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러지 마세요!”

“허허, 좋으면서.”

최 편집장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오른 쪽에 앉은 술집 여종업원의 허벅지를 건드리고 있었다. 명인이 보기에는 그녀는 마치 뱀이 기어올라오는 것처럼 질색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최 편집장은 술을 따라주는 여자를 여럿 불러 각각 제 옆구리에 끼고, 억지로 회식온 직원 사이에 끼워 앉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놀고 싶었으니.... 명인은 그런 꼴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욕설이 밀려 올라왔지만 참아야 했다. 그는 명인의상관이었다.

‘쓰레기군....’

명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쓰레기다. 명인은 최 편집장을 도무지 좋은 낯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편집장에 대한 의견을 명인과 같이 나누면서도 그 앞에서는 같이 웃고 떠들고 할 수 있는 동료들과는 달리 명인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최 편집장에게 있어서도 명인은 눈엣가시였다. 명인이 해온 일이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걸려고 애를 썼다. 명인은 최 편집장의 그런 심술이 있을 때마다 죽이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어떻게든 굳은 얼굴 뒤로 감추어야 했다. 어떠한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성장하면 저린 인간이 되는 걸까? 저 인간도 어렸을 적엔 정의의 사도가 되어 악당을 쳐부수는 것 같은 꿈을 가지고 자랐을까?

술이 몇 순배 더 돌게 되자, 명인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파김치가 되어 회식은 끝났다. 명인은 필름이 끊기게 되기 전에 결국 편집장이 자기가 추근덕대던 여자를 어딘가로 같이 데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 아가씨 역시 싫은 일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겠지. 약자니까. 힘도 돈도 없어 이 일을 하러 나온 것일테니까. 화가 치밀었다. 저건 악이다. 저항하지 못할 약자를 유린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악이다. 그러나 명인에게 어떻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참고 넘어 가는 수 밖에.

다음날,


“다서 써!!”

편집장이 책상을 쾅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명인에게 호통쳤다.

명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명인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작성한 기사글이었는데....화가 났다. 글을 모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명인은 지방 소도시의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는 소언론이었지만, 명인이 다니는 회사는 그런대로 규모에 맞는 독자와 이익을 확보하고 잘 굴러가고 있었다. 명인은 여기서 기사문도 쓰고, 이것저것 잡일하며 월급을 받고 있었다.

“어제 회식 때 먹은 술이 덜 깼어? 그럼 좀 삼가던가 누가 억지로 먹이지 않았잖아! 잘 들어 기사문이라는 건 간결하고 명료해야지 자네처럼 쓸데없는 이말 저말 늘어놓츠면 그게 기사야? 수필이야?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사표나 써와!!!”

“죄송합니다. 다시 써오겠습니다.”

명인은 고개를 숙이고 열불나 미치겠다는 편집장을 뒤로 하고 나오며 ‘웃기네, 난 당신 반도 안먹었다고, 제기랄! 미우면 며느리 발 뒤축이 달걀같아 보인다더니’ 라고 생각했다.

명인은 마음이 답답해서 커피를 뽑으러 복도로 나왔다. 잠시 휴게실에 나와 종이컵 커피를 홀짝이던 중 이대리가 명인 쪽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과 용모가 돋보이는 여성으로, 명인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명인도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 역시 잠시 쉬러 나온 듯했다. 그녀는 명인의 앞에 앉았다. 명인은 기뻤다. 명인은 그녀에게 약간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분나쁜 일이 있으셨나 봐요?”

명인의 안색을 살피다 이대리가 물었다. 명인이 답했다.

“아니, 그냥...편집장님이 제가 쓴 기사문들이 마음에 안들었나 봐요. 싹 다시 써오라는 군요..”

“어머....저런...”

“저한테는 자주 그러는데요. 뭘 하나.... 성희 씨는요? 그러지는 않죠?”

그러자 그녀가 얼굴을 불쾌하다는 듯이 찡그리며 말했다.

“저한테는 그러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으나 명인은 그녀가 생략한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건드리려고 하니 문제지... 편집장은 그런 쪽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윗사람들도 그의 그런 행동을 문제삼고 있지 않았다.

“성희 씨도 나름대로 힘든 점이 있겠죠. 저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겠고... 자, 저는 다시 글을 치러 가볼게요. 야근하기 싫으니까요.”

명인이 커피를 마저 마시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 예 수고하세요.”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서 자기 부서로 발걸음을 떼었다. 명인은 자신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술자리나 이러한 커피 타임과 같은 사소한 자리에서 나누는 별 거 아닌 대화가 전부였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필요했으나 그러한 기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 명인 씨 왔어요? 우선 줄넘기부터 하고, 그 다음 저하고 미트 좀 치시죠.”

“예.”

명인의 위안 중 하나는 몸이 아무리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한 주에 3일 이상은 반드시 찾는 권투 도장이었다. 맘에 들지 않는 사회와 상황에 맞서 견디어 내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무언가 변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적어도 시키는 것은 빠짐없이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서 체력과 권투 실력이 나아지질 않는 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 뿐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다만 억지로 시키는 것을 따라 기계적으로 뛰고 때리고 피할 뿐이었다.

운동이 끝나면 야심한 밤이 된다. 찬 공기에 하늘이 맑고 별들이 많았다. 명인이 하숙하고 있는 집은 마지막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 논두렁 길을 걸어야 했다. 원래 외지고 으슥한데다 가로등 마저도 고장난 것이 많아 위험한 길이었지만 아직 명인은 그런 위험에는 처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명인이 지나온 길은 아니었지만 저 멀리서 거무스레한 몇몇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런 외진 곳에서 괜히 사람이 무리지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득 될 일이 없었건만, 명인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약간 돌아서 갈 요량으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접근하면서 명인은 이상한 감을 느꼈다. 그것은 접근할 수록 확실해졌다. 째진 여자의 비명 소리 풀숲 언저리에서 3명의 서 있는 그림자가 1명의 그림자를 억지로 쓰러뜨리고 있었고, 그 비명이 바람에 실려서 명인의 귀에 까지 닿았다. 명인은 등골이 서늘했다. 보지 않았어야 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설마, 저것이 설마 그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상황이 맞을까? 그럴리가? 그럴리가... 그럴리가..

“까악, 사람 살려!!!”

하지만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명인의 귓가에 파고 들었다. 상황은 명료했다. 그들이 있는 풀숲 언저리 근처에는 가로등이 있어 밝았고 명인이 있는 곳은 어두워 명인 쪽에서는 그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명인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명인은 이러한 고민을 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유린 당하는 약자가 코앞에 있는데, 당연히 구해야 한다. 그러나... 당위와 가능의 문제는 별개다. 저쪽은 셋이나 되고 자신은 혼자다. 거기다 저쪽은 싸움에 능하거나 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뒤를 돌아 이 자리를 뜨려고 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역겨운 상상이고, 몸이 돌아가지도 않았다.

명인은 둘 중에 하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등을 보이거나.

“멈춰라!!”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명인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여보세요! 정신차려요!!”

명인은 자신을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꼈다.

“.....으으...”

그러나 얼얼한 빰과 감각이 이상한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으...으음?”

명인이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달리고 있는 자동차 안이었다. 그는 조수석에 안전벨트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옆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습니까? 그런데 쓰러져 있으면 얼어 죽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이상했다. 명인은 분명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음에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누구십니까?” 여기는 어디?“

“저는 아론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차 안이고. 지나가다가 당신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제 차에 태운 겁니다. 얼굴을 보아 하니 폭행당한 것 같은 흔적이 있어서 그대로 두면 큰일 날 듯 싶었습니다.”

“그..그러고 보니..”

명인은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 기억들이 찬찬히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랬었다. 명인이 고함치며 뛰쳐나가자, 일제히 세명의 남자의 눈이 명인에게 꽂혔다. 다들 키는 멀대 같았지만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냐. 이 새끼는?!”

그들은 서로를 어리둥절하여 쳐다보는 듯햇다. 그러다 그들은 서로 씩 웃더니 한명은 여자를 붙잡아 두고 명인과 가장 가까던 한 녀석이 슬슬 명인 쪽으로 다가오더니,

“집에 가쇼! 앙?!”

명인을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잔 뜩 대비를 하고 잇던 명인은 뒤로 물러나 간신히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인도 피하느라 중심을 잃어 아무것도 하지 못햇다. 다시 원점이었다.

녀석은 두 주먹을 세우고 명인을 얼굴을 노렸다. 명인도 잔뜩 긴장하여 맞섰다.

뻑!!

소리와 함께 명인은 옆구리에 격통을 느꼈다. 상대는 셋이었다. 한명이 여자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있고, 한명이 명인과 마주서 있더라도 1명이 남아있었는데 긴장한 명인은 남은 녀석이 살금살금 돌아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명인은 참지 못하고 옆구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굽혔고 앞에 있던 녀석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명인의 얼굴에 사정없는 주먹을 꽂아넣었다.

결국 명인은 쓰러졌었고, 그 후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무자비한 발길질세례가 이어졌다. 지금도 얼굴을 만지니 얼얼하니 감각이 없고 온몸이 쑤셨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병원에 데려다 드립니까?”

남자가 물었다. 명인은 몸을 확인해 보았다. 얼굴은 얼얼하니 퉁퉁 부은 것 같고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뇨. 병원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명인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냥...조금 쉬고 싶습니다.”

명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앞을 보고 차를 달렸다.

“음... 이대로 집에 데려다 드릴 수도 있지만, 별로 좋지 않은 방법 같군요.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남자가 의외의 제안을 하였다. 명인은 안그래도 빚을 지고 있는 입장이라서, 생면부지의 사람이라 해도 이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기분이 우울하기도 했다.

시간은 새벽 2시가 가까워 중심상가가 아닌 일반 호프집들은 문을 닫아걸었다. 남자는 한참 차를 달려 포차를 하나 찾아내 그리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남자의 차는 명인이 알지 못하는 커다란 고급차였다. 이 남자는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소주를 시키고 소주잔을 기울일뿐, 말이 없었다. 침묵에 못이긴 명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술이 몸 안에 들어가니 뭔가 풀어지는 듯 했다. 명인은 중간중간 남자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상하게 얼굴이 머리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저만 이 꼴이 되어 끝난 거지요. 실수했어요.”

“선생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뒤돌아 도망쳤다면 그야말로 비겁한 도망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잘못한 거에요. 결국 저만 이 꼴이 나지 않았습니까? 녀석들은 그냥 한번 비웃어 주고는 자리를 옮겼겠죠. 하하하. 바보였어요. 제가.”

“선생!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할 것이고, 선생은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것 뿐입니다.”

“희생? 야구에서도 주자가 나갈 수 있어야 희생타가 되는 거지, 둘 다 아웃이면 그건 병살이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만 아프게 되고 해낸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을 희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일로 배운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눈 딱 감고 지나치렵니다. 주제 넘는 짓을 했었어요. 제가.”

“음...참...”

명인이 빈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혀를 찼다.

“그렇다면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 때의 상황에서 그 3명의 불량배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이 있었다면, 당신은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설 것입니까?”

“당연하죠!!”

“어째서죠? 여자를 구해서 사례라도 받으려는 겁니까?”

“아니죠, 대가를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 선생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선생의 정의는 자신이 아프고 아프지 않고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충분한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녀석들이 2명이었고, 제가 얻어터진 대가로 그 여자애라도 무사히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웃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으음...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선생이 그렇게 희생을 치루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 도움받은 사람은 선생 얼굴도 이름도 모를 겁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울하지 않습니다. 귀하께서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의를 이루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고 저는 정의, 아니 눈앞의 부정의를 때려눕힐 수만 있다면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손을 가져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호오, 멋진 말씀이로군요. 마음에 들었습니다.”

남자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명인도 따라 잔을 비웠다.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의 생각은 문제가 있군요.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영웅이 아니고서야 3명과 동시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흔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면 결국 선생은 그런 힘이 없으니 자신은 그럴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 즉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주장이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 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날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탁’하고 명인은 잔을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별 동요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

“무슨 말씀이신지?”

“선생이 과연 정의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분이라면 제가 그에 합당한 아주 좋은 물건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 무슨 물건을?”

“선생이 먼저 제 질문에 확답을 주셔야 합니다. 선생은 과연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예, 나는 스스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물건을 주시겠다는 겁니까?”

“여기서는 곤란하고, 잠시 밖으로 나갑시다.”

남자는 포차에 술값을 치르고 나와 명인을 구석진 골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것은 전자 시계였다.

“이게 뭡니까?”

“어린이들의 로망, 변신 전자 손목시계입니다. 차 보세요.”

명인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시계를 찼다. 손목에 잘 맞았지만 불품없어 보이는 싸구려 전자 시계일 뿐이었다.

“그 시계는 물론 시간도 알려주지만 그 진가를 보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자아, 이렇게 옆돌기를 하면서 외치는 겁니다. XX맨!! 변신!!”

그러면서 남자는 멋들어지게 손짚고 옆돌기를 한다음 두 팔을 벌려 만세 자세를 취했다.  명인은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뭐...뭘 하라구요??”

“이렇게 하는겁니다.”

남자는 양복을 입은채로 다시 땅에 손을 짚고 옆돌기를 했다. 명인은 자신이 술이 취했나 싶어 빰을 꼬집어 보았다. 얼얼하니 제대로 아팠다.

“하면 알게 됩니다. 해보세요.”

남자의 어조는 진지해서 조금이라도 장난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분위기에 일단 남자가 무엇을 시키더라도 해보기로 했다.

“예에.. 알았습니다 해보죠. 그런데 뭐라고 소리치면서 돌라고 하셨죠?”

“남자분이시니까 아무거나 ~맨으로 끝나면 됩니다. 아, 슈퍼맨이나 배트맨, 아쿠아맨 따위는 이미 있는 명칭이니까 다른 걸로 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슈퍼맨이 안된다고요?”

명인의 물음에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하이퍼~맨!! 변신!!”

명인 역시도 남자처럼 능숙하게 옆돌기를 하고 만세 자세를 취했다. 하이퍼맨이란 슈퍼맨이 안된다길래 억지로 지은 이름이다. 명인은 옆돌기를 하면서 내가 이런 유치한 일을 시킨다고 하고 있다니 술에 취해 있나 보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명인은 몸에서 갑자기 몸에서 열과 빛이 나는 것을 느꼈다. 옷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아니 열과 빛이 나면서 옷이 바뀌고 있었다.

“엑?! 이게 뭐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머리를 만져보니 어느새 오토바이 헬멧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명인은 헬멧을 벗어보려 했다.

“으..이익, 이거 왜 안 벗겨져!!!”

“하하하, 영웅은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법이죠. 아마 안 벗어질 겁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곧 시야는 조금 어둡게 보였지만 적응되었다. 명인은 자신의 옷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스판 소재로 몸에 딱 달라붙는 햐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이게 뭡니까?!”

명인이 남자에게 물었다.

“어릴적 후뢰시맨 비디오도 본 적 없으십니까? 그거랑 똑같은 겁니다. 변신한 겁니다. 멋진 모습이군요. 그 시계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을 끌어냅니다. 선생이 변신한 모습은 ‘에스퍼맨’을 닮았군요. 멋지십니다.‘

“아니, 이....이게....”

명인은 당황... 아니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진짜로 술에 취해서 환각을 보고 있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얼굴에 손을 가져가 보니 딱딱한 헬멧의 감촉만이 분명히 느껴질 뿐이었다.

“자, 이제 그러면 영웅답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구하러 가봅시다. 이 모퉁이를 돌아서 쭉 가면 가로등 밑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자아, 어서 시간에 맞추어야 합니다.”

남자가 명인의 손을 잡아 끌고 모퉁이에서 등을 떠밀었다. 명인이 뒤를 돌아보려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뒤를 돌아보시면 안됩니다. 저기 빛이 보이는 데까지 앞으로 나가십시오.”

때문에 명인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앞을 보고 나아가야 했다. 저 멀리 가로등이 보이기는 했다.

가로등에 닿자 가로등 아래서 두 남자가 쓰러진 한 남자의 옷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그러다 명인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쓰러진 남자는 옷매무새는 물론이고, 정신을 잃은 듯 했다. 퍽치기인가? 그 놈들은 놀란 후에 서로 쳐다보며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명인이 아까 그 불량배 세 놈한테 보았던 것과 놀랄 정도로 닮았다.

“뭐냐, 너는? 코스튬인가 코스플레이인가 하다 온 녀석이냐?”

“야, 어떡해, 우리 얼굴을 봤어!”

놈들 중 한명이 말했다.

“어떡하긴 어떡해? 눕혀야지.”

한 녀석이 나이프를 빼들었다. 길이가 20센티는 되어 보이는 것이 척 보아도 살상용 나이프였다. 놈은 나이프 쓰는 것에 능숙한 듯 나이프를 앞에 두고 익숙한 자세로 명인에게 접근해왔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휘둘렀다.

명인은 기겁해서 나이프를 피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중심이 흩어지지 않았다.

놈은 한발 나오면서 또다시 나이프를 앞으로 찔렀다. 명인은 옆으로 비켜섰다.

또 휘둘렀다. 명인은 또 피했다. 놈은 그냥 크게 한발짝 앞으로 나와 나이프를 마구 휘둘렀다. 그걸 명인은 발과 허리를 놀려 그 거리에서 일일이 다 피해냈다. 명인 자신도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칼의 움직임이 빠르지만 명확히 보였고, 비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 뿐인데 이렇게 잘 피해질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찌르기를 피하자 녀석은 더 칼을 못 휘두르고 지쳐서 헉헉 거리며 어깨를 들썩 거렸다.

“이.....씨발,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반대로 헬멧 속의 명인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전력으로 주먹을 날리거나 칼을 휘두른다 하는 것은 체력 소모가 심하다. 칼이 움직이는 것이 똑똑히 보이니 정신만 잘 차리면 배운대로 반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 놈이 체력을 조금 추스르고 다시 찔러왔다. 명인은 그 찌르기를 몸을 비틀어 흘리고 정확히 열린 오른팔 아래 가슴, 간장을 타격했다.

“허억!!”

녀석은 너무 고통스러운 듯 바로 땅에 쓰러졌다. 한참 그러고 있다 명인이 가만히 있자 뒤로 굴러 일어났다.

“야, 튀어!!!”

녀석이 가슴을 부여잡고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녀석의 동료에게 말했다. 녀석의 동료가 어리둥절해 하며 녀석을 쳐다보자,

“튀자구 새끼야!!”

하면서 자신은 가슴을 부여잡고 힘들게 뛰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한 녀석도 녀석을 한번 보고 명인을 한번 보더니 같이 뒤쫒아 달렸다. 명인은 그냥 어안이 벙벙해서 쫒지 못하고 그저 도망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어디선가 짝짝짝 박수소리가 들려 오더니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잘 하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히어로써의 첫 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거지 뭐겠습니까.”

“이 옷은.... 이 시계는 뭐지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히어로 변신 시계라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영웅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어로는 절대로 패하지 않잖습니까? 지금의 선생도 그렇습니다. 2대 1이든, 3대 1이든 17대 1로 싸우든, 상대가 총을 들고 있건 칼을 들고 있건 절대로지지 않지요. 어떻습니까? 마음에 듭니까?”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명인은 당황해서 자신의 옷차림을 여기 저기 살펴보았다. 확실히 예전 어릴 때 보았던 변신 히어로들, 후뢰시맨이나 바이오맨과 비슷한 소재의 옷 모양, 그리고 헬멧을 쓰고 있었다.

“앞으로 선생의 히어로 명은 ‘하이퍼 맨’입니다. 앞으로 다시 히어로 변신을 하고 싶을 때는 이 시계를 차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아까처럼 한바퀴 돌면서 ‘하이퍼 맨 변신!!’ 이렇게 외치시면 됩니다.”

“뭐, 뭐라고요?!”

“왜 그러십니까, 선생이 정한 이름이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얼마나 유치해 보였을 것 같습니까? 익숙해지면 자랑스러워질 겁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선생이 원하시는 대로 정의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드렸습니다. 다만 선생이 지켜주어야 할 사항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생이 선생이 말한대로의 선생이라면 잘 지켜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는 얻은 힘을 어떠한 형태로도 선생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그 힘이 선생의 것도 아니고, 제 것도 아니며, 오직 공통된 정의의 신념에게서 빌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히어로의 정체 선생이라는 것이 아무에게도 알려져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만약 이 두 가지 약속을 선생은 히어로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 외에는 자유입니다.”

과음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눈 앞의 초현실적인 남자의 말과 황당한 상황이 명인으로 하여금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이 환각과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좋습니다. 지금 딱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이게 현실이라 칩시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저기 저 분이 쓰러져 있지 않습니까? 저대로 놔두실 겁니까? 이 날씨에 그냥 놔두면 얼어 죽을 겁니다."

그랬다. 날씨가 쌀쌀했다. 쓰러진 남자는 술냄새가 진하게 났고, 흔들어 봐도 의식을 차릴 줄 몰랐다. 품안을 뒤져 지갑과 신분증을 찾았으나, 먼 서울로 거주지가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이사와서 주민등록증 거주지 변경을 하지 않은 사람인 듯했다.

"이거 어쩌죠?"

명인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남자는 자리에 없었다.

"?!!"

마치 애초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 뒤로 텅빈 어두운 골목이 보일 뿐이었다. 현일을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마찬기자였다. 명인은 어이가 없었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무슨 약물에 취한 건가? 자신은 환상을 보고 있었던 건가? 명인은 자기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원래의 자기 옷으로 돌아와 있었다. 헬멧도 없었다. 그럼 시계는? 손목을 보았다. 시계는.... 있었다. 이건 진짜인가?

"으.....으음....."

명인의 앞에 있던 취객이 의식을 잃은 채로 약간 신음을 흘렸다. 이 사람은 진짜다. 그리고 밤은 차가웠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명인은 결국 그 사람을 들쳐업고 낑낑거리며 옮겨 가까운 파출소에 내려 놓았다. 파출소에서 당직을 서던 순경은 잘한 일이라고, 아침에 깨면 말해서 집으로 돌려 보내겠다고 약속해주며 명인을 칭찬했다. 명인은 조금 기분이 좋았다.

밤이 늦었고 잘 시간은 부족했다. 내일 직장에 정상적으로 나가기 위해서 명인은 집에 돌아 오자 마자 곯아 떨어졌다. 아침엔 깨질 듯한 두통과 몽롱한 정신 상태로 간신히 세수하고 옷을 찾아 입고 간신히 출근을 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는 와중에도 손목에 차게 된 시계는 신경쓰였다. 이건 뭘까? 어제의 일은 환상이었나? 그 남자는 무엇이었을까? 명인은 정신과 손을 분리시켜서 워드를 치고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온통 관심은 손목에 찬 시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시계는 봐도봐도 애들이 차는 전자 시계 이상이 아니었다. 시간은 정확했으나 사람들이 관심 가질 까봐 쳐다보지도 못했다.

업무시간이 끝났고, 회식이니 야근은 없었다. 명인은 회사 근처에서 어느정도 방음이 가능하고 절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을 곳을 찾다 결국 하숙하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의 진실을 확인하려고 그 키워드, 뭐였더라...'하이퍼 맨'이었던가를 외치려고 생각하니 갑자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한번은 확인해 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앞섰다.  

제발 혹시라도 듣는 사람이 없길 바라며 명인은 기억나는 대로 한바퀴를 돌며 외쳤다.

"하이퍼~맨!! 변신!!!!”

돌고 일어나자 갑자기 시야가 약간 어두워졌다. 혹시, 하고 바로 거울을 보니 그 헬멧을 쓰고 타이즈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헬멧 때문에 볼을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꿈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신은 말짱했다.

"이,, 이거 어떻게 벗지?"

당황해서 명인은 옷을 벗는 방법을 찾았다.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닐 수는 없다. 헬멧을 마구 만지다가 손이 빰에 닿았다. 옷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사라지는 건가?"

정신은 틀림없이 맑았는데, 흡사 마술에 걸린 기분이었다. 아니 마술이었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존재와 이 시계를 마술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남자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옷차림과 몸은 명확히 기억할 수 있는데 얼굴부분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명인에게 정의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했었고, 그리고 준 것이 아마 이 시계였었다. 명인은 이 코스츔을 하고 두 명, 아니 한명의 칼든 괴한을 쉽사리 제압했었고, 뭘 좀 물어보려니 그 남자는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었다.

남자가 말하길... 절대 자신을 위해 힘을 쓰지 말고, 남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된다고 했었던가?

명인은 머리가 아팠다. 여기가 시골이긴 하지만 무슨 고담시도 아니고, 자신과 같은 일반 시민이 범죄에 맞닥뜨리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어제의 그 일은 그저 지독하게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게 있어봤자 쓸 일이 있을까?

그래도 명인은 시계를 버릴 수는 없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긴 소매로 가리고 손목에서 빼지 않았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히어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끝도 없이 반복되는 주제이다. 명인은 그렇게 의무적인 힘을 다룰 자신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했었다. 자신은 그 남자에게 힘이 없어서 하지 않을 거란 말을 했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렇다면 좋은 물건이 있다고 했었고.... 이런, 명인 자신이 그 때는 당당히 말했었다. 힘이 없어서 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나? 명인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히어로 놀이를 하고 싶어도 범죄가 없다. 악당이 없다. 또한 명인은 무슨 배트맨 처럼 악당의 악행을 탐지해 낼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시계 따윈 없는 듯 조용히 살아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자 그저 그랬다. 시계는 벗어서 가방 속에 넣었다. 직장과 동료, 편집장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고, 명인 또한 그에 맞추어 하던 대로 살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단순히 운이 나빠진 것인가, 아니면 그 전까지 운이 좋았었던 거였을까? 명인이 다니는 길목은 희한하게 외지고 어두운 골목이 많았다. 여느 날과 같이 도장을 마치고 자정 가까이 되어 집 근처에 왔을 때, 골목을 돌았을 때 명인은 그 장면을 보았다.

어떤 엉망인 얼굴인 얼굴과 옷차림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하려 하고 있었다. 차의 본네트 뒤에서 소리를 못 지르도록 입을 검정테이프로 빙빙 둘러 놓은 것으로 보아 계획적인 듯 했다. 막 여자의 하의를 벗기려 하고 열을 올리려던 차에 나타난 명인을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 더러운 남자는 명인의 옷차림과 얼굴,그리고 일행이 없는 것을 살피더니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놀랐네, 꺼져!!!"

명인은 갑자기 뜨거운 것이 정수리까지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 화를 내다니? 놀라고 당황해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너다!!! 그 당당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는 누구의 눈과 너무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명인은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 뛰었다. 보지 않았어도 녀석의 흡족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명인은 도망을 친게 아니었다.

명인은 그 자리를 충분히 벗어나 다른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살폈다. 없었다. 그러면 다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명인은 가방에서 시계를 꺼내어 차고 외쳤다.

"하이퍼 맨!!! 변신!!!"

헬멧이 제대로 씌워진 것을 확인하고 명인은 그 놈이 있던 골목으로 뛰었다. 녀석은 막 일을 시작하려단 참이었다. 늦지 않았다. 명인은 볼 거 없이 달려들어 그 놈의 아구창을 있는 힘껏 후려 갈겼다.

뻐걱!!!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옆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하지만 녀석은 바로 일어났다. 녀석의 눈에는 당황의 빛이 가득했다.

"뭐!! 네.... 네 녀석....얶!!"

뻑!

명인은 녀석이 말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얼굴을 때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퍼렇게 되고 부어 올랐다.

서너번을 맞고 쓰러지자 녀석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명인은 살짝 다가가 맥을 확인하였다. 빠를 뿐 이상없이 뛰고 있었다.

'헉헉!!'

명인은 자신도 흥분했었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인은 여자 쪽을 돌아보았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공포로 꼼짝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공포에 완전히 질렸는지 벗겨진 하의를 다시 챙겨 입을 생각 조차도 못한듯 했다.

"무서워 할 것 없어요."

명인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으나 소리가 헬멧에서 울리면서 이상하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바뀌어 나왔다.

"우선, 옷부터 입으시고."

그제서야 여자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 놀란듯 옷을 챙겨 입었다.

"흐흠, 아 신경 쓰실 거 없어요. 저 녀석은 당분간 못 일어날 테니 빨리 자리를 뜨시죠. 저는 이만."

명인은 가겠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저,,,잠깐만요!!!"

"?"

"저기 누구시죠? 그 이상한 옷과 헬멧은 일부러 쓰신건가요? 성함이라도...."

명인은 습관대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 남자는 절대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했었다. 그럼....뭐라고 말해야 하지?

"저는...."

명인은 망설이다 말했다.

"하이퍼맨이라고 합니다. 다시는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만"

"저...저기 잠깐만요!!!"

명인은 그 자리를 전력으로 달려 도망쳤다.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일까? 달리면서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 후로 명인은 권투 도장은 그만 두었다. 대신 그 시간에 여기 저기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물론 명인이 사는 곳이 무법천지는 아니고 한국은 높은 인구밀도로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잘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으므로 그렇게 늦은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쉽사리 깡패나 불량배, 강도와 맞닥뜨릴 수 있지는 않았다. 명인은 범죄의 현장을 목격하기 보다는 주로 쓰러진 취객이라던가를 발견해 경찰서로 옮기게 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걸 하도 많이 하게 되다 보니까 경찰서에 가면 이제 경찰들이 명인의 얼굴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가끔가다 정말로, 예전엔 피해다녔기 때문에 안 마주쳤던건지, 정말로 불량배가 강도, 위기의 상황에 처한 여인과 강간범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지난 4개월간 명인은 칼을 든 3명의 강도와  다수의 불량배를 만난 것이 5번, 그리고 강간 현장과 맞닥드린 것이 10번이었다. 생각보다 범죄는 주변에서 흔했다. 다만 명인이 몰랐고, 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특히나 짐작가는 곳 바위를 들어 올리면 가재가 어김없이 나타나 도망치듯이, 골목을 돌면 생각보다 강간을 시도하려는 범죄자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강간의 경우 신고율이 정말로 얼마되지가 않는다 한다. 피해자 측에서도 쉬쉬하며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제의 그 범죄 발생률은 얼마나 될까? 강간을 행하는 강간범들도 이것을 아는듯 명인에게 그 현장을 들켰을 때에 놀라기는 커녕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명인은 변신해서 그놈들을 죽지 않을 만큼 때려주고 피해자를 구했다.
  
생각보다 범죄는 흔했고, 명인은 좀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일 방법을 모색했다. 그냥 무작정 동네를 순찰하는 것은 허탕을 치는 날이 훨씬 많았고, 명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명인은 직장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점심시간, 다들 점심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 잠시 말을 나누다 돌아가는 시간에 다들 범죄와 강간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숙정 씨. 그거 알아?"

"뭐요?"

"요즘 이 동네에 '하이퍼맨'이라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

명인은 지나가다 어깨 뒤로 그 이름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름은 딱 한번, 맨 처음에 구해준 여자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이 퍼졌을까? 명인은 놀라움을 감추고 지나가는 척하며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간범이에요?"

"아니, 반대야. 강간 현장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여자를 구해준다는군."

"오오, 슈퍼맨 같은 사람이네요. 어떻게 생겼대요?"

"그게, 진짜로 슈퍼맨 비슷한 옷을 입고 헬멧을 쓰고 나타난다는데?"

"정말요? 진짜에요?"

"정말이래, 하지만 나도 본적은 없어."

대충 그 쯤에서 화제는 끝났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자신의 부서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명인이 화제가 되고 있나 보다. 명인이 때려눕힌 것은 강간범만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까? 아마 명인에게 당한 불량배들은 그런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겠고, 명인의 이름이 알린 것은 명인이 구한 여자 몇몇이었을지도.  명인은 속으로 웃었다.

점점 더 변신에 익숙해지면서 명인은 좀 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용산 전자 상가에 가서 경찰 무전파를 캐치할 수 있는 라디오를 구매하였다. 그리곤 조용히 듣고 있다가 가능할 것 같으면 경찰보다 먼저 달려가서 도주하는 강도나 범인을 잡고 자기 이름을 남겼다. 폭력배 사무실을 습격해 보기도 했다. 명인이 찾아갔을 때에는 그 사무실에 생각했던 대로 험상궂은 남자들이 있기는 있었으나, 평소엔 다 나가있는지 그 수는 5명 뿐이었다. 변신해 들어온 명인을 보고 하도 그저 어이없어 해서 명인이 먼저 어떻게 싸움을 걸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는 명인은 5명의 깍뚜기들을 때려눕히고 '하이퍼 맨'이라는 이름을 새기고 나올 수 있었다. 17대 1이든 100대 1이든 변신해 있는 이상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그 말은 사실인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일은 바로 그만두었다. 경찰보다 먼저 범죄자들을 잡아봤자 어차피 그들은 경찰에 의해서 체포될 것이었다. 괜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폭력 조직 사무실을 습격한 일도, 여러 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인은 기자라고 할 수 있었지만 사회계열과는 떨어져 있어
아는 폭력 조직 사무실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두 행위로 인해서 명인의 이름은 확실히 유명해진 것 같았다. 명인은 길을 가다, 또는 사람을 기다리다 주변에서 '하이퍼맨'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명인은 그의 히어로 네임을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동경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인은 기분이 흡족했다.

점점 예전처럼 범죄를 사냥하기는 어려워 졌다. 아무리 예전처럼 순찰을 돌아도 범죄의 현장은 커녕 사람 그림자도 찾기가 힘들었다. 명인이 여지껏 해온 노력의 결실일수도, 좋은 현상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현재의 명인은 심심했다. 그러나 딱히 무엇을 달리 해 볼 수 있는 것도, 거기에 지나친 정력을 쏟을 이유도 없었다. 한 달 째 사람 코빼기도 못보는 날이 계속되자 명인은 밤 순찰은 그만 두었다. 도저히 해야 할 일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세계정복을 노리는 헬박사가 없는 이상, 마징가는 고철덩어리다. 아니, 그건 그정도까진 안 갈지 모르겠는데, 어쨌건 영웅에게는 악당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딱히 그런 악당이 없다. 당분간 히어로 활동은 잠정 휴업에 들어갔다.

"하이퍼 맨을 취재하겠다고요?"

어느 날, 명인은 동료 여기자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예, 어떻게든 그를 만나서 인터뷰 할 수 있다면 정말 특종이 되지 않겠어요? 편집장님이 하지 말라 하셨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알고 싶어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나 편집장이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명인으로써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최근의 명인의 행동은 신문사에서 군침을 흘릴만한 특종거리이긴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편집장이 명인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려주다니! 명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궁금했다.

"그냥 하지 말래요. 그냥 머리가 살짝 이상한 녀석에 불과할 거라면서, 우리 신문은 그런 가십 기사 따윈 취급하지 말라는 군요. 이상한 일이죠? 편집장님이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로 희안한 일이었다. 가십이건 엉터리건 일단 흥미를 끌만한 기사라면 무조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보는 편집장이 그런 자기 모순적인 말을 하다니. 하지만 그를 깊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명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명인은 당분간은 확실히 활동을 접어 두기로 했다. 활동과 모습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도 골치아프다. 자칫하면 정체가 발각될 위험마저 존재한다. 명인은 그 날부터 대충 한 달 간은 변신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회식의 풍경은 언제나 같았다. 편집장은 언제나 양 옆구리에 여자를 끼고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명인은 그 사진을 찍어서 편집장 부인에게 보여줄 수 있었으면 했다.

테이블 위에는 비싼 술병이 쌓여가고 있었고 명인도 편집장도 다른 사람도 그만큼 취해가고 있었다.

편집장의 성희롱은 술이 들어갈 수록 심해진다. 그 꼴을 보기 싫은 명인은 그냥 일찌감치 취해 버리는 것이 나았다. 그러던 중 편집장의 잔이 비었고, 술이 남은 술병이 명인의 앞에 있었다. 명인이 편집장의 잔을 채워 주어야 했다.

명인은 편집장에게 웃으면서 술을 따라 주면서 말을 걸었다.

"편집장님, 그거 아십니까?"

"응? 뭐?"

"요즘 나타났다는 '하이퍼맨'이라는 그거 말입니다. 여자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데 편집장님 옆에 앉은 아가씨들 얼굴을 보니 여기에도 나올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명인은 즐겁게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을 했다. 그러나 명인은 편집장의 얼굴이 순간 경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곧 편집장도 명인을 따라 웃었지만 명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왜 이리 찡그리고 있는거야. 내가 마음에 그렇게 안드는 거야? 사람을 겉보기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 나도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라고 그렇게 싫어하지 말아."

편집장은 다시 웃으면서 서비스로 호출당한 여자에게 농을 걸었다. 그러나 명인은 기분이 후련했다. 저 웃음은 가짜고, 분명히 마음 속에 찔리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명인은 가슴속 맺힌 것들 하나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다.

명인은 다시 그동안 쉬었던 권투도장을 다니기로 결정햇다. 순찰을 나가지 않게 되자, 그 시간이 텅 비기도 하고 다시 한번, 조금이라도 명인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엇기 때문이다. 변신에 의한 힘은 주어진 것일 뿐, 명인 본래의 것은 아니었다. 명인은 다시 한번 스스로 강해질 결심을 햇다.

권투도장은 시내에 있었다. 명인을 가르쳤던 사범은 명인을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명인은 오랜만에 땀을 흠뻑 흘리니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곧 자정이 되었다. 아무리 좋아도 차가 끊기기 전까지는 접어야 했다. 명인은 도장에서 나와 시내의 한적한 구석 길을 걸었다.

"까아!"

어디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뚝 끊겼다.

명인 주위에 있던 몇 몇 사람들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잠깐 멈춰 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자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그들 주변은 언제나 안전하고, 별 일이 없다고 믿고 싶어한다. 이 비명소리도, 사실은 위험에 빠진 여자가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낸 소리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외면하고, 그저 실수로, 또는 놀라서 지른 비명 쯤으로 멋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실제로 범죄와 불의는 우리 곁에 있음을 보았으며, 그것을 때려잡는 영웅이다! 라고 생각하며 명인은 소리가 난 쪽을 움직였다.

시내의 거리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명인은 쉽사리 소리가 났던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사무실들이 모두 문을 닫은 불 꺼진 건물에서 나온 소리렸다. 건물의 정문인 유리문은 생각 외로 잠겨 있지 않았다. 명인은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변신하여 빌등 층계를 올랐다.

빌등 3층에는 노란 불빛이 잇었고, 뒤로 넘어진 여자 앞에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명인은 하도 이런 꼴을 많이 봐서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명인은 올라서 돌아보는 한 남자의 얼굴에 바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나머지 한 녀석의 얼굴에는 열렬히 당황한 빛이 어렸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명인이 막고 서 있는 형태라서 어떻게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맨 처음 주먹을 맞은 녀석은 저리로 날아가서 쓰러졌고, 남은 한 녀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슨 사정을 해보려고 그랬던건지, 그냥 명인의 소문을 듣고 전의를 잃어 그랬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자 역시 명인의 주먹에 곧 뻗어 버렸기 때문이다.

명인은 두 녀석을 쓰러뜨리고서, 몸을 약간 들썩일 뿐 움직일 줄 모르는 여자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엉망이 된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보이질 않았다.

"괜찮습니까? 늦지 않을까 걱정했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으니 정말 다행이군요."

여자를 진정시켜야 했다. 명인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명인은 입장상 오래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아, 예, 지금 괜찮아요. 감..감사합니다."

여자가 울먹이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정신이 아닐 것이도 그것에는 아마 지금 명인이 입고 있는 초현실적인 복장에도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어요. 당신이 그 '하이퍼맨'인가요?"

여자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명인에게 물었다. 그 눈과 마주치면서 명인은 몸이 얼어 붙는 줄 알았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리였다.

당황스러웠다. 이 일을 하면서 아는 얼굴을 설마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꾸지 못했었다.

헬멧은 명인의 얼굴 표정은 가려주었지만, 몸짓까지도 가려주진 못한것 같다. 그녀는 명인이 이상해 보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으...어...이...그..저..."

명인은 어떻게 말을 하려 했지만 턱이 달달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앗다. 그러자 그녀 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했다.

"왜..왜 그러세요? 갑자기 어디 아프신가요?"

오히려 그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묻기 시작햇다.

"....."

명인은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부끄러움일까 무엇일까? 얼굴이 뜨거워지고 열이 나는 것 같았다. 평소에 단 둘이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상상은 많이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명인은 머리 속이 혼란스럽고 깨질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시죠?"

이 대리의 목소리는 오히려 걱정으로 가라앉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쪽은 명인이었다.

"아.....아무것도 아닙니......."

갑자기 이대리의 눈빛이 하나로 모아져 빛났다.

"목소리가.....? 혹시 명인 씨?"

이 대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명인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명인 씨인가요? 명인 씨 맞죠?"

이 대리가 명인의 몸을 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명인은 자기 몸을 흔드는 이 대리를 강하게 밀쳐냈다.

"명인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명인은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 실례했습니다. 괜찮아지신거 같으니 이만."

그리고 명인은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잠,,잠깐만요!!"

등 뒤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명인은 절대 뒤를 돌아 보지 않고 달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늘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으면 햇다. 그러나 이런 형태로 그런 기회가 올 줄은.....명인은 한참동안 달려 도착한 으슥한 골목에서 변신을 풀고 숨을 골랐다.

'"헉......헉"

이대리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아서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앗다. 그녀를 대할 때 평소의 담담한 태도는 어디로 간 것이었을까? 명인은 자신의 한심함에 한없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시계에서 났다. 시계가 터졌다. 폭발한 것이었다.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액정이 깨져 아무 숫자도 표시되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왜? 이 시계는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시계다. 이 시계가 고장났다는 것은 설마.......?

"변신! 하이퍼맨!!!! 변신!!! 변신!!!"

설마가 사실이었다 변신이 되지 않았다. 명인은 한바퀴 옆돌기를 하며 수없이 변신 액션을 취해보았다.

"아니 왜지? 갑지기 왜? 왜?"

'절대로 지켜야 할 두가지가 있습니다. 정체를 들키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자신을 위해 힘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말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이 대리가 명인의 정체를 의심했기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명인은 항상 주의해 왔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었잖아! 자신이 조금 멍청한 짓을 했지만 목소리만 가지고 알아보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명인은 억울했다. 정말 억울햇다. 규칙의 너무 엄격한 적용이엇다.





쉽게 온 것은 쉽게 간다고 했던가. 변신 능력을 얻으려고 무슨 크나큰 대가를 지불한 것은 아니었던 만큼, 명인은 그에 대해 크게 억울해 할 권리는 없엇다. 그저, 원래대로 지내면 왼다. 어차피 히어로 활동이 명인에게 실제적인 득을 가져다 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 대리와 만났었다.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 대리에게 명인은 평소대로 철저하게 상관없는 척, 모른 척을 했다. 그 때는 내 것이 아닌 힘으로 이룬 상황에 기대어 잇는 상황에 불과하였다. 언젠가 자신의 힘으로 다시 이대리 앞에 멋지게 나타나리라 명인은 다집했다. 명인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일은 여전히 힘들었고, 편집장은 바뀔 줄을 몰랐으며, 지겨운 회식은 계속되었다. 명인은 더 이상 변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고장난 시계는 계속 차고 다녔다. 다행히 명인의 시계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권투도장은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 역시 힘든 운동을 끝마치고 모델들이 밀집한 구석을 지나칠 때에 명인은 익숙한 한 관경을 보았다. 남자가 여자를 벽에 몰아 붙이고 서 잇었다.

명인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의 그는 영웅이 아니다. 그 자격은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지금 저것을 보고 그냥 모른척 지나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괜히 주제넘은 짓을 해서 예전처럼 후회하지 않게 되려나? 그래도.......시선이 돌려지지가 않았다.

명인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남자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말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의아한 점은 남자의 뒷머리가 홀랑 벗겨진 것이 나이가 꽤 되어 보였다. 그런 남자가 이런 모텔에서 여자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명인은 더이상 변신하여 뛰어들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호기심을 누루지 못하고 더 가까이 가 보기로 햇다.

그 와중에 거의 대머리인 남자는 명인 쪽을 휙 돌아보았다. 명인과 그 남자는 동시에 놀랐다.

"아니, 편집장님!!"

"아니, 유대리!!"

그는 편집장이었다.

"아니, 편집장님, 이 시간에, 여기서 무슨 일이십니가?"

명인은 편집장에게 물었다. 그러나 편집장이 어떠한 인간인가를 빤하게 알고 있는 명인으로써는 편집장 앞에 있던 여자 표정만 봐도 안 들어도 비디오였다. 분명 술집이나 이런 데서 강제로 2,3차를 강요당한 아가씨겠지. 편집장이 노기 띤 얼굴로 바뀌어 말했다.

"유 대리하고 일절 상관 없는 일이야. 가 보게!!"

명인인 뱃속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분명히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싫습니다."

"싫.....뭐라고?"

편집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졋다.

"제 다리로 우연히 여기 온 거니. 잠시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다리가 아파서요."

"자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그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졌다. 평소에는 편집장의 호통에 명인은 반사적으로 쪽아들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 편집장님은 저하고 볼 일이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저 여자분하고 볼 일을 보시면 됩니다. 응? 아니라면 설마 차마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일입니까?"

명인은 그리 빈정대는 말투를 쓸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투가 자연히 그리 나왔다. 편집장의 얼굴은 볼 만했다. 명인은 사람 얼굴이 저렇게 찌그러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명인은 거칠 것이 없었다. 직장에서야 그에게 권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는 그와 명인 둘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편집장이라고 해도 이 일을 공개적으로 누구에게 떠벌리진 못 할 것이다. 당연 편집장은 명인에 대한 앙심은 비할 수 없이 깊어 지겠지만, 그게 어제 오늘 일인가? 그리고 그정도 대가는 참아 줄 용의가 있었다.

편집장이 여자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고 노기충천한 얼굴로 명인에게 다가왔다. 명인은 이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다가오는 건지 의아해 햇다. 명인의 코 앞까지 다가온 편집장은 주먹을 명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상상도 못한채 당한 불의의 일격이라 명인은 눈 앞에 별만 보였다. 곧이어 명치에 충격이 느껴졌다. 명치는 자칫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급소다. 명인은 호흡이 꼬여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숨이...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명인은 겁이 덜컥 낫다.

쓰러진 명인을 편집장은 구둣발로 짓밟았다.

"이.... 이... 이새끼가! 이새끼가! 이새끼가!!"

편집장은 화가 생각을 마비시킨듯 미친듯이 명인을 밟으려 했다. 명인은 숨이 막혀 죽으려 하면서도 밣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굴러야 했다. 호흡이 어느정도 회복되서 나서야 명인은 멀리 굴러 간신히 일어 날 수 있었다.

편집장이 다시 달려 들었다. 미처 자세를 잡고 대비를 할 수 없었던 명인은 다시 깔리고 말았다. 편집장은 명인의 허리를 깔고 않은채 마구 명인의 얼굴을 때렸다. 명인은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편집장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이번만큼은 명인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명인도 맞달려 들어 편집장을 맞잡았다. 그러나 편집장은 50대인 주제에 힘이 뭐 이리 좋은건지 명인이 밀렸다. 명인은 지금은 자신이 '하이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해야 햇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명인은 편집장의 턱을 발끝으로 올려 차버렸다. 다리가 닿을까 햇는데 의외로 너끈햇다. 편집장의 턱이 뒤로 젖혀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편집장의 안면을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다. 옳거니! 손맛이 전해졌다. 제대로 들어갔다. 편집장은 쓰러졌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번엔 명인이 편집장을 다시 넘어 뜨렸다.

명인은 편집장의 얼굴을 곤죽이 될 때까지 때렸다. 변신 모드가 아닌 이상, 이 기회를 놓치면 명인 자신이 다시 쓰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렇게 맞는다고 잘 부서지지는 않는다. 명인이 하이퍼맨 슈트를 입고 싸우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명인이 미친듯이 편집장의 얼굴을 때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편집장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고 눈동자는 풀려 있는 것이 기절한듯 싶었다. 명인 자신도 얼굴이 욱신거렸다.

명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여자는 없었다. 아까 편집장이 명인을 넘어 뜨렸을 때 '까악'하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 때 도망친 듯 싶었다.

명인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난감했다. 어떻게 하지? 이 편집장을 어쩌지? 병원에 데려다 주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직장에 나가면 다시 이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체면 때문에라도 이 일을 이야기 하진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치부, 여자를 억지로 모텔로 끌고 가려 했다는 것이 드러날 터니 말이다. 명인은 고심 끝에 평소에 같이 직장에 나가 이 사람의 얼굴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한이 장난 아닐 테지만, 그건 원래 그랬고, 지금 명인은 잠시 다른 데 차출되어 일하는 중이라 당분간은 직장에서 이 사람 낯을 볼 일이 없었다.

기온이 여전히 낮아 위험했으므로 명인은 하이퍼맨 때 하던대로 119에 전화를 걸고 자리를 떴다. 편집장은 친절한 구급대원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명인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이 되니, 군데군데 멍든 곳이 있었지만, 명인은 대체적으로 명인의 얼굴은 멀쩡했다. 명인은 출근했다. 편집장의 얼굴은 보지 못했고, 그 쪽 부서에는 가지도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다.

사흘 쯤 후에 로비 쪽에서 편집장과 우연히 마주쳤다. 명인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는 서류봉투를 들고 어디론가 가능 중이었다. 그는 턱과 얼굴에 흰 거즈를 싸매고 있었다.. 그는 명인을 날카롭게 한번 노려보더니,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서 자기 갈 길로 가버렸다. 명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도 찔리는 게 있으니 그걸 떠들고 다닐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인의 이러한 안심은 토요일 오전, 명인의 집에 찾아온 두 명의 남자에 의해 산산히 깨어졌다. 단잠에 취한 토요일 아침, 명인은 누군가 시끄럽게 벨을 눌러대는 소리에 잠을 깨야했다.

"누구십니까?"

"경찰입니다. 문 열어 주십시오."

묵직한 목소리였다.

"예에?"

문을 열었더니 , 사복차림 남자와 바바리코트 입은 남자 한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수첩을 꺼내어 명인에게 보여주었다.

"폭행사건 피의자로 기소되셨습니다. 같이 가주셔야 겠습니다."

"예? 뭐라구요?!"

명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편집장이.....편집장이 고발을 한 것인가? 경찰서에?

남자 둘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었다. 명인은 당황하며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끌려 갈 수 밖에 없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그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명인은 컴퓨터를 앞에 한 어떤 사내와 마주 앉았다. 그 사내는 명인에게 명인의 신상명세와 명인과 편집장이 싸우게 된 경위를 물었다. 명인이 있던 여자를 언급하자, 사내가 짜증을 냈다.

"여자가 있었다구요?"

"예"

"진술이 다르군요. 피해자 말로는 그냥 평소에 본인에게 악감정이 있던 선생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폭행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아는 여자입니까?"

"아니오."

"얼굴은 기억납니까?"

"아니오."

"그럼 선생의 말을 증명할 수가 없잖습니까? 선생은 생면부지의 여성을 위해 직장 상사를 폭행했다는 겁니까? 허, 말이 되는 얘길 하십쇼."

"여기 그런 사람 있습니다. 여기요. 그리고 제가 일방적으로 때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맞고 때렸습니다. 그 편집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대질해서 말을 맞춰보다 보면 제 말이 맞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선생은 민사고발이 아닌 폭행으로 형사고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여기로 불려 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형사재판에서 진술의 진위를 가리고 적당한 형량을 선고받는 게 원칙입니다만, 보통은 그렇게 까지 안 가죠. 보통 합의를 보고 끝냅니다. 자칫해서 호적에 빨간 줄 이라도 그어지면 장난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경우는 그 피해자 분이 화가 많이 났던데 쉽지가 않겠어요."

"많이 다쳤습니까?"

"턱에 금이 가고, 이빨 두대 나갔다고 진단서는 세게 끊어왔더군요."

"합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당신 지인에게 연락해서, 피해자를 만나 보라고 하십쇼."

"예? 제가 만날 순 없는 겁니까?"

"선생은 여기서 못나갑니다. 며칠 밤은 우리 유치장 신세를 져야 할 거요."

명인은 난감했다. 명인은 고아고, 이미 감정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빚을 지고 잇는 사람이 많아서 다시 이런 자리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도 명인이 원래 살던 곳... 부산 쪽에 있었다. 이 지역엔 회사 동료들이 있지만, 편집장이 상대인 마당에 그들에게 어찌 부탁할 수 있을까. 눈앞이 그저 깜깜했다.

명인은 그 날 유치장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은 고민고민하다 자신이 고아원에 있던 시절의 원장님님께 전화를 걸어 편집장을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형들이 사고를 치고 원장님한테 전화로 사정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고, 자신은 그것을 보며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나 다짐해 왔건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명인은 침을 삼키며 전화를 걸었다. 쓴 맛이 났다.

다행히 늙은 원장님은 명인의 전화를 반가워 하며 꼭 도와주겟다고 말을 하였다.

일단 몸이 여기 묶여 있어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여길 나가야 햇다. 그러나 좋은 연락은 곧 오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렸다.

원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울고불며 사정했지만, 그 남자는 미동도 않더란다. 합의는 못 본 것 같다. 명인은 입술을 깨물며 그저 수고하셨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희망의 한 가닥 실이 끊어지는 것이 보인듯 했다. 명인을 담당한 형사는 합의가 안되면 공판에 가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명인은 다 포기했다. 다만 재판결과가 징역역형이 아닌 유예나 벌금형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명인은 유치장에서 제 정신이 아닌 채로 초조히 재판 일자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재판 당일, 원고석에는 명인보다 더 젊어보이는 검사가 나와 명인을 추궁해 대었다. 명인은 검사의 말, 곧 편집장의 진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여자가 있었고, 편집장이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검사의 말과 명인의 말은 그저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가만히 듣고만 있던 판사는 검사의 말만을 듣기로 한 듯, 명인에게 평소의 앙심을 폭력에 의지하여 해소하려는 악질적인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앞길이 창창한 명인은 어떻게든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으므로, 항소를 결정하엿다. 명인은 자신의 주장을 증언해 줄 그 여자를 그 여자를 찾는다면 항소심에서는 이길 수 잇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뿐더러, 명인을 대신해 그녀를 찾아 줄 사람도 없으며, 천에 하나도 그녀를 찾아 데려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명인에게 유리한 증언, 즉 진실을 말해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명인은 절망할 뿐이었다.

명인은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유치장 신세였다. 이게 적법한 절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명인은 아주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을 풀어주면 다 팽개치고 산속이든 외국이든 도망가려 할 것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정한 항소심 날짜는 다가올 뿐, 명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형사가 명인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고 알렸다. 그는 초심 재판에서 명인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검사엿다. 형사는 취조실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어두컴컴한 방에 책상과 마주보는 의자 두 개, 그리고 전기전등만이 전부인  방이었다. 명인은 먼저 들어가 앉아 온다는 검사를 기다렸다. 한참동안.

'덜컹'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빛과 함께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가 나타났다. 그는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명인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명인씨, 그리 긴장하실 거 없습니다. 재판정에서의 일로 제게 서운한 감정이 있을지는 모르겟습니다만, 오늘 제가 명인 씨를 찾아 온것은 검사로써 온 것도 아니고 또 뭐 명인 씨를 취조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명인 씨이게 확인하고 싶은게 있는데, 그것이 비밀을 요하는 사항이라 이러한 장소를 빌린 것 뿐입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명인은 의아했다. 무슨일로 그럼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그럼,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명인이 물었다.

"서론은 걷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명인 씨의 그 시계, 보여 주실 수 잇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명인은 깜짝 놀랐다. 시계? 왜 이 남자가 그것에 관심을 갖는 거지? 명인은 아직 그 변신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고장나 시간을 알리는 것도 하지 못하는 부서진 시계일 뿐이었다. 보여준다고 해도 다른 일반 시계와 다를 바가 없다.

명인은 잠시 고민하다 손을 내밀었다. 검사는 명인의 손목에서 시계를 벗겨 살펴 보았다.

"흠... 예상대로  고장 나 있군요...."

검사는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명인 씨는 이것을 얼마나 쓸 수 있었습니까?"

"쓴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의 변신 시계로써 말입니다."

검사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햇으나, 명인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어....어 떻게 그걸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아냐구요?"

검사가 씩 웃으면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저도 한 때 선생과 같은 길을 걸었던 적이 있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꺼낸 것은 명인과 비슷한... 그러나 약간은 다른 모델의 전자시계였다. 역시 고장나 액정에 시간이 표시되지 않았다.

"그럼 당신도.......?"

"그렇습니다. 그 남자를 만나 받았었죠."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론을 만났습니까?"

"아론? 그 남자의 이름이 아론이었나요? 호, 그렇군요. 이거 좋습니다. 명인 씨는 저희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셨군요."

검사가 감탄하며 말했다.

"하지만 저도 아는 것은 그 뿐입니다. 나이도, 사는 것도 직업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를 분명히 보앗는데도 그 남자의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요."

"하하, 저희들 중에도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대충 명인씨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겠군요. 시계를 받아 신념을 실현할 수 잇는 생겨 좋았을 겁니다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사용하려다가 얼토당토 않은 금기에 걸려 시계가 고장났겠죠. 맞습니까? 피의자 분, 그러니까 편집장 분에게서 그 여자분을 구하려다가 고장난 건가요?"

명인은 입을 쩍 벌렸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틀린 것이 하나 있었다.

"아니오, 편집장과 싸우기 이전에 시계는 고장났엇습니다.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맞닥뜨렸는데 목소리만 듣고 저를 알아보더군요."

명인이 말했다.

"음, 그랬었군요. 제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제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도 우연히 저와 같은 일을 겪었었다고 칩시다. 단순히 그것을 확인하려고 절 찾아온 겁니까?"

"으음,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 전에 그 이야기를 하기 까지는 아직 해 드려야 할 이야기가 몇가지 남았군요. 명인 씨가 이제 이 시계와 그 수수께기의 남자, 아론이라고 하셨던가요? 그자와 상관없는 삶을 사시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이쯤에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명인 씨가.....아직 스스로 억울하고 그 남자와 이 시계에 대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면, 우리는 명인 씨께 손해가 되지 않을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계속 들어보시겠습니까?"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명인은 호기심이 일었고, 그 제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듣고 싶었다.

'우선, 명인씨와 같은 일을 당한건, 잠시나마 정의에 심취하고 히어로가 되었던 이가 명인 씨 한사람 만은 아닙니다. 제가 아까 '우리' 란 표현을 썼지만, 여기 있는 저도 그렇고, 명인 씨가 그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뭉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 명인씨 처럼 자신 혼자만의 경험이라 생각했었죠. 우연한 기회에 일정 이상이 모이고 경험을 공유하게 되자, 그에 대한 몇가지 진실을 추론해 낼 수 있었습니다. 첫번 째는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 둘째는 단시간이나마 서로가 활동한 기간이 겹친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들 반드시 시계는 아니었습니다만, 어쨌건,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물건은 다 각자가 따로 받았는 데도요. 여기서 저희가 추론 해 낸 사실 하나는 우리들이 사용했던 그 정의의 히어로 복장인가 하는 거은 사실 단 하나고, 시게는 다만 그 호출기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즉, 제가 입었던 것이나 명인씨가 입었던 것이나 사실은 똑같은 것을 물려 입었을 뿐 같다는 말입니다."

"뭐...뭐라고요?"

명인의 놀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시계가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금방 고장났던 것이 설명이 되지요. 즉, 남자, 아론은 최대한 많은 히어로를 만들어 내고 싶었던 듯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정의의 복장은 하나 뿐이니, 최대한 빨리 회수하여 다음 사람에게 물려 주어야 했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슈트를 준 날 부터 다시 회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아마 이것이 진실일 겁니다!"

명인은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왜?

"왜? 왜...그런 일을?"

생각이 그대로 말이 되어 나왔다.

"이유는 아직 저희들도 모릅니다. 어쨌건, 저희들도 당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그를 찾아내기로 했습니다. 그를 찾아 낼 수 잇다면 그의 행동의 이유를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히어로 슈트인지 하는 것의 정체를 제대로 밝히고 그것을 온전히 저희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그를 모두 한번씩 만나보았을 뿐, 그에 대해서 하는 것이 없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활동 중인 히어로와 접촉하는 것이었습니다. 명인 씨의 편집장 분께 연락을 받았지만, 그것이 명인 씨인 줄은 몰랐습니다. 워난 명인 씨가 신출귀몰 했던 탓에 찾아낼 수가 없었죠. 아쉬운 일입니다만, 뭐 이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검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때문에 명인 씨께 드릴 제안은 무엇이냐 하면... 저희 모임에 들어와 달라는 것입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를 찾아내는 활동에 동참해 주십시오. 우리는 확실히 사람을 모아 언젠가는 그를 찾아내고 말 것입니다. 명인 씨가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면 그를 찾아내어 얻는 이익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실 생활에서도 이런 저런 이득을 많이 얻게 될 겁니다."

"어떤 이득을 말하시는 겁니까? 저는 곧 감옥에서 푹 썩고 나와 전과자에 실업자가 될 판입니다. 이 상태는 뭐가 나아진다고 해도 별 달라질게 없을 겁니다."

"명인 씨는 딱 그 문제가 걸려 있군요. 어떻습니까? 명인 씨의 편집장님이 고소를 취소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낼 기회가 생긴다면?"

"응?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편집장님도 우리 일원이실 뿐만 아니라 원로 회원중 하나이십니다. 그분도 여기 오시기로 했습니다. 기다려 보시죠."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 속담을 증명하듯이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지면서 그가 들어섰다, 얼굴은 담뿍 미소를 띤 채였다.

"어, 아니 이게 누구야?"

"오신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검사와 편집장은 정말로 반가운듯 서로 악수하고 얼싸 안았다. 그런 다음 명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명인 군도 잘 있었나? 잠자리와 마음이 심히 편치 않았을 테지.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 당시 나는 화가 무척 나 있었고, 이런 일이 생기게 될 지도 몰랐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네도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고서 발 뻗고 편히 누워 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네."

그러나 명인은 편집장의 말 따윈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편...편집장님도.... 시계를 받았었습니까?"

편집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네들은 전자시계를 받는 모양이다만 내 때에는 회중시계였지. 볼 텐가?"

편집장은 품안에 손을 넣어 잠시동안 명인에게 보이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것은 유리가 깨지고 시침마저 우그러진 고장난 회중 시계였다.

"자네가 우리와 함께 해 주기로 한다면, 내 모든 일을 용서해 주겠네. 소를 취하하고, 이번 일에 대해서 싹 잊겠네. 아니, 내가 자네를 그간 탐탁치 않게 보고, 그렇게 대한 것에 싹 잊기로 하세, 그 점에 대해선 나도 자네에게 사과하지. 어떤가? 우리와 함께 해주겠나?"

편집장이 물었다. 용서?

"우리들 중엔 나는 별거 아니네만 이 친구 같은 젊은 검사도 있고, 의사 변호사, 정치가 등 쟁쟁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네. 우리 모임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자네의 앞길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자네 인생에 있어 더 없는 기회라네. 축하하네."

편집장이 웃으며 명인의 어깨를 두드렷다.

"그럼 저는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명인이 물었다.

"그리 큰 책무가 있는 것도 아니네, 그저 우리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히어로의 소재를 찾아보면 되네. 결코 어렵지 않고, 다만 끈기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제가 거절한다면?"

"응? 무슨 말인가?"

"제가 그 제의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뭐? 거절이라니? 이 기회를 왜 놓치려고 하는가?"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명인 씨?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명인 씨에게 손해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검사가 끼어들었다.

"시끄럽고, 제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명인은 검사를 무시하고 편집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허, 참..."

편집장은 혀를 찼다.

"명인 씨, 당신은 자신의 처지를 잘 인지하지 못하신 거 같은데, 당신은 이대로 가면, 2심에서도 감형의 여지가 없고요. 딱 당신 호적에는 빨간 줄이 그어지게 될 겁니다. 전과자가 되는거라고요. 아시겠습니까? 전과자. 더 이상 신문사에서는 일을 하지 못할 거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 해도 상사 폭행의 전과가 드러나는 한에는 절대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 겁니다. 더군다나, 천애고아인 당신이 따로 의지할 곳이 있습니까?

많은 부랑자와 범좌자를 다룬 제 눈에는 ,여기서 괜히 억지를 부릴 경우 당신 삶이 그릴 비참한 궤적이 손에 잡힐 듯이 뻔하게 보입니다. 물론 제 3자인 제가 봐도 그동안 편집장님과 명인 씨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편집장님이 내민 손에 명인 씨가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입니다만. 명인 씨는 어린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왜 한낱 악감장에 휩쓸려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실망입니다."

과연, 검사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아 명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말은 한가지가 틀렸다. 명인으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게 하는 것은 단순히 편집장에 대한 악감정 만이 아니엇다. 명인은 비록 자신이 이렇게 되었어도, 스스로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건 안쓰건, 대상이 편집장이었건 퍽치기였건, 그 순간의 약자를 구해낸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검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생각들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 때의 명인과 지금의 명인은 동일한 인물이고, 명인은 그 때의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명인은 눈 앞의 검사와 편집장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명인과 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 좋다. 명인 역시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으니 완전히 넘어간 사람이 없으리라 볼 순 없겠지. 그러나....

"돌아가 주십시오. 제 마음을 바꿀 순 없을 겁니다. 뭐라해도 말입니다."

명인은 잘라 말했다.

물론 그 둘은 명인의 한 마디에 쉽게 물러나진 않았지만 명인은 귀를 닫았다. 마지막에는 둘이서 흥분해서 개새끼, 십새끼, 백새끼 별의별 욕성을 퍼붓다 지쳐 나가 버렷다. 명인은 다시 눈 앞이 캄캄해졌지만 그 순간 만큼은 마음이 시원해졌다.

재심은 검사가 말한 대로 진행되어 결국 명인은 감형을 전혀 받지 못햇다. 명인은 더 이상의 항소를 포기하였다. 의미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명인은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경찰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꽉막힌 닭장 버스에 오르려던 중, 그 검사를 보았다. 검사는 경찰을 불러내 무어무어라 이야기를 했고, 명인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말을 꺼냈다.

"나는 정말이지 명인 씨같은 벽창호는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기회를 마다하는 겁니까? 도대체 왜?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마음을 돌려 저한테 '예스'라고 한 번만 해주시면 명인 씨를 어떻게든 빼 낼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이 확정되고 나면 저희로써도 방법이 없습니다. 명인 씨가 교도소라는 음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어떻게 버틸수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지금의 대답도 에전과 같습니까?"

명인은 씩하고 미소를 머금으며 여유를 가장했다.

"여지껏 당신들의 제안을 거절한 사람이 없었습니까?"

"한명도 없었습니다! 정말로, 다 바보인줄 아십니까?!"

그가 소리쳤다.

"그럼 제가 첫번째 케이스가 되겠군요. 검사님과는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시다 형사 양반."

명인은 호송하는 형사를 재촉하여 닭장차로 들어갔다. 검사는 안으로 사라지는 명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신념이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명인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며 중얼거렷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가에 대한 고민은 이미 예전에 끝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