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부서지고 있었다. 하늘의 파편이 하얗게 하늘하늘 떠내려 오고 있었다. 입으로 숨을 내뱉으면 새하얀 입김이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 지랄 맞도록 추운 날씨였다.
“어디로 갈 거야?”
여자 친구가 옆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어왔다. 나는 양손을 겨드랑이에 쑤셔 넣고 오들오들 몸을 떨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데이트의 코스나 목적지는 당연히 남자가 결정해야 한다는 공식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내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눈 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게 되었다. 옆에서 참다못한 여자 친구가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가리키며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저기로 들어가자.”
눈처럼 하얀 간판을 단 카페였다.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우리는 흰색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흰옷을 입은 종업원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평소처럼 창문이 달린 구석진 자리로 걸어갔다. 이런 곳에 오면 나타나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자리에 앉자 여자 친구가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먼저 골라.”
나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마실 차를 결정했다. 이런 곳에 오면 녹차가 가장 편하고 무난했다.
“녹차.”
나는 그렇게 말하고 메뉴판을 여자 친구에게 밀어 보내고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눈송이들이 창문을 향해 조용히 추락하고 있었다. 창문 밖은 하얗게 잠겨가고 있었다.
불면증 때문에 며칠째 잠을 자지 못했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잠이 유성처럼 내 눈꺼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을 깨고자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카페는 온통 흰색이었다. 벽지도 흰색, 테이블도 흰색, 의자도 흰색, 종업원들 옷도 흰색······.
흰색 옷을 입은 종업원들은 멍하니 텔레비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YTN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용운동에서 또다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체에 안구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경찰은 봄부터 시작된 연쇄살인의 동일범으로 추정하고 용운동 일대를 전면적으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뉴스를 들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게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뉴스 속에 나오는 연쇄살인마는 바로 나였다.
올해만 벌써 몇 명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자들을 살해하고 눈알을 뽑아낸 다음, 그 시체를 간음한다.
나는 단순히 쾌락만을 느끼려고 살인을 하는 다른 삼류 살인마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내 살인행위는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조심해. 그런 식으로 허영심에 눈이 팔렸다간 눈알을 뽑아버릴 테니까.’ 하고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 살인을 하지 못했다. 오늘 발견된 시체는 벌써 이주일 전에 살해한 것이었다. 이제 또 살인을 한 번 저지를 때가 되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안구가 없는 남자의 시체가 계속 발견되고 있었다. 나는 남자는 살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가 날 모방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잘못하다가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진실만을 원한다.
어쨌든 오늘만은 반드시 살인을 저질러야 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



“딱 한 잔만 더 하자. 응?”
여자 친구가 반쯤 풀린 눈을 하고서 코 막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현재 시각 밤 열 시. 나는 초조했다. 빨리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살인을 해야 하는데 여자 친구가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고 술집에까지 데리고 와버렸다.
“아, 머리 아파. 나 조금만 기대고 있을게.”
여자 친구는 내 속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계속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귀고 나서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오늘 여자 친구가 작정을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내 초조감은 점점 낭패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물론 나도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하고 싶었다. 여자 친구는 분명히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살인이 우선이었다. 살인을 하고 눈알을 뽑고 시간을 하는 행위는 내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실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가 이렇게 들이대는데 도망가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성적인 욕구가 쌓여 있기도 했다.
여자 친구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은은한 샴푸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술 취한 여자 친구를 부축하고 그녀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얕게 쌓이고 그 위로 달빛이 여름 바다의 수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여자 친구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는 오르막길이 많았다. 나는 헐떡거리며 차가운 공기를 폐로 급하게 보내고 있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그녀를 부축하면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땀을 좀 흘린 탓인지 잠은 자지 않았지만 정신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여자 친구의 집에 도착을 하니 자정을 넘겼을 때였다. 나는 일단 그녀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 여자 친구는 아마 취한 연기를 하는 중이리라. 저 상태에서 내가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기 시작했다. 속옷 한 장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자 나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자 바로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나는 땀에 젖은 몸을 물로 씻어 내리고는 바디샴푸를 잔뜩 짠 다음 온몸에 문질렀다. 그녀의 몸에서 나던 고소한 밀키파우더 향이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땀까지 흘린 상태에서 눈을 감은 채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니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 나는 번쩍이는 허상 속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살인을 하는 것은 글러 먹었을까. 그냥 이대로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나? 아니면.
여자 친구라도 죽일까?
나는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물줄기는 일정한 리듬의 소리를 내며 내 머리와 얼굴을 마구 때리다가, 몸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후두두 쏟아졌다.
여자 친구를 죽일까?
나는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고개를 밑으로 숙이고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죽일까?
그러나 아직 여자 친구가 속물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속물도 아닌 여자를 살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살인하기가 글러 먹은 것 같다. 나는 살인을 포기하기로 했다. 오늘은 그녀와 섹스를 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겠다.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욕실을 나왔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식칼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놀랄 틈도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여자 친구는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나는 재빨리 부엌의 위치를 파악했다. 여자 친구가 내 위치를 파악하려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 내 위치를 파악한 여자 친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가 나를 찌르기 전에 나는 싱크대에서 식칼 하나를 뽑아들 수 있었다. 나는 칼을 똑바로 쥐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칼을 쥐고 서로 마주 보았다.
“야. 씨발. 뭐야? 너 왜 그래?”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나를 모방해 남자들을 살해하는 살인마가 떠올랐다. 그녀가 그 살인마임이 분명했다.
“이미테이션 주제에 감히 오리지널한테 덤벼?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내 허점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대화를 시도했다.
“잠깐 멈춰봐. 나야 허영심에 가득 찬 속물 여자들을 응징하려고 그러지만, 너는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남자들이 무슨 죄야? 속물 여자들에게 끌려다니고 놀아난 죄밖에 더 있어? 안 그래?”
그녀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다 남자들의 눈 때문이야.”
나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얼른 대꾸할 수 없었다.
“뭐?”
허점을 발견한 그녀가 식칼을 크게 휘두르며 뛰어왔다.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곧바로 식칼을 다른 자세로 고쳐 잡더니 한 번에 쑥, 하고 내 품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 그대로 푹, 하고 내 왼쪽 옆구리 부분에 식칼을 박아 넣었다.
나는 화두로 옆구리를 지짐 당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팔을 가로 휘둘렀다. 칼에 뭔가 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젖 부분이 움푹 베어 있었다.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하며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틈 사이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허물어지듯 넘어져 버렸다.
나는 옆구리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쓰러져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계속 피를 막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피는 계속해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기분 나쁘게 꿀쩍 거리는 소리를 내며 찔끔찔끔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고 컥컥 거리긴 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이나 꿀쩍 거리고 컥컥 거리던 그녀는 겨우 짧은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남자들 눈,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목에서 솟아오르던 피가 멈추었다. 그녀가 솟아낸 붉은 피가 서서히 바닥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



눈이 녹아 온 거리가 질척거리고 있었다. 먹다 남긴 시래기처럼 녹은 눈이 길 곳곳에 축 늘어져 있었다. 덕분에 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터미널 안은 설 연휴 때문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매표소 앞에는 표가 없다고 승무원과 말다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승차장에는 식당에서 배열해놓은 김밥처럼 버스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나는 고향 마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다음 제일 뒷좌석에 앉았다. 미리 자리를 예약하길 잘했다.
창문 옆으로 출발대기 중인 다른 버스들이 보였다. 창문으로 보이는 옆 버스 사람들 대부분이 빨리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혼자 다른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여자 친구가 나를 노려보며 웃고 있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그녀가 탄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버스가 천천히 터미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을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를 다시 보게 될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