울음소리를 내며-필시 그 하마는 소녀가 아는 ‘하마’가 아닌 ‘하마’인 것이다- 소녀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린다. 소녀는 힘껏 날개짓을 해 하마의 머리 위로 올라가 단검으로 정수리를 내리찍는다. 그러자 하마는 더욱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간다. 하마가 싼 똥들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흙탕물처럼 더럽던 강의 상류가 차츰 깨끗해진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은 물방울로 변하더니, 소녀의 가슴 속으로 쑥 하고 들어간다. 가슴 속이 차가워지면서, 동시에 뜨거워진다.
폭 포 쪽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위로 날아올라, 폭포를 내려다보니 수많은 인어들이 수면 위로 몸을 드러내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청아하고 맑은, 물결과도 같은 목소리다. 오랜 옛날 바다의 인어들의 노래는 너무나 아름다워 배를 타고 있던 선원들이 그 노래를 좀 더 듣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저절로 믿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다.
“꼬마 아가씨, 슬픔을 잊어요. 고독이 그대를 쫓아오더라도. 언제나 그대를 괴롭히는 건 그대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답니다.
꼬마 아가씨, 웃음을 잃지 말아요. 불행이 그대를 쫓아오더라도. 언제나 그대의 곁에는 그대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노래를 들으며 소녀는 서서히 졸리기 시작해, 날개를 접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 잠을 청했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서 그리운 향내가 난다.
"엄마......."
4-2. 새엄마
부모님이 이혼한지 2년 뒤, 소녀도 11살이 되었을 무렵, 아빠가 낯선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다. 우연히 봤던 아빠의 지갑에 넣어져 있던 사진의 그 여자였다.
“엄마는?”
“그래, 내가 이제부터 네 엄마란다. 어디 한 번 불러보렴.”
“여보, 아직 너무 이르잖소. 다음에.......”
“그럴까? 그럼 편하게 아줌마라고 부르렴~”
낯선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붉은색의 반짝이는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클로즈업되어, 그 사이로 가지런한 흰 이가 보였다. 소녀의 볼을 쓰다듬는 손가락엔 붉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뾰족하게 나있었다. 할퀴면 피가 날 것 같은 손톱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의 다리는 선이 가늘고 고왔다. 살색 스타킹을 신었는지 매끈하게 빛이 반사되었다.
소녀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엄마는 저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존댓말을 썼다. 엄마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늘 입술이 연분홍이라 예뻤다.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다. 치마도 거의 입지 않고, 대부분 바지를 입었다. 가끔 입어도 롱스커트를 입었지, 결코 미니스커트를 입진 않았다.
아빠는 낯선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아빠가 출근할 때, 새엄마가 볼에 뽀뽀를 해주었는데, 그 때마다 아빠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소녀는 아빠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새엄마는 조용하고 얌전한 소녀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아침마다 소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핀을 꽂아주었다. 소녀의 손톱에도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다. 새엄마와는 달리 분홍색의 매니큐어였다. 엄마는 매니큐어는커녕 소녀가 하고 싶던 머리 염색도 해주지 않았다. 어린애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고, 혼나기까지 했다. 새엄마에게 말하면 아마 염색도 시켜줄 것 같았지만, 소녀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엄마는 주말이 되면 다양한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바움쿠헨, 초콜릿 비스코티, 가토오쇼콜라 등 소녀가 이름도 처음 들어본 것들도 많았다. 처음엔 안 먹으려고 했지만, 그 달콤한 향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 먹게 되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새엄마가 만든 쿠키를 학교에 가져가면, 소녀는 금방 인기인이 되었다. 아이들은 소녀의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너희 엄마 솜씨가 대단하다’, ‘우리 엄마도 너희 엄마 같았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해서 소녀는 조금 혼란스러워져,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엄마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소녀를 아예 잊은 걸지도 모른다. 소녀의 책상 위엔 아직도 엄마와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액자 속에서 웃고 있었다.
5-1. 문지기
소녀는 낮잠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사이로 한 동굴이 보인다. 소녀는 호기심이 동해 동굴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선다. 한참을 가도 회색의 바위만 나올 뿐이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왔지만, 어디에서 물이 흐르는건지 소녀가 있는 곳에선 확인이 불가능하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서늘한 공기때문에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소녀는 조금 무서워진다. 괜히 들어왔나, 발길을 돌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슬며시 잡는다.
"히익!"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소녀의 눈이 더욱 커진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리봐도 목욕탕 전신 거울에서나 보던 자기 자신이 틀림없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늘 조용하고 약간 우울함마저 배어있는 표정의 소녀와는 달리, 눈 앞에 나타난 소녀와 꼭 닮은 정체불명의 아이는 방긋방긋 활기찬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었다.
소녀는 한 손을 들어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만져본다. 체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환상은 아니다.
"넌, 누, 누구야?"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난, 도플갱어. 너의 도플갱어."
도플갱어(Doppelganger).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소녀는 언뜻 들었던,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소리를 기억해내곤, 도플갱어의 뺨에 닿아있는 자신의 손을 재빨리 떼어낸다. 어깨가 살짝 떨리고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제 와서 보이는 거지만, 도플갱어의 뒤로는 커다란 돌문이 있다. 가운데가 자물쇠로 잠겨져 있고, 자물쇠 양 옆엔 조각이 새겨져 있다.
"난 널 해치지 않아."
문득 도플갱어가,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거울을 보는 것 같지만, 자신과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도플갱어를 보니 소름이 쫙 끼친다.
"무슨 소리야."
"난 널 해치지 않는다구. 나는 너에게서 나온 하나의 파편. 그러니까, 내가 없어지길 바란다면 날 다시 가져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나를 가져가는 것? 간단해. 네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빙글, 도플갱어는 춤추듯이 스텝을 밟으며 몸을 돌린다. 왜인지 익숙한 멜로디의 콧노래를 부르며 소녀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는다. 겨울의 얼어버린 연못 옆에서 피어난 수선화처럼, 강인하고 아련한 순수함을 간직한 미소였다.
소녀는 왠지 쑥스러워져, 피식, 작게 입 꼬리만 올려 웃는다. 도플갱어는 그런 소녀를 재촉하듯, 폴짝 폴짝 뛰어다닌다. 돌바닥 위를 리드미컬하게 뛰면서 콧노래가 아닌 가사가 담긴 노래를 흥얼거린다.
"뭐하는 거야. 아하하핫!"
가슴 속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소녀가 깔깔거린다. 도플갱어는 그제야 만족하며 노래를 멈추고 상냥하게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에게서 태어난 분신, 도플갱어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모습의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앞으로는 잃어버리지 마. 웃음을. 행복을. 노래를."
어두운 동굴 속, 유일하게 빛나던 도플갱어는 스르륵 연기처럼 몸이 흩어지며 그 존재를 감추었다.
소녀는 무심결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본다.
5-2. 악몽
“애리는 어떻게 하려고요!”
“애리는 내가 키울 테니 당신은 그 좋아하는 공부나 계속 해! 언제까지 살림을 팽개쳐둘 셈이야?”
“내가 언제 살림을 내팽겨쳤죠? 내 직업 모르고 결혼한 거 아니잖아요? 이번에 잘 하면 당신이랑 애리 둘 다 같이 미국으로 갈지 모르는데, 왜 그래요, 대체?”
“그 놈의 미국! 미국 간다고 당신이 달라져? 한 달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 하는 게 어디의 엄마냐고!”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뒤틀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짭짤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부모님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방 안은 이렇게나 고요한데, 방 밖에선 아빠의 우렁찬 고함 소리와 엄마의 침착하지만 새된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뤄 귓가에 파고들었다. 소녀는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줬던 곰돌이를 꼭 껴안으며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는데도 부모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데, 이런 악몽은 깨고 싶은데, 소녀는 울먹이면서 침대 안에서 몸을 떨었다. 가슴팍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것처럼 무언가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6-1. 바다에서의 재회
자물쇠 양 옆에는 선녀옷을 입은 여자와 소녀를 닮은 작은 아이가 새겨져 있다. 소녀는 돌문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물쇠에 손을 갖다 댄다. 차가운 쇠의 느낌이 전해져오는 자물쇠의 가운데 구멍에 눈을 가까이 가져가본다. 반대편에 무엇이 있을 것만 같다.
그 순간, 자물쇠의 구멍, 즉 돌문의 반대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소녀의 눈을 따갑게 적신다.
소녀가 눈을 뜨자 그 곳은 새파란 물속이었다. 반짝이는 비늘의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니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등을 만져보니 날개는 사라져 있고, 대신 목 근처에 아가미 같은 것이 만져진다. 규칙적으로 팔락이는 느낌이 심장의 고동 소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숨을 쉴 수 있는 건가.’
소녀는 쉽게 납득하며, 수영 교실에서 배운 대로 팔 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가본다. 물살을 가르는 손발이 몹시 가볍다. 수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공중을 나는 느낌이다. 소녀가 앞으로 나아가자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다. 소녀는 ‘고마워.’라고 말을 하려 하지만 보글거리며 물방울만 피어오른다. 물을 마셔도 목구멍으로 넘기는 느낌이 들지 않을뿐더러, 혀끝으로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다. 혀도 물고기처럼 변했을지도 모르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불안한 듯, 혀로 입 안을 훑어본다. 혹시 정말로 물고기처럼 이빨도 없어졌을까 해서. 하지만 이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서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보글보글. 한숨이 물방울로 피어오른다.
멀리서 성이 보인다. 서양식 성이 아니라 동양식의 성, 이를테면 동화책에서 본 용궁과 같은 모습이다. 한옥보다는 일본의 성이나 중국의 성을 닮은, 큰 건축물이다. 소녀는 용궁에 들어간다. 쭉 뻗은 대로를 지나, 무언가에 이끌리듯 들어선 작은 문 안에는 정원이 있었다.
"우와, 멋있다. 어라, 목소리가 나오네!"
물방울이 보글거리면서 나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현실감이 없다. 양쪽 귀를 막았을 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인 것이다.
물속인데도 예쁘게 꾸며진 나무와 꽃, 잔디가 신기해 이리저리 둘러본다. 물고기가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광경은 흡사 꿈 속 같다.
“애리야?”
“엄마? 진짜 엄마다! 우와, 그 옷은 뭐에요?”
소녀의 엄마는 하늘하늘한 선녀옷으로 보이는 중국 전통 복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동양의 전설 속의 공주 같다. 평소 쓰고 있던 안경은 그대로 쓰고 있는데도, 복장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녀는 신이 나 달려가서, 엄마 품에 안긴다. 오랜만에 안겨보는 엄마 품은 무척이나 따스하다. 비단의 감촉이 볼에 느껴져 기분까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애리야, 엄마는 늘 네 곁에 있단다. 알고 있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오랜만에 들어보는 엄마의 목소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닮아 부드럽고 상냥해서, 녹아버릴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은 전부가 아니다, 소녀는 되뇐다.
"정말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그걸 잊지 마려무나.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엄마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테니......."
엄마는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새엄마가 핀을 꽂아줬지만 약간 흐트러진 소녀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그런 행동은 새엄마가 생각나게 한다. 아니, 새엄마가 소녀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줄 때마다 소녀는 엄마를 생각한다.
소녀는 조금 혼란스러워, 인상을 찡그리고 엄마를 올려다본다.
"우리 애리, 웃어야지."
엄마가 손가락을 소녀의 입가 양 끝에 대어, 살짝 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 소녀는 헤실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 착하지. 엄마가 항상 애리 곁에 있을테니까, 웃어야 예쁘지?"
"응. 헤헤."
엄마는 소녀의 손을 잡고, 돌고래가 이끄는 연꽃 모양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주었다. 소녀는 엄마와 헤어지는 게 몹시 아쉬웠지만, 지금 헤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차 안에서 고이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멀어지고 있다. 동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에, 소녀는 한참동안 눈을 굴렸다.
6-2. 어른과 아이의 차이
엄마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무슨무슨 박사인가, 소녀에겐 말만 들어도 대단할 것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소녀는 잘 알지 못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다.
소녀가 학교를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집에서 소녀와 이야기하거나 놀아 주는 건 주로 아빠였는데, 아빠는 요리도 무척 잘 하고, 청소나 빨래도 곧잘 하였다. 소녀가 학교 숙제 때문에 끙끙 앓고 있으면 능숙하게 도와주기도 하였다. 밤늦게까지 아빠와 숙제를 하고 나면, 피곤하긴 했지만 왠지 즐거웠다.
엄마는 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만큼 만나면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동화책도 읽어주고 영어도 가르쳐주었다. 소녀에게 영어는 정말 어려워서 배우기 싫었지만, 동화책 읽어주는 것만은 정말 좋았다. 엄마의 곧은 발음으로 듣는 동화 이야기는 귓가에 속속 박혀서 머릿속에 고스란히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동화를 들려준 날 밤에는, 꼭 꿈에 그 동화 이야기가 나와서 재밌었다. 아침에 깼을 땐 제대로 기억해낼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동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 나, 요정 봤어."
"그런 건 없단다. 잘못 본거야. 벌레일 수도 있고."
엄마는 요정뿐만이 아니라 도깨비나 유령도 실제로 없다고 말했지만, 소녀는 엄마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다. 아무리 똑똑한 엄마라고 해도, 어른들이 흔히 그렇듯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꽃 주변에서 날고 있는 건 분명 벌레가 아니라 요정이었다. 그것은 몇 초 만에 소녀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사람의 몸에 투명한 잠자리 날개가 달린, 틀림없는 요정의 모습이었다. 분명히 봤는데도, 엄마는 없다고 했다. 다른 어른들에게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소녀는 일기장에 자신이 본 요정의 모습을 그려 넣다가 잠이 들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하루였다.
7. 껍질을 깨다
수면 위로 박차고 올라가자, 등에 다시 날개가 솟는다. 새파란 창공은 갑작스레 뛰어드는 소녀를 시원스레 맞이한다. 청명한 바람이 소녀의 피부 속에 들어가 혈관까지 스며든다.
이대로 줄곧 올라가면, 아마 이 곳을 벗어나는 출구가 보일 것이다. 왜인지 몰라도, 소녀는 저 높이 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가서, 나가면, 나는.......'
소녀는 눈을 감고, 턱을 높이 들고 날개짓을 한다. 위로, 위로 올라가서, 다시 태어나는 거다.
알에서 깨어나, 이제는 정말로 날개가 있으니, 이곳을 벗어나 좀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런 강한 믿음이, 용기와 함께 소녀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8. 변화
새하얀 불빛이 있다. 새하얀 천장이 있다. 새하얀 벽이 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있다. 새하얀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있다. 온통 새하얀 광경에, 녹아버릴 것만 같다고, 소녀는 생각한다.
“정신이 드니?”
약간은 울음 섞인 낯익은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새엄마가 소녀를 보고 있다. 전에 비해 많이 마른 얼굴엔, 화장기가 전혀 없다. 입술엔 립스틱도 바르지 않았다. 소녀는 힘겹게 입가를 끌어 당겨 미소를 짓는다.
소녀는 새엄마를 빤히 보다가 위화감을 느낀다. 저렇게까지 마를 수가 있을 정도로, 새엄마의 얼굴과 몸은 길쭉하다. 예전에 놀이공원에서 본, 마술 거울에서 본 것처럼 이상한 모습이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의사와 간호사가 걱정스레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있다. 그들의 말에 집중할 수 없는 건, 그들의 모습 때문이다. 흰 옷을 입은 그들은 천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툭 퍼진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살이 찐 천사 같다. 기이할 정도로 몸통은 둥그렇게 살이 쪄 있는데, 팔 다리는 가냘프다.
“꺄하하하하하!”
“애리야?”
“푸훗......! 이상해. 의사 선생님하고 간호사 언니, 너무 이상해.”
까르르 웃는 소녀의 모습은, 이전의 우울하고 소극적이던 모습과는 무척 대조되었다. 하지만, 소녀가 하는 소리는 어딘가 겉돌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데도, 저 먼 곳으로 가버린 불안한 기분에 새엄마는 어쩐지 매우 슬퍼졌다.
1인실의 조용한 병실에서, 소녀의 웃음소리만이 홀로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이후에도 종종 원인불명의 환각 증세를 보였다. 정신과 의사들이 간신히 알아낸 소녀의 병명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s syndrome)’으로,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환각 증세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정작 특이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소녀는 오히려 화재 사고 전보다 더 밝은 성격으로 변해, 웃음을 잃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엄마에게도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새엄마라고 불렀다. 학교에서도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활발해진 소녀는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공부도 착실히 해 선생님의 사랑도 받았다.
소녀는 확실히 변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화재 사고 이후, 갑작스런 변화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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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르만 헤세,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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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론 1차 과제로 냈던 글입니다만... 어휴. 너무 부끄럽네요. 뭔가 쓰고자 했던 게 쓰다보니 바뀌고...
마감날에 쫓겨 결말 부분이 좀 허술한 감이 있으나 나름 열심히 썼... 달까. 결말을 수정하고 싶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칭찬/조언/비평 어떤 말이든 환영합니다. 굽신굽신.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지만...
쓴다는 건 역시 즐겁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