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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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색채들이 흘러들어온다.
창가에는 감기 걸린 소녀가 달라붙어 있다. 나는 여러 색채들이 그녀를 감아돌며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고개를 돌려 보고 있었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있다. 내 앞에 있는 노트북 모니터에서는 안색 나쁜 하얀 공백이 빛을 내고 있다. 공기는 이상하게 번들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감기가 옮은 걸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중간한 계절이다.
비가 와, 소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내내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잠깐 동안 보고 있다가, 비가 온다는 한 문장을 타이프한다. 그리고 다시 소녀를 돌아본다. 그녀는 내 시선을 알아챈 듯 나를 흘긋 바라보더니, 다시 비 내리는 풍경을 보는 데 몰두했다. 가끔 코를 훌쩍거리고 콜록콜록 기침도 하면서. 오늘은 아무 말도 없군. 그녀가 말이 없으면 나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콜록콜록이라고 쳤다가 다시 지웠다. 나는 바보다.
내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 하자 그녀가 짜증을 냈다. 그거 피우지 마. 기침나잖아. 기분 나빠하는 그녀의 얼굴, 귀 뒤쪽에서 몇 개인가의 촉수가 뻗어나와 있다. 그 촉수를 통해 소녀 주위를 감도는 색채들이 흘러나가는 것이다. 한 촉수는 창을 통과해서 바깥으로 길게 이어지고, 보이지 않는 각도로 구부러져 사라진다. 그것은 꿈속에서 볼 수 있는 빛이다. 꿈에서 붉은 사막을 보았다고 내게 말하지 말라. 그 붉은색은 추상적인 붉은색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적인 촉수를 따라 흘러나가는 추상적인 색채. 나는 투덜거렸다. 촉수 하나만 빌려줘. 하나면 된다니까.
그녀는 몸이 안 좋다, 좀 쉬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게으른 것 같다. 다른 친구들 하는 걸 보면 보통 이렇게 몸이 약하진 않던데. 나는 그들이 일하는 걸 구경한 적이 있다. 어떨 때는 남자이고, 어떨 때는 어린애다. 금발에, 까맣고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여자인 것도 보았다. 내게 오는 이 소녀는 투정이 심하고, 가끔은 전혀 입도 열지 않는다. 그냥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촉수를 빌려주는 일에 피로를 느끼는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불평을 한다. 이해 못하네, 그런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좀 배려할 줄 알아봐. 그러다가는 마지못해 촉수를 한두 개쯤 내어준다.
나는 그녀가 건네준 촉수를 살짝 붙잡고ㅡ그것은 지금은 비어 있기 때문에 아주 가볍고 매끄러우며 투명하다ㅡ그것을 내 오른쪽 귀 약간 위쪽에 갖다댄다. 곧 촉수는 거기 자리를 잡고,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거기는 간지러운데. 색채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거대한 음향과도 같다. 또는 촉감과 같다. 맥이 빨라지고, 눈앞이 밝아지고, 긴장되면서 동시에 힘이 빠지는 듯한 이상한 감각. 보라색, 녹색, 빨강색, 검은색, 그런 색의 이름들은 의미가 없다. 나는 그때껏 가슴속에 있던 큼직하고 답답한 덩어리가 한 올씩 풀려나가면서 빛과 혼합되는 것을 본다. 변화라는 표현은 내게는 좀 만족스럽지 못하다. 변질, 혹은 변성이라고 할까. 섞이면서 배배꼬인 빛의 줄기들은 혈관을 따라 몸속으로 퍼지며 피를 식힌다. 나는 차가워진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손발은 찬데 이마는 뜨겁다. 나는 희생물을 붙들고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처럼 고양감에 젖어든다. 손끝에서 순식간에 문장이 만들어지고, 고민할 사이도 없이 간단하게 완성된다. 심상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내가 쓰는 글 안에서 확장된 감각을 유지한 채 모든 소리에, 모든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
소녀는 여러 줄기의 촉수를 매단 채 등뒤에서 이리저리 거닌다.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를 귀에 거슬려 하는 듯하다.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혼잣말을 하고, 꾸벅꾸벅 존다. 말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말을 걸면 항상 둘 중 하나다. 말허리를 자르거나, 말꼬리를 잡거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처음으로 촉수를 꽂고 색채에 접촉한 것이 중학교 때였던가. 일요일 점심때였고, 나는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온갖 감정들을 어쩌지 못해 아무 일도 없이 온종일 서성거렸다. 그날 저녁에 썼던 단편은 아직도 갖고 있다. 유치하지만, 어쨌든 뭔가 의미가 담겨 있는 최초의 글이었다.
오늘은 그만할 거야. 그녀가 갑자기 선언했다. 나는 당혹해서 뒤돌아본다. 뭐? 아직 반 페이지밖에 안 썼는데. 그래도 그만할 거야. 그녀는 억지를 쓰고 있었다. 마감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 좀 봐줘. 입에 거미줄 치는 거보다 풀칠하는 게 낫잖아. 그러나 그녀는 매정했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되면 오늘도 그른 것이다. 치즈라면이라도 끓여다 먹고 잠이나 자는 게 낫다. 설령 색채가 주는 황홀한 감각을 잊지 못해 한참을 뒤척이게 될지라도. 그래, 그럼 가든가. 그러자 촉수가 스르륵 빠져나가고, 그녀는 콜록 하고 한번 기침을 하더니 성의없이 손을 흔들고는 창문으로 나가 버린다. 희미한 색채 몇 개가 남아 실내의 허공을 천천히 떠돌았다. 돌돌 말려 있던 긴 촉수 하나가 방안에 남아 한참 동안 풀려나가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멀리 가는 건지. 그때 내 죽은 휴대폰이 떨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무슨 일입니까? 어딜 가신다구요? 네. 내일요? 아니 잘 돼고 있긴 한데요. 그게 아니라… 무조건 내일요. 그래도 어차피 원래 계획이… 아 예. 알겠습니다. 네. 네. 그럼 내일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네ㅡ
나는 휴대폰을 닫았다. 마감은 내일로 바뀌었다. 게으름 피운 나 자신을 탓해야 하리라. 아니다, 나보다는 그녀를 탓하고 싶어졌다. 내 생각 따위는 해주지도 않으면서 '배려'를 요구하고, 늘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하는 그녀 탓이다. 그녀가 없으면 밤을 새더라도 목표량의 절반 정도나 쓸 수 있을까.
나는 욕을 하려다가 그 대신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이제 거의 다 풀려나간 촉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의 허락 없이 촉수를 꽂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걸까? 나는 촉수를 애용하는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했지만, 그러다간 마지막 남은 촉수를 놓칠 것 같았다. 잡기만 하면 길이는 마음대로 늘어날 것이다. 나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담뱃갑에 다시 넣고, 허리를 숙여 촉수를 집어들었다. 잠시 망설이고,
나는 촉수를 꽂는다.
아, 또다시 흘러들어온다. 관자놀이에서부터 뇌 전체를 휘어잡는 가늘고 다채로운 손가락들. 장벽을 뛰어넘고 경계선을 우회하면서 내 정신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급히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구축하는 완성된 문장들이 화면을 채워나간다. 느낌이 좋다. 잘만 하면 오늘밤 안으로 전부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차가운 손을 덥히기 위해 맥주라도 사와야겠다. 안주거리를 고민하는 동안에도 내 손은 끊임없이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촉수를 따라 되돌아온 것은 내가 열 장쯤을 썼을 때였다. 나는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 멍청아 뭘 꽂은 거야,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네가 지금 뭘 쓰고 있는지 안 보여? 나는 다시 내가 쓴 글을 들여다 보고, 퍼뜩 알아차렸다. 그건 전혀 내가 쓰던 글이 아니었다. 문체도, 캐릭터도, 스타일도, 엉망진창이다. 꽂은 것이 내가 늘 쓰던 촉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촉수든 상관 없을 걸로 생각했지만, 내가 쓰던 촉수는 그녀가 골라서 건네준 것이었다. 열 장이나 써 놓고도 그걸 모르다니! 다시 쓰려면 정말 촉박할 거다. 게다가 그녀는 협조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훌쩍훌쩍 울면서 말했다. 다 엉켰어. 나도 몰라. 너 때문이야. 난 돌아갈 거야! 어디로? 내 물음에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휙 창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이 밝은 오렌지색 증기를 뿜으며 쉬익 소리를 냈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게 그녀의 뒷모습은 쌀, 고기, 예금이 그득한 계좌, 뭐 그런 걸로 보였던 것이다. 쌀이 도망간다, 쫓아라!
그녀는 뛰지도 않고 그저 가랑비 속을 휘적휘적 걷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빨랐다. 나는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도 그녀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제대로 만져본 기억은 없다. 만져보긴 커녕 뚜렷한 모습조차도 볼 수가 없다. 야, 잠깐 서봐! 토라진 표정,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런데 얘가 어떻게 생겼더라? 추상적인 촉수,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 나는 철벅철벅 뛰어가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되는대로 버튼을 눌렀다. 친구의 번호다.
여브세여. 졸린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너 지금 집이냐? 친구는 어벙하게 대답했다. 어 집이야. 왜? 나는 고함을 질렀다. 나 지금 밥줄 끊기게 생겼어! 저게 나간 사이에 그냥 촉수를 꽂았는데 그게 다른 촉수였어. 그것 때문에 쟤가 지금 삐쳐서 도망가는데 아무래도 다시 안 올 눈치야. 지금 쫓아가는 중이야! 친구는 잠이 깨는 듯했다. 어, 뭐, 쫓아간다고? 야 잠깐 너 어디야. 어?
어디지? 나는 달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나는 어느새 숲속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비가 그쳤나? 여보세요,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더럭 겁이 났지만 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멈춰 섰다간 도망치는 그녀를 놓칠 테고, 나는 여기 홀로 남겨질 것이다. 되돌아갈 수 있을까? 발밑에서 버석거리며 마른 잎들이 부서졌다. 그녀는 멀어지진 않았지만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어두운 숲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담배가 내 폐활량을 반쯤은 갉아먹은 모양이었다.
산도 아니고 완만한 언덕이 계속되는 지형인데 숲은 이상할 정도로 넓고 울창했다. 어둡다. 나무줄기들은 검고, 공기는 무겁고 번들거린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발밑에는 낙엽 대신 뭔가 좀 물컹한 것이 밟히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쓰고 난 텅 빈 촉수들이 숲의 바닥에 겹겹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투명한 촉수들 틈새로 발이 푹푹 빠지곤 했다. 잘 보니 나무에서도 촉수들이 뻗어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하는 바보같은 고민은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뮤즈를 데리고 사는 것만 해도 보통 사람으로선 생각 못할 일이지만, 이곳은 내가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유리된 곳이었다. 헐떡헐떡거리면서도 내 처지가 점점 한심하게 여겨졌다.
마침내 어느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간신히 멈춰섰다. 시간을 들여서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옆구리와 다리와 발바닥이 아팠고, 토할 것 같았다. 조금 더 숨을 돌린 다음에야 나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길은 빽빽한 덩굴로 막혀 있었고, 빠질 만한 구덩이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러운 기분으로 물렁물렁한 촉수더미 위를 돌아다니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살펴보다가 우선 담배를 피우기로 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불을 붙이고 두 번을 연달아 깊게 빨았다. 연기가 폐로 들어가자 좀 살 것 같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없는 음침한 밤새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촉수 달린 부엉이쯤 되지 않을까. 아니면 부엉이가 달린 촉수든지.
다음 연기를 내뿜었을 때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덩굴 쪽으로 연기가 흘러가자 덩굴들이 부석거리며 움직였던 것이다. 마치 연기를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뮤즈가 담배 연기를 싫어했던 것을 떠올렸다. 시험삼아 연기를 그쪽으로 뿜어보자, 앞길을 막고 있던 덩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쪽으로 조금 물러났다. 나는 계속해서 더 연기를 뿜어서 결국에는 그 건방진 식물이 길을 비키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세 대를 연달아 피웠더니 머리가 띵해져 왔다.
어떻겐가 덩굴을 헤치고 들어가자,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원처럼 보였다. 온갖 은은한 색채로 가득차 있다는 점, 그리고 비상식적으로 넓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희미하고 혼란스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바닥에 깔린 촉수 속을 흐르고, 물처럼 솟구치고, 관목과 돌과 바람을 구성하고 있었다. 뭔가가 허공이며 바닥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곳 전체를 물결처럼 흐르는 색채들 때문에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쪽에는 이 정원과 비교하면 작고 초라해 보이는 2층짜리 석조 저택이 서 있었다.
나는 한동안 얼이 빠져서 서 있었다. 이 정도 양의 색채라면 촉수를 온몸에 꽂고 평생을 글만 써도 다 못 쓸 것이다. 뮤즈들은 이런 곳에서 색채를 끌어오고 있었던가.
몇 걸음을 더 걸어 들어가자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가득한 색채들과 뒤섞여 형체가 희미해 보이는 뮤즈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실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팅커벨을 연상시키는 요정 타입도 있었고, 가부좌를 튼 염소, 드레스를 입은 여자, 날개가 네 장이나 달린 천사, 늑대나 곰, 심지어 연체동물처럼 생긴 것도 보였다. 한결같이 촉수를 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일이 드물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약간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은 내 뮤즈를 찾아 이 안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그게 안된다면 다른 뮤즈라도 하나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뮤즈가 없으면 절대로 내일까지 목표 분량을 다 쓸 수가 없다.
나는 그 넓은 정원을 돌며 그녀를 찾았다. 정원은 관목 울타리에 의해 몇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 구획마다 여러 모양의 문이 달려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구획마다 이름을 붙이며 돌아다녔다. 나비 정원, 장미 정원, 분수 정원, 얼음 정원 등등. 얼음 정원은 저 혼자만 겨울이었다.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어깨에 달라붙는 손바닥만한 나비 모양의 뮤즈를 쫓아내고, 나는 장미 정원에서 분수 정원으로 다시 돌아 들어갔다. 돌을 깎아 만든 무거운 이중문을 낑낑거리면서 열고 들어가니, 낯익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가 멈춰서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녀를 쫓아가던 도중에 전화했던 친구였다. 그는 나를 보고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가왔다. 별일 없어? 응.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내가 묻자 그는 턱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의 남자 뮤즈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가 친구를 여기까지 안내해 준 모양이었다.
친구가 말했다. 찾아서 다행이군, 늦었다면 영영 못 찾을 뻔했어. 어서 돌아가자. 나는 아직 안 된다고 대꾸했다. 내 뮤즈를 찾아야 돼. 내일까지 써야 될 게 있단 말이야. 친구는 답답한 듯했다. 그러다간 영영 현실로 못 돌아가. 여기는 평범한 세계가 아냐. 시간의 흐름도 다르고,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가 없어. 이 정원 구조도 하루에 열댓 번은 바뀐다고. 길을 아는 건 뮤즈들 뿐이야. 네 뮤즈는 내버려둬, 곧 돌아올 테니까. 나는 그의 뮤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혹시 내 뮤즈를 여기서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나와 친구를 돌로 만든 분수 쪽으로 이끌었다. 꽤 과묵한 친구였다. 나는 분수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아까 보았던 그대로였다. 물 대신 색채들이 가득 채워져 흔들리고 있었다. 액체인 것 같지만 물보다 훨씬 가벼운 탓에, 조금만 건드려도 공중으로 후르르 피어올랐다. 남자 뮤즈는 내가 분수에 접근하지 않도록 팔로 막는 시늉을 한 뒤, 분수에 다가가서 손을 담그고, 입으로 어떤 소리를 냈다. 목에서 나오는데도 현악기로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는 잠시 동안 멜로디를 만들며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
1분여가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나는 분수 쪽으로 가 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친구 쪽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 더 기다려.
그때, 멈춰 있던 분수가 갑자기 작동하면서 색채들이 커다랗게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에 좀 익숙해진 듯했던 나도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온갖 선연한 색채가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촉수를 통해서 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가장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색채였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정신을 차려 보니, 분수에서 늘씬한 몸매를 지닌 남자의 거대한 상체가 솟아나와 있었다.
그는 남유럽풍의 조각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눈은 표정이 없었다. 피부는 석회처럼 하얗고 옷은 입고 있지 않다. 친구가 속삭였다. 이 정원과 저택의 주인이야. 디오니소스의 화신 중 하나에 해당하지. 뮤즈들의 관리자라고 해. 그럼 저거한테 물어보면 되는 건가? 내가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만, 조심해. 저래봬도 신이니까.
남자 뮤즈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분수 쪽으로 다가갔다. 신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나를 내려다 본다. 뮤즈의 혜택을 받는 자로구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그는 현악기 같은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그게 언어가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불안감을 누르며 말했다. 제 뮤즈가 일을 안하고 도망갔거든요. 내일까지 꼭 써야 될 게 있어서 잡으러, 아니 찾으러 왔습니다.
디오니소스의 화신이라는 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뭔가?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너의 뮤즈는 저택 안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너를 위해서 영감을 나누어줄 수 없겠구나. 돌아가라.
그 말투가 너무 단정적이어서 묻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물었다. 그게 왜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까? 혹시 다른 새로운 뮤즈를 데려갈 수는 없을까요? 신이 대답했다.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른 뮤즈가 찾아갈지는 나도 모른다. 대답이 되었다면 돌아가도록 하라.
대답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재차 물었다. 뮤즈가 병에 걸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는 잠시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뮤즈란 현상을 인격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현상에 대해 내게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모르겠다면 내가 알려주마.
뮤즈는 재능을 지닌 잠재적 예술가가 태어날 때마다 함께 태어난다. 그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그 기질은 사람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어, 어떤 이는 성악의 뮤즈를 배정받는 반면 어떤 이는 수묵화의 뮤즈를 배정받는다. 너의 뮤즈는 단편소설에 특화된 소녀형 뮤즈였지. 뮤즈가 병드는 것은 곧 재능이 병들고 있다는 뜻이다. 뮤즈가 죽으면 재능도 죽는다. 그러나 다른 재능이 발현되기 시작한다면, 예컨대 연극이나 조각을 시작한다면 또다른 어린 뮤즈가 너에게 배정될 수도 있다. 알았으면 돌아가거라.
나는 아직 돌아갈 수 없었다. 내 뮤즈가 죽는다면 나는 다시는 뮤즈의 도움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뮤즈가 있어도 나는 안 팔리는 3류 소설가에 불과하다. 뮤즈조차 없다면 나는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럼 내 뮤즈를 다시 살려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디오니소스의 화신은 아까보다 좀더 길게 침묵했지만, 마침내는 입을 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예로부터 끝이 없구나. 기어코 그녀를 살려내야겠다면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러나 그녀가 예전처럼 쉽사리 촉수를 건네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말한 뒤 화신은 분수 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져 주었다. 주워 보니 마치 하얀 실타래 같았는데, 약간 끈적끈적했다. 이게 뭐죠? 그가 대답했다. 뮤즈는 인간의 정신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면 뮤즈에게도 생명력이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아직 사용된 적이 없는 촉수로, 인간도 쓸 수 있는 것이다. 한쪽 끝을 내게 주고, 한쪽 끝을 가져가라. 그걸 꽂고 기도하면 기도가 전해질 것이다.
별 걸 다 시키는군. 나는 타래를 조금 풀어 한쪽 끝을 그에게 건네준 뒤, 나머지는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신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사라졌다. 뿜어져 나오던 색채의 분수도 멈추었다.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돌아서자, 친구가 곧바로 내 손목을 붙들었다. 너무 늦었는지도 몰라. 어서 되돌아가자. 뮤즈, 안내해 줘.
남자 뮤즈가 앞장을 섰다. 다시 아까 덩굴이 가로막고 있던 길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가 택한 길은 다른 쪽이었다. 다시 장미 정원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옆으로 조금 틀어지고, 다시 한번 꺾어 들어갔을 때는 나비 정원이었다. 아까와는 전혀 구조가 다르다. 계단을 내려갔다가 얼음 정원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올라간다. 거기에 왠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남자 뮤즈가 문을 가리키며 나를 힐끔 보았다. 잘 보니 그건 내가 사는 집의 현관문이었다. 혹시나 싶어 열어보니 그 안은 집이다.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다른 길로 돌아갈 테니 어서 들어가.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사뭇 진지하게 충고했다. 저 신의 말을 새겨 들어야 돼. 시키는 대로 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알았지? 꼭 그렇게 해.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안심하지 못한 듯 몇 번이나 뒤돌아 보며 자신의 뮤즈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문을 열고 내 방에 들어섰다. 무겁고 이상하던 공기는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정원에서 한 시간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밤 열 시가 넘었다. 내 주머니에서 신과 연결된 촉수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걸었다. 네. 접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준비는 잘 되시구요. 아… 그런데 죄송하지만 내일까지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은데요. 예?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요.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전부터 큰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셨는데 이번에 암이… 대장암입니다. 돌아가셨어요. 네, 오늘요. 사람이 없어서 꼭 가봐야 한다는군요. 늦출 수가 없다구요?
나는 한참 동안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장례식 비용조차 마련하기 어렵다든가, 불행했던 큰어머니의 삶 같은 것. 물론 내 아버지에겐 형제가 없지만, 말했듯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했다. 그는 노발대발하며 전화를 끊었다. 들어올 예정이었던 돈이 날아가 버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힘이 빠져 한동안 의자에 기댄 채 멍청히 앉아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던 듯하다. 한 시간 정도 잠에 빠져,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눈을 뜨니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분수대의 신이 말한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머니 속에 뭉쳐져 있던 촉수 덩어리를 이리저리 풀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짧았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 뒤,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촉수 끝을 관자놀이에 갖다댄다.
습관적으로 색채가 흘러들어올 것을 기대했지만, 물론 빈 촉수에서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머리에 촉수를 꽂은 채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애처로운 바보처럼 여겨졌다. 뮤즈가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고,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쌀이 다 떨어져 간다고 나는 빌었다. 하면 할수록 더 간절해졌다.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닌가.
기도하면서 촉수를 통해 나의 색채가 빠져나가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는 항상 수혜자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세차게 흘러나가는데, 너무 많이 나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10분쯤 하고 나자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도를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내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맞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으며, 꿇은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 머리에 꽂힌 촉수에서는 끝도 없이 색채가, 점점 더 선명하고 다채로워지며 빠져나간다. 싸늘하고 무거운, 공포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긴커녕 입을 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대로라면 얼마 못 버티고 죽게 될 것이다. 이 색채야말로 내 존재의 정수이자 본질이었던 것이다. 나는 속았다. 디오니소스도 친구도 뮤즈도 나를 속였다. '시골 의사'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ㅡ그것은 결코 보상할 수가 없구나.
노여움과 두려움과 슬픔이 번갈아가며 나를 내둘렀다. 몇 번이고 애를 쓴 끝에 눈만은 뜰 수 있었다. 팔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 곧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익숙한 내 방이 마치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울의 방처럼 느껴진다. 촉수는 탐욕스레 나의 색채를 빨아들이며 약동한다. 꿈틀거린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텅 빈 뱃속이 웅웅거린다. 그 밑바닥까지 온통 빨아먹힌 탓에 더 이상 저항할 생각도 하기 어려웠다.
이제 죽는가 싶었을 무렵ㅡ하느님, 죽기 전에 담배 한 대만 태우면 안됩니까?ㅡ나는 한 형체가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촉수가 쑥 뽑혀나갔다. 나는 내 뇌까지 빨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숨쉴 힘도 모자라다.
등뒤에서 그것은 천천히 돌아와 침대 옆에 선다. 단편소설에 특화된 소녀형 뮤즈였다. 그녀는 살아난 것이다. 살아나지 않을 리가 없다, 이토록 색채를 빨아들이고 나서. 그녀의 모습은 그런데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이토록 선명하게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낯익으면서도 비인간적인 이상한 인상. 추상적인 촉수와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 귀 뒤에서 펼쳐져 나온 여섯 개의 길고 아름다운 촉수가 마치 거대한 해양 생물의 지느러미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눈으로 본 적 없던 색채가 이곳을 가득 채운다. 그녀의 존재감이란 메스꺼울 정도다. 예전에는 좀더 어리지 않았던가, 이제 그녀는 스무 살짜리 처녀처럼 보인다. 그렇다기보다는, 스무살짜리 처녀의 모습을 한 악마처럼 보인다. 길고 무심한 눈매로 그녀는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나는 넋을 잃고, 말문이 막힌다.
인간의 정기를 마시고 그녀는 되살아났다. 문득 그녀의 본질이 변해버린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생의 한가운데 치명적인 질병이 가로놓이고, 그 전과 그 후는 결코 같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애초에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나의 재능이다, 내가 태어날 때 그녀는 나와 함께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그녀는 내게 찾아왔다. 어쩌면 문제는 몹시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문제가 무엇이든 그것 때문에 나는 일을 모조리 망쳐 버렸다.
그녀는 예전과는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택에서 나는 어머니를 만났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다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넣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대개 세상 일이란 그런 법이다. 안색 나쁜 하얀 공백이 노트북 모니터에서 빛을 내고 있다. 아니야,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잠깐만. 그러나 그녀는 이제 내게 벌을 내릴 준비를 한다.
그렇게 해서 얼마 정도인가 시간이 지났다. 낮과 밤이 바뀌고ㅡ두어 번, 혹은 열서너 번?ㅡ내 휴대폰은 줄곧 짧게 경련하다가 곧 그 생애를 마친다. 나는 수없이 많은 단편들을 쓰고 있다. 그녀는 이제 전혀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내 뒤에 서서, 내가 쓰고 있는 글을 침울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손끝에서 나오는 문장들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색채에서 흘러나오는 글이다.
색채의 정체는 뮤즈들의 어머니이다. 분수 속에서 샘처럼 솟아나오는 것은 므네모시네이다. 나는 디오니소스의 공허한 눈을 잠시 동안 떠올린다. 내 머리와 손과 등줄기에 꽂힌 여섯 개의 촉수를 통해서 므네모시네는 흘러들어오고, 내 기억과 고통과 감정에 뒤섞여 그 모습을 바꾼다. 내 머리가 불타오르고 손가락이 얼어붙어 버리기 전에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나는 내 친구가 이 글들을 발견해 주길 바란다. 원한다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해도 상관없다. 뮤즈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소수지만 그 결과물은 만인에 의해 향유되어도 좋은 것이니까. 아니, 반드시 향유되어야 한다.
이제 내 몸은 이 방 안에서 제물이 된다. 내 책상은 제단으로 변하고, 이곳은 이미 뮤즈의 정원의 일부이다. 나는 월계수로 변하는 다프네이며, 메두사의 눈을 바라본 뒤엔 돌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때로 주위에서 기묘한 뮤즈들이 거닐고, 헤엄치고, 나를 건드린다. 이제 나는 쌀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색채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이다. 그것은 뱀파이어가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까. 우선 피를 빨린 다음 그들의 피를 다시 마심으로써 나는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내 문장들이 나의 촉수이며 나는 그것을 멋대로 휘둘러 탑이며 조각상이며 살아있는 온갖 것들을 만들어낸다.
곧 끝이 다가올 것이다. 나는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모든 감각들과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점점 더 극단을 향해서 다가간다. 이 느낌들은 곧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임계점. 그렇게 해서 나는 므네모시네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긴 촉수를 천천히 한들거리며 정원에서 떠돌게 되는 것이다. 때로 머문 곳에서 영감을 나누어주는 것이 나의 일이 되겠지만, 나는 내 뮤즈만큼 게으르지 않을 수 있을지 별로 자신이 없다. 정원을 거니는 즐거움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는.
머리가 불타오르고, 손가락은 얼어붙는다.
나는 이제 뮤즈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알고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