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자리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오래 전에 쓰던 디스켓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디스켓을 보니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더군요.
서둘러 디스켓을 열어보니 깨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소설을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 무협을 열심히 읽던 때에 단편을 썼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쓴 글을 다시 읽으니, 창피하면서도 웃음이 나와 한 번 올려봅니다.
조금 고쳐 볼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제 어린시절을 그대로 보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어 너무 참혹한 맞춤법의 실수만 대강 고치고 올립니다.

....제목조차 안 지어놓은 글이라 급조하였는데.. 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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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내가 열일곱 되던 해였다.

  그해는 내가 새로운 무공을 찾아 집을 뛰쳐나온 해이기도 했다. 기실 가전의 금룡공 역시  그 강맹함으로나 절묘함으로나 무림의 일절로 손색이 없는 공부이지만 내가 원하던 무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금나 위주의 금룡공은 적을 제압하기엔 큰 효력을 볼 수 있겠지만 일거에 적을 절명시키기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말 그대로 필살의 무공을 원하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왜 그렇게 살인에의 집념에 불타오르고 있었는가 묻는다면 그건 순전히 한 여자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그 사정사정을 세세히 말하기엔 귀찮기도 하고 다소 면구스러운 면도 있기에 그저 그 여자가 날 버리고 그 이름을 말한다면 모두 알만한 명문의 공자와 약혼을 했다고만 해두겠다. 그 당시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는지 그 여자의 마음이 이미 나에게서 돌아선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그 녀석만 원망스럽고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무림의 후기지수로서 거론되던 그가 매일 수련은 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워 집안의 골칫거리이던 나의 손에 순순히 죽어줄 리가 없었다. 나도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에게 우리 집안에 혹시 적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무공은 없느냐고 물었다가 가문의 장남이라는 녀석이 하라는 수련은 안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며 내리 하룻밤을 경을 친 후, 은자를 두둑이 챙겨 장원의 담을 넘던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무공을 찾아 배우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자라는 공력으로도 적의 목숨을 앗을 수 있는 무공이라면 역시 병기를 사용하는 공부, 그중에서도 검법이 가장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 것뿐이었다. 이렇듯 무작정 뛰쳐나온 나는 검법의 고수들을 찾아 강호를 해메게 되었다.

  

  집에 있을 때 곽집사나 종세째아저씨에게 들은 강호란 곳은 각종 무술의 고수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어 보이는 것마다 기이한 사건이요, 가는 곳마다 호쾌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접하게 된 강호는 무공의 고수는커녕 제대로 된 무공을 스승에게 체계적으로 배운 소위 명문의 제자라는 것들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간혹 어렵게 검술의 달인이라는 자를 알아내어 찾아가 보면 이름만 그럴 듯 했지 별 볼일 없는 작자들이였다. 그 중 몇 놈은 헛걸음 시킨 대가로 나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하북지방에 갔을 때였던가, 아버지를 보러 종종 장원으로 찾아왔던 마씨 아저씨를 만난 일이 있었다. 내가 집을 나온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기에 이 근방에 검의 고수라고 하면 누가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번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철검선생 이충이란 이름을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북에서 검으로나 수양으로나 그 이상 가는 이를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말을 할 때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렵게 어렵게 찾아가 검술을 가르쳐 달랬더니 달포가 넘도록 검은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검을 이루기에 앞서 사람을 살리는 검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소리만 지리하게 읊어대는 것이어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반년을 해매이는 동안 노자도 떨어져 가고, 그에 따라서 처음 집을 뛰쳐 나올 때의 그 기백이나 집념도 사그라드는 것이어서 나는 점점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리하게 되었다. 이처럼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내가 그 객점에 들어선 것은 저녁 어스름이나 되어서였다. 어려서부터 사형들과 함께 술을 곧잘 먹어 왔던 나였던 터라 요기도 하고 목도 축이려는 것이었는데 문안에 들어섰는데도 어서 오라는 인사도 없이 시끌시끌하기만 하였다.

  “아 빨리 나가요, 외상술 먹는 주제에 하루 종일 이렇게 여기 죽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다른 손님들이 앉지를 못하잖아?”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소리 나는 곳을 흘끗 보니 점소이 한 놈이 주정뱅이와 옥신각신하는 것이었다. 어딜 가나 항상 볼 수 있는 광경이어서 그냥 지나치려했지만, 무심코 주정뱅이의 얼굴을 본 후로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비록 강호의 경험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 나였지만 명색이 무가의 자손인지라 그의 얼굴 오른쪽 위에서부터 목덜미를 지나 가슴으로 내려간 흔적이 검흔이라는 것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선이 가늘면서도 고른 것이 분명 무공을 아는 이가 낸 상처였다. 대체로 무공을 모르는 이가 검으로 사람을 벤다면 그 검이 날카롭더라도 검에 가해지는 힘이 일정치 않아 칼날에 피부가 찢겨 상처가 거칠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주정뱅이의 상처는 상당히 길었고 상처부위가 상당히 굴곡이 진 얼굴에서 가슴으로 이어진 부분이었는데도 상처가 균일한 것이어서 분명 검을 정식으로 수련한 자의 솜씨임에 분명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상처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수법에서 흔히 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사실 보통의 검술로 베거나 찌르더라도 그 궤적은 직선을 그리게 마련이 아닌가? 어쩌면 검법의 고수에 의한 상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아직도 옆에서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는 점소이에게 몇 푼을 쥐어 멀리 내쫒아 버린 뒤 그의 앞에 걸터 앉았다. 검에 의한 상처 탓이었는지 늙은이의 눈은 왼쪽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취기로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이보쇼, 그 목에 생긴 상처는 어떻게 생긴 거요? 검에 베인 것 같은데 맞소?”

  순간 내가 앞에 앉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던 그가 몸을 흠칫 떨며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눈은 방금 전까지 보았던, 술에 찌들어 초점이 잡히지 않던 주정뱅이의 눈이 아니었다. 살기라고 해도 좋을 만치 무섭게 빛나고 있는 눈이었다.

  ‘이, 이건 뭐야?’

  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당당한 대장부로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술주정뱅이 늙은이에게 움츠러든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이런 수치심은 곧 그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는데 이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여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할 것인가, 화를 속으로 눅이고 품위를 과시할 것인가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는 술병을 들고 휭 하니 객점 밖으로 나가버렸다.

  황당해 하며 할 말이 없어 가만 앉아 있는 나의 옆으로 점소이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상을 치우는 척하며 말을 건네었다.

  “아이구, 공자께서는 뭐 하러 저런 주정뱅이 늙은이한테 아까운 돈을 낭비하십니까? 저런 인간들은 은혜를 베풀어도 털끝만치도 감사해하지 않는답니다.”

  나는 잠시 점소이의 빰을 후려쳐 화풀이를 해볼까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교육 받았던 자제력이 웃음마저 띄우며 점소이에게 질문을 건네게 해주었다.

  “뭐 하는 사람인가?”

  “마을 북쪽 숲 근처에 오막짓고 사는 늙은인뎁쇼, 저렇게 일년 내내 술에 절어 산답니다. 이 마을에 흘러들어온 지도 벌써 몇 년 됐는데, 저 노인네 이름조차 모릅죠. 그냥 사람들이 고씨 늙은이라고만 부른답니다.”

  이상한 것은 어쩐 일인지 그 늙은이가 그 날 저녁 내내 잊혀 지지 않았다. 사실 칼자국이야 모진 세상 오래 살아오다보면 어느 녹림의 고수라도 만나서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 자주 있는 일이라곤 할 수 없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정작 그를 계속 생각나게 하는 것은 나를 노려보던 그 눈이었다. 처음 볼 때는 거렁뱅이나 주정뱅이들 특유의 악만 남은 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묘하게도 나중에 다시 떠올릴 때는 기품이 엿보이는 슬픈 눈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슬픈 눈이었다고 치더라도 내가 그토록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그 칼자국에는 마적단 따위들에게 가족들을 잃은 기억이 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된 일이지만 내가 그것 때문에 잠을 설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난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약간의 술과 안주를 사들고 점소이가 가르쳐준 그 노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노인은 집에 없었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있기도 뭣한 일이라 집 앞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바로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어깨에 웬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그 외눈으로 나를 한번 흘낏 보더니 자루를 마당 구석에다 던져놓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철저히 무시당한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화를 참고 노인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간 노인은 저쪽 구석에서 무얼 달그락 달그락 대더니 그릇과 접시 몇 개를 들고 왔다. 문 앞에 서 있는 나는 보지도 않은 채 들고 온 접시와 그릇을 탁자위에 올려놓던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먹으라고 가져 왔으면 이리 가져오게.”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넨 것도 의외였거니와 모르긴 몰라도 노인이 말한다면 투박하고 퉁명스러운 거친 말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예상외로 정중한 그의 말투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저 말투뿐만 아니라 그의 목소리 역시 울림이 깊고 기품이 있었다. 지난 저녁에 보았던 주정뱅이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새 나는 어적어적 걸어 탁자 앞에 걸터앉아 가지고 온 꾸러미를 올려놓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그릇에 덜어 먹기 시작했다. 나 역시 얼결에 그가 따라준 술을 받아 안주와 함께 먹기 시작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모습에 내가 준비했던 말들은 꺼내지도 못하였다.

  사실 내가 처음에 이곳으로 올 때에는 나의 생각은 주정뱅이 노인에게 술이나 먹여가면서 상처에 대한 내력이나 캐물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상상했던 모습은 당연히 신분이 귀한 공자께서 하찮은 노인네에게 인심을 베푸는 것이었다. 노인이 내 앞에서 송구스러워했으면 했지 결코 내가 기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그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상황이 역전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곽수겸이라고 알고 있나? 사람됨이 단정하고 검법과 경공에 매우 조예가 깊던 것으로 보아 강호에서도 제법 명성이 널리 알려졌을 듯한데.”

  팔방검객 곽수겸? 그는 2년 전 오랜 앙숙지간이던 흑룡방과 유씨 일족 사이에 홀로 뛰어들어, 본신의 뛰어난 무공과 기지로 두 편을 마음깊이 감복시킴으로써 화해를 이끌어 냈다는 인물이었다. 그 일로 곽수겸은 강호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데 그 성품이 소탈하고 겸손하여 무림의 흑백 양도가 모두 그와 친구가 되려고 하였다. 그 역시 내가 처음에 목표로 삼았던 검의 고수들 중에 한명이었다. 워낙 홀로 다니길 좋아하는 인물이라 그 행방이 묘연하여 실패하고 말았지만.

  “예, 알고 있습니……!”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노인에게 존댓말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고 말았다. 앞선  말로 노인이 평범한 주정뱅이가 아니라 어느 정도 무림에 관련이 있는 인물임은 확실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그의 내력을 아직 알지 못하는데 먼저 공손한 모습을 보인다면 손해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난 겨울이었던가? 그이도 자네처럼 나를 찾아 왔었네. 물론 내 상처를 보고 그 내력이 알고 싶어 찾아온 것이겠지. 새삼 자네에게 내가 무공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평범한 늙은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네. 이미 짐작했을 테지만 나 역시 자네와 같은 무림인일세. 아니 무림인이었다고 해야 옳겠지.”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다시 한 잔을 가득 채워 넣고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곽수겸은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네. 자네는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옆에 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묻지 말 것을 명하였기 때문이지. 내 자신있게 말하지만 난 자네나 그 곽가 따위의 실력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네. 당금 강호에 어떤 인물들이 설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이길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네. 자네가 혹시 믿지 못한다면 지금 보여주어도 무방하겠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오른손을 들어 방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나무막대기를 향하더니 허공을 격하고 그 손을 움키었다. 그러자 막대기가 마치 그의 손과 보이지 않는 실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의 손으로 빨려 들갔다. 격공섭물이란 단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눈앞에서 실제로 그 재주를 보게 되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금나의 공력으로는 강호에서 알아준다는 아버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막대기의 한쪽 끝을 잡더니 반대쪽 끝에서 부터 손날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팡이가 한토막, 한토막 잘려나가기 시작했는데 기가 막힌 것은 마치 예리한 칼이나 톱으로 자른 것처럼 그 잘린 단면들이 깨끗하고 반듯한 것이었다. 마치 무를 썰 듯 막대기를 다 자른 노인은 나에게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만약 자네가 지금부터 나에 대하여 한마디라도 묻는다면 난 당장 자네를 이 막대기와 같이 만들어 버릴 것이네. 난 살인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겁내지는 않아. 행여 내가 무슨 나쁜 일이라도 꾸미는 인물일까 걱정한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정 믿지 못하겠다면 자네가 실력으로서 나에 대하여 묻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권해주고 싶지 않군.자네는 똑똑해 보이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네. 자 이제 돌아가보게. 어쨌든 술과 고기는 잘 먹었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노인의 말대로 그 집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인의 실력을 본 내가 무엇을 물어 볼 수 있겠는가? 노인의 실력에 댄다면 종세째 아저씨라도, 아니 설령 아버지라 할지라도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물어 보면 죽인다……. 가만, 물어보면 죽인다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다시 길을 돌려 노인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배님, 저는 절대 선배님에 대하여 한마디도 묻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선배님에 대하여 묻는다면 저를 그 즉시 죽이셔도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이건 선배님에 대해 묻는 게 아니니까 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들어온 나를 보고 다소 어이없어 하던 노인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 청이란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청이 무엇인가?”

  “예, 저에게 선배님의 무공을 전수하여 주십시오.”

  노인은 기가 막힌 듯했다. 사실 나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엉뚱하고 어쩌면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사람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니. 하지만 노인은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나를 죽일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쉽게 나를 죽일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죽여 자신의 행적이 알려지는 것을 막았을 것이었다. 어차피 나는 필살의 무공을 배워야 하지 않았는가. 반년 넘게 헤매어도 고수라 할 만한 이를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나에게 이 노인과 같은 절정고수의 등장은 어쩌면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노인이 검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은지는 알 수 없으나 노인 정도의 무공이라면 다루지 못하는 병기가 있을 리 없었다. 고수들에게는 나뭇가지나 보검이나 모두 일격에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고들 하지 않는가. 설령 검을 다루지 못한다고 해도 또 어떤가. 노인의 실력이라면 아까의 그 나뭇가지처럼 사람의 목 따위는 단숨에 뎅겅 잘라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노인이 나의 청에 쉽게 응하리라고는 나도 생각지는 않지만 나야 손해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노인이 나의 청을 거절한다면 몇 번 더 사정해 보다가 원래 계획대로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노인은 묵묵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왜 나의 무공을 배우려고 하는 겐가.”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사연 그대로 솔직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사실 어떤 녀석이 내가 사랑하던 여자를 빼앗아 갔기에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 무공을 배우려고 합니다.’

   이런 말은 철없던 당시의 나로서도 몹시 민망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기껏 나의 이유라는게 그러한 것이라면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복수?”

  갑자기 말이 끊겼다.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던 나는 그가 갑자기 어떤 생각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생각에 방해되지 않도록 숨소리조차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단번에 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데 여기서 그를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숙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네는 은혜와 원한이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었으나 어쨌든 나는 그의 질문에 최대한 공손히 대답할 필요가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은혜와 원한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노인은 나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나의 가장된 공손함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싶어 다소 가슴이 떨려왔다.

  “그렇단 말이지…….”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생각에 잠기던 그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생각해보겠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고, 지금은 그만 나가주었으면 좋겠군.”

  반쯤은 승낙한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뭔가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객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면 볼수록 사실 다른 사람들 특히 무림인들로부터 떨어져 살려고 하는 그가 그 이유도 빈약한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을 단번에 거절하지 않고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어쨌든 나는 그날 밤 그가 어떤 대답을 할까 하는 생각에 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또 술과 안주를 사들고 그를 찾아갔다. 그는 집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사온 술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내가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좋네. 자네의 말대로 자네에게 나의 무공을 가르쳐주기로 하겠네. 하지만 자네가 몇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네. 하나는 어제 말했듯이 절대로 나에 대해선 물어서는 안 되네. 알겠나?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긴 하지만 우린 절대 사제지간이 아닐세. 절대 나를 사부라고 부르지 말게.”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사부란 말 외에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네. 자네는 오늘부터 나에게 수련을 받을 것이네. 내가 자네를 가르치겠다고는 했지만 난 자네를 오랫동안 가르쳐주고 싶지는 않네. 나는 다만 자네에게 두 가지 검법만을 가르쳐 줄 거야. 하지만 나의 무공은 검이 주를 이루며 그에 따라 심법이나 경신술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배운다면 나의 무공의 대부분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노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자네는 매일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게나. 수련은 저녁 늦게까지 이어질 것이야. 그리고 수련이 끝나면 자네는 바로 자네의 숙소로 돌아가게. 수련 외에는 나를 찾아오지 말라는 이야기이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자, 그럼 나를 따라오게.”

  이렇게 나의 검법 수련은 시작되었다. 그가 가르쳐 주는 무공의 수련법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내가 집에서 있을 때 수련을 하게 되면 기공, 병기술, 권각술을 모두 따로 수련하였다. 하지만 그가 가르쳐주는 무공은 그것과 달리 내외공과 검법이 동시에 수련하게 되었다.  그만큼 힘도 많이 들었지만 대신에 그 성과는 따로 수련하던 때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한 그가 가르쳐주는 검법이라는 것 역시 묘한 점이 있었다. 그는 두 가지 검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이상한 것은 두 가지 검법이 상당히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는 당당하면서도 화려했다. 처음 보는 검법이었지만 명문의 검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검법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 검로나 검법진행에 따른 심법이 앞의 검법과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이 검법은 그 수법이 지극히 잔인하고 인명의 살상 이라는 목적 외에는 전혀 다른 군더더기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검법을 앞의 검법과 확실히 구분짓는 것은 그 빠르기였다. 비록 지극히 미약한 나의 공력과 검법의 조예로는 그 검법의 쾌속함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지만 노인이 보여준 쾌검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것으로 정말 노인의 장담처럼 당금 강호에서 그 쾌속함을 받아낼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노인은 나를 수련시키는 동안에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련이 끝나면 잠시라도 그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수련의 지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구결이나 동작 등에서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노인은 전혀 화내거나 싫증내지 않고 예의 특유의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바른 동작을 취할 때까지 끈질기게 지도해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나에게 심혈을 기울이는 이런 노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노인에게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내가 처음에 노인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 때만 해도 강호를 등진 노인에게 이득이나 챙겨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 탓에 노인이 우리는 절대 사제지간이 아니란 말에는 정말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만약 이런 노인과 사제의 연이라도 맺는다면 나는 노인이 죽을 때까지 노인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성실하게 대해주는 노인의 모습은 엄격한 아버지에게 항상 불만을 느끼던 나로 하여금 부자의 정 비슷한 것까지 느끼게 하였다. 때로는 노인에게 친근한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오히려 그런다면 나와 노인의 이 기묘한 관계가 깨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나 역시 필요한 말 외에는 노인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였다.

  내가 이렇듯 노인에게 정을 느끼는 사이 오래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란 처음의 노인의 말과는 달리 어느새 1년이 지나게 되었다. 이 1년 동안 나는 그 숙련도나 공력이 다소 미흡하긴 하지만 노인이 가르쳐준 두 가지의 검법을 모두 배우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내가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내가 의외로 무공에 소질이 있더란 것이었다. 비록 집안 분위기상 무공 수련은 어려서부터 해왔지만 내가 원래 좀 게으른 편이고 스스로가 무공의 자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수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집에서는 맏아들인 나보다 단정하고 엄격하여 아버지와 똑 닮은 내 둘째 동생에게 오히려 기대를 걸곤 했다.

  하지만 노인과 지내온 1년 동안 나는 무공을 익히고 스스로를 단련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처음 내가 집을 나오게 된 계기였던 소위 복수란 것이 얼마나 철없던 일인가도 깨달았다. 떠나간 그녀를 좋아하던 마음도 내가 생각하던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복수고 뭐고 길길이 날뛰던 때를 생각하면 그저 우습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수련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노인을 찾아갔다. 다른 날 같으면 내가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곧바로 수련장소이던 숲속의 공터로 향하던 노인이 그날은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앞에 와서 앉게.”

  뭔가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나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의자를 가져다 침상 앞에 앉았다.

  “자네는 이제 나의 무공을 얻었다고 할 수 있네. 아직 제대로 익히려면 더 오랜 수련을 해야겠지만, 지금부터는 나의 도움이 없이 혼자 수련한다 해도 큰 어려움이 없을 걸세. 하지만 내 무공을 완벽하게 익힌다고 해도 자네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야. 자네는 그 내력이 너무 미약하여 내가 가르쳐준 검법이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거든. 그래서 오늘은 자네의 공력을 단번에 크게 넓힐 수 있는 방법을 배워보도록 할 것이네. 우린 평소 내공과 외공을 같이 해왔지만 오늘은 좌공만 하겠네. 이건 굳이 숲속으로 갈 필요가 없겠지. 침상으로 올라와 나를 마주 보고 앉아보게.”

  내공이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자더라도 꾸준히 수련을 해야 그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천년설삼이나, 수 천 년 묵은 거북의 내단을 먹고 수십 년의 공력을 단숨에 얻기도 한다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년설삼이나 수 천 년 묵은 거북이 실제로 있기나 할 것인 지부터 의문이었다. 그런데 노인은 단숨에 나의 공력을 넓혀준다고 하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인의 앞에 노인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노인이 번개처럼 손가락을 날려 내 전신의 혈도를 찍어 대었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비명도 못 지르고 그저 노인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노인은 겁먹은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손은 등 뒤에 한손은 가슴에 올려놓더니 갑자기 나에게 엄청난 힘을 쏟아내었다. 삽시간에 나의 몸으로 흘러 들어온 노인의 내력이 내 경맥을 타고 온 몸으로 펴져가고 있었다. 몸이 불에 타는 듯 엄청난 고통을 느낀 내가 무의식중에 내력을 돋우어 이에 대항하려고 하자 노인이 말하였다.

  “자네를 해치려는 게 아닐세. 몸의 힘을 풀고 다만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게나.”

  터진 둑의 물처럼 노인의 내력이 각 경맥을 굽이쳐 들어가는 동안 나의 몸은 불구덩이에 빠진 듯 달아오르기도 하고 얼음물 속에 있는 듯 차가워지기도 하여 도저히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고 온몸이 산산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사지로 흩어지며 각 경맥을 누비던 노인의 내력은 어느덧 회음부근에서 하나로 모여서는 음기와 양기로 나뉘었다. 이렇게 나뉜 두 가지 기운 중에 차가운 기운은 임맥을 타고 뜨거운 기운은 독맥을 타고 머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더니 정수리 부근에서 서로 만나 부딪혔다. 순간 머리 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면서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더니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초막 안은 불도 켜놓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나는 내가 침상위에 누워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일어나기 위해 용을 써보았으나 몸에는 반 푼의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사지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렸나 보군.”

  어둠속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초막 안에 있는 듯 했다.

  “억지로 힘을 쓰려 하지 말게. 몸의 마비는 내일 아침께나 되면 풀릴 게야. 자네가 갑자기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해 주겠네. 자네는 무공에 대한 소질이나 이해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지만 그동안 너무 수련을 하지 않아 당장의 공력이 지극히 미약함은 차지하고라도 우선 온몸의 경맥이 굳고 막히어 앞으로 꾸준히 수련을 한다고 해도 그 성취는 크지 않을 것이었네. 그래서 오늘 나의 공력을 이용하여 자네의 전신 14개의 모든 경맥을 뚫어 준 것이야. 하지만 이런 방법은 시전자에게 높은 수준의 공력과 그 소모를 요구할 뿐 아니라, 잘못하는 경우에는 평생 시전자나 피시전자 모두 주화입마되어 광인이 되거나 폐인이 되고 마는 위험한 방법이기 때문에 흔히 시전하지 않는 것일세. 하지만 지금 자네는 무사히 성공하였네. 자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비록 온몸의 막힌 경맥이 모두 뚫렸다고 하더라도 너무 단시간 내에 급히 뚫린 것이라 각 경맥에 상처도 적지 않게 입었다는 것이네. 때문에 앞으로 자네는 49일 동안 절대 운공을 하여서는 안 되고 내가 적어준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지어 먹어야 할 것이네. 또한 짜고, 쓰고, 매운 음식 대신 담백한 음식만 가까이 해야 할 것이고, 무리하게 힘을 쓰는 것도, 극심하게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일세. 물론 여색을 가까이 해서도 안 돼. 이렇게만 한다면 자네의 몸은 스스로 회복되어 49일이 지난 후에는 내공을 수련함에 그 성취가 매우 빠를 것은 물론이요, 머리도 맑아지고, 음양이 조화되어 웬만한 질병이나 춥고 더움이 침범치 못하는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네. 하지만 내가 자네의 몸에 공력을 남겨준 것이 아니라 다만 막히고 굳어있던 경맥을 뚫고 닦아 준 것임을 명심하게. 아직도 자네의 공력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으니 자네 스스로 내공을 쌓아가야 한다는 말일세.”

  노인의 말이 끊기자 초막 안은 다시 정적이 감돌게 되었다. 나도 입을 열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도시 혀조차 마음대로 놀리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소리도 없이 노인은 앉아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내가 왜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하였는가 알고있나?”

  항상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이었지만 노인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지 않기로 했던 터라 물어보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그것을 알려면 우선 자네가 내게 배운 무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겠지. 자네가 너무 어려 알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적검문의 무공일세. 40년 전쯤만 하더라도 강호에서 꽤 알아주던 검술이었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파였다. 어려서부터 이야기 듣기를 좋아해 여러 아저씨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런 문파가 강호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난 적검문주의 둘째 아들이었다네. 우리 적검문은 당시만 하더라도 강호에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 내 나이 20살이 되던 해에 아버님의 절친한 친구의 중매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았어. 어떻게 보면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그 행복이 채 백 일도 안 되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으로 이어졌으니…….”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노인은 곧 담담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아버님을 대신하여 매향검파 장문인의 생일을 축하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었네. 여느 때처럼 아내가 나를 문 앞까지 마중 나왔더군.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아내의 모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네. 자네는 무엇이 달랐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아내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던 거야. 놀란 내가 아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나는 아내의 손을 보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내 형님의 머리를 들고 있었던 것이지. 너무도 놀란 내가 어찌된 상황인지 어리둥절하여 그대로 서서 얼어버린 사이, 아내는 나를 향해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네. 아내의 검은 내 얼굴과 가슴을 베어버렸지. 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오더군. 그 남자는 이죽이죽 웃으며 아내를 사매라고 부르더니 서방님은 잘 처리했냐고 묻더군. 그러자 그렇게도 나긋나긋하고 수줍음 많던 아내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독기 어린 목소리가 아내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겠나. 자꾸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면 사형의 목부터 날려버리겠다던가? 나는 계속되는 출혈로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그렇게 피를 흘리고도 죽지를 않았더란 말이야. 상처가 길고 크게 나긴 했지만, 목숨을 앗을 만큼 깊지는 않았던 것이지. 따가운 햇볕아래 끈적하게 굳어가는 핏물 속에서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네. 그리고는 기다시피 집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을 찾아보았지. 아버님, 사숙, 형제, 사제들 할 것 없이 모두 마당에 모여 있더군. 하지만 머리만 남아 있었어.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눈물도 나오지 않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더군. 나는 그대로 누워서 하늘만 쳐다 보았다네.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의 마지막 시신이 될 것은 명백한 일이었지. 그러다 나는 또 다시 정신을 잃었네. 그리고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서야. 눈을 떠보자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송노인의 모습이 보이더군. 그는 가끔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장원으로 가져오던 늙은이였는데 그날도 우리 집에 물고기를 들고 왔다가 죽어가는 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었지. 송노인의 간호 덕분에 살아난 나는 그제야 도대체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 볼 정신이 들더군.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가족들을 죽인 것일까, 그날 밤 아내는 왜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나를 벤 사람이 과연 아내가 맞는 것일까,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아내가 사형이라고 부르던 사람은 누구인 것일까, 정말 아내가 가족들을 죽인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아내는 왜 그런 것일까, 도대체 아내는 어떤 사람인 것일까. 두서없이 질문을 만들어 내던 나는 아내의 정체에 생각이 이르자 비로소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알아차렸어. 그것은 나에게 아내를 중매해 준 아버님의 친구, 심윤에게 가서 아내에 대해 묻는 것이었지. 한참이 지나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자 나는 심윤을 찾아갔지만 그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심윤은 청련파의 호법이 되어 이사를 갔다더군.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네. 청련파라면 산서지방의 세력 확장을 두고 우리 적검문과 경쟁을 해오던 곳인데, 어떻게 아버님의 절친한 친구라는 그가 그곳의 호법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의심이 떠올랐네.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 의심이란 혹시 심윤이, 아버님의 둘도 없는 친우라던 그가 우리 적검문을 배반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지. 하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억지로 그런 의심을 떨쳐 버리려 하였네. 심윤과 아버지가 절친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지.

  한참을 갈등하던 나는 결국 청련파를 찾아갔어. 청련파에 몰래 잠입해 들어간 나는 낯익은 두 사람을 보고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네. 청련파 장문인 뒤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심윤과 호화로운 옷을 입고 상단에 서 있는 아내를 말일세. 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네. 어떤 계략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적검문의 문주이던 아버님마저도 저들의 손에 돌아가셨는데 아직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머릿수로 그들에게 뛰어든다고 해봤자 가족들의 복수는커녕 그들의 미숙한 일처리를 완결지어 주는 것만 되지 않겠나. 그대로 송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날로 복수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네.

  원래 우리 적검문의 무공이란 당당하고 정대함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네. 사람을 죽이기 보다는 구하는 것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내가 수련을 하며 줄곧 그들을 죽이는 것만 생각하게 되자 검놀림이 점차 잔인하고 편협하게 변하더군. 이것이 기는 뜻에 따른 다는 것이겠지. 자네가 배웠던 두 가지 검법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네.

  수련하다가도 당장에 그들을 찾아가 처치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스스로를 다스리다보니 어느새 8년이 지나가버렸네. 나는 그제야 어느 정도 나의 성취를 인정할 수 있었고 복수를 위해 청련파를 찾아갔지.

  그날 밤은 그믐인데다가 비마저 억수같이 내려 정말 눈앞에 갔다댄 자기 주먹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 나는 우선 청련파의 장문인부터 찾아갔네. 마침 수고를 덜어주려는지 심윤도 함께 있더군. 멀쩡히 살아있는 나를 보고 너무 놀라 입조차 다물지 못하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네. 비록 그들 모두가 강호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들이었지만 나의 쾌검에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네. 그들의 비명을 듣고 청련파의 제자들이 몰려들었지만 난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네. 나 혼자 그 많은 인원을 다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 몸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지. 설령 내가 청련파의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 오직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은 오직 아내가 남았을 뿐이었으니까. 청련파의 본청에 불을 지른 후 몰려드는 그들을 뛰어넘어 아내의 거처로 찾아간 나는 심윤과는 달리 나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아내를 보고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네.

  아내는 지극히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설마 자기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겠냐면서 검을 빼어 들더군. 나는 곧 아내와 싸우게 되었는데 전에 심윤과 청련파 장문인을 동시에 해치울 때도 채 이십초가 필요없던 내가 아내에게는 오십여초 가까이 끌게 되었다네. 그렇게 만든 것은 아내의 실력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당황스러움이었네.  너무나도 침착하고 담담한 아내의 모습이 그만 날 당황하게 만든 거야. 하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아내의 검을 부숴버린 후 난 아내의 목에 칼을 겨누었네. 그러나 아내의 눈은 그 순간에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네. 이를 악물며 칼을 찌르려는 순간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는 거야.

  모든 일이 뒤바뀌어 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네. 갑자기 아내의 침상 뒤에서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타난 것이지. 그 아이는 울며 아내의 품으로 뛰어들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아내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네.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난 뭔가에 머리를 얻어 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어.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네. 난 아내에게 이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다네. 대답하지 않는 아내에게 내가 이 아이가 누구냐고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자 시종 아무런 감정을 찾아볼 수 없던 아내의 눈에도 점차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네. 아무리 내가 고함을 질러도 아내는 그저 아이만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는데 너무도 기가 막힌 내가 스스로 내 검을 반쪽으로 분질러 버릴 즈음에는 이미 깊이 흐느끼고 있었다네. 난 도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어. 나의 가족을 처참하게 도륙한 원수는 바로 아내였네. 그렇다면 난 어서 아내를 죽여 가족들과 나의 한을 풀어야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를 닮은 그 아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내 앞에서 내 아들을 껴안고 울고 있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그 둘은 내 가족인가 아닌가. 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네.  

  이미 밖에는 청련파의 모든 인원들이 모여 있었지만 내가 이들 모자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네. 아마 아내의 위치가 청련파 안에서도 제법 높았던 모양이지. 나는 결국 아내를 죽이지 못했네. 그저 닥치는 대로 눈앞에 보이는 몇 놈을 베어버린 뒤 그 곳을 도망치듯 떠나버렸을 뿐이지. 그리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을 찾아가 본 적이 없어.

  자네에게 나의 무공을 가르쳐 준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사실 난 모든 은원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네. 복수를 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난 이미 이 세상에선 어떤 미련도 없네. 난 지쳤어. 은혜도 원한도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어. 그저 앞뒤가 안 맞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 따윈 잊어버리고 싶을 뿐일세.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왜 이 무가치한 하루하루를 술에 기대어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선조들에 대한 송구함과 한 때 무인이었던 자의 덧없는 욕심 때문이네. 자네가 배운 적룡이십삼검은 수 대에 걸쳐 나의 조상들이 연구하고 보완한, 그야말로 우리 가문의 모든 노력과 재능이 담긴 무공으로 기, 경, 검이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를 북돋우는 오묘하기 그지없는 무공일세. 만약 적합한 이가 이를 제대로 익힌다면 강호에 그 어떤 인물이 있어서 이에 맞설 것인가. 하지만 이런 훌륭한 무공이 나에게 이르러 더 이상 전해지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일 것일세.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네가 우리 적검문을 다시 일으켜 주기를 원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 것이라 생각하네. 이미 깨어진 그릇을 다시 붙이고 고쳐보아도 그것이 다시 예전의 그 그릇이 될 수는 없듯이 적검문은 이젠 이 세상에 다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또 다시 존재시킬 필요도 없는 것이야.

  자네는 타고난 근골이 강건한데다가 오성이 매우 뛰어나고 무엇보다도 오늘 내가 이렇게 자네의 14개 경맥을 모두 닦아주었으니 앞으로 무공을 수련함에 매우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네. 내 장담하네만 앞으로 4, 5년만 열심히 수련한다면 강호에서 자네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보다 부단히 노력한다면 후세에까지 남길 높은 이름도 얻을 수 있겠지. 이건 그저 사실일 뿐 내 공치사를 하기 위한 과장이 아니네.

  이렇게 난 자네를 위해서 1년을 썼어. 그렇다면 자네도 자네의 인생에서 나를 위해 1년이란 시간을 사용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이제 말하려는 것은 자네에게 부탁하려는 것임과 동시에 자네를 가르친 두 번째 이유일세. 자네를 가르치면서도 사제의 연을 맺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지.

  자네는 앞으로 딱 1년 동안만 나의 아내와 아들을 찾아주게. 찾아낸 그들이 의식에 부족함이 없고,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있다면 구차한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그냥 돌아올 것이나, 만약에라도 그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면 그저 먹고 살기에 곤란함이 없고, 남에게 불필요한 괄시를 받지 않게만 조치해 주게나. 자네는 명문가의 자손인 듯싶으니 번거롭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네. 만약 1년이 지나도 그들을 찾지 못하였다면 그 후에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간단한 예라도 준비해 주게.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네. 내 아내의 이름은 서연의일세. 그들이 지금껏 살아있다면 아내는 58세, 아들은 40세 정도 되었겠지.

  사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이름과 나이만 가지고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일세.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것은 꼭 그들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세상을 떠나기 전, 기구하게 맺어진 인연이나마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최소한의 구실을 하려는 것일세. 그들을 찾고 찾지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겠나? 차마 내 손으로는 할 수 없던 일을 자네에게 맡긴 거야.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났어도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물론 혈도가 눌린 탓이었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지만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고통이라고는 그저 아버님의 꾸중밖에 겪어본 일이 없는 내가 어떻게 그에게 위로나 동정을 보일 수 있겠는가. 기껏 복수라고 생각한 것이 떠난 여자에 대한 것이 전부인 내가 어떻게 그 깊은 고통과 분노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내가 혹시 그가 밖으로 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 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내일 아침이 밝기 전 이곳을 떠날 것이네. 원래는 자네에게 아무 말 없이 떠나려고 했네만, 그래도 이 40여년 동안 자네처럼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이는 없었네. 믿지 못할지 모르겠으나 나름으로 자네에게 정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네.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잊지 말고, 아무쪼록 자네는 나와 달리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잠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잠이 들면서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내 수혈을 스치던 그의 거칠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내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그의 허름한 초막 안을 둘러보았으나 새삼 무엇이 들고 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탁자 위에 단정한 글씨의  처방전이 한 장 올려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맨 몸 그대로 떠난 모양이었다. 그의 초막에서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던 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객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돈을 모두 털어 말을 한 마리 사고는 행장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말을 끌고 나온 나는 저 지평선의 끝까지 뻗어있는 길을 살폈다. 분명히 그 길은 같은 길이되 낯설게 보였다. 지금의 내가 1년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