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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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위 세상 그냥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으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길을 가다가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교수가 최악의 성적을 내렸고, 혜미는 여전히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게 나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 것도 이유중 하나지만 그보다 더 마크로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싸이고 싸여가는 세계의 역사가 나를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짜증났다. 이 세상이.
그렇지만 진짜로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재고했을 것이다.
제길,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건 실언이었다.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말해두지만 이건 결코 잘못된 표현이나 과장이 아니다. 말그대로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주변에 부산하게 걸어가던 사람들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자동차들, 하늘을 우러러 보게 만들던 고층빌딩들, 그 하늘자체와 땅마저도 무너져 내렸다.
잠시 후 나는 세상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사라졌다. 말그대로 세상이 사라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세상은 완전한 무색의 아공간으로 변했다. 전후좌우, 상하까지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내 손을 쳐다보았지만 나만은 세상이 사라지기 전과 다름없이 같은 옷,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유령은 아니었고 아직 살아있었다.
잠시 패닉상태에 빠졌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파악했다. 세상은 멸망하고 나만 살아남았다. 알고 있다. 정말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내릴 수 있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래. 정답이야.”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가죽옷을 입고 검은 채찍을 든 흑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외모였지만, 그 복장센스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나이외의 인간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누구시죠?”
나는 되도록 침착하게 보이도록 애쓰며 말했다.
“YHWH다.”
여자가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내 이름은 YHWH다. 와이-에이치-더블유-에이치. 인간들은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부르더군.”
세상에. 기독교 신자들이 들었으면 미치고 환장할 만한 얘기였다.
“와우. 신이셨군요.”
나는 짐짓 놀란 척 해 보았다.
“못 믿겠다는 건가?”
여자는 나를 째려보았다.
“그런 복장으로 신의 위엄을 주장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차라리 서큐버스라고 하면 믿겠군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옷은 노출이 상당히 심했다. 건전한 청년인 나로써는 검은 가죽옷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몸매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
“뭐? 지금 SM을 무시하는 거냐?”
… 결국 그 컨셉이었던 거냐!
“저……. 조금 더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다음에 자기 존재를 주장하시는 편이 설득력있을텐데요.”
“쳇. 아브라함때만 해도 먹혔었는데…….”
“도대체 뭐 하러 나타난 겁니까!”
평소 길가다가 이런 여자가 다가와서 자기가 신이라는 얘기를 했다면 정신병자로 취급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상한 공간에서 뜬금없이 나타난 그녀의 말은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와이-에이치-더블유-에이치씨.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좀 해 주실까요?”
“너는 선택받았다.”
그녀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사람도 아니라서요, 그다지 기쁘지 않은데요.”
시답잖은 농담으로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심각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너는 선택받았다. 네가 이제부터 YHWH다.”
“예?”
그녀의 말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미불명의 알파벳나열도 이상하거니와 내가 이제부터 신이라고?
“네가 이제부터 신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도대체 왜?”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고 나혼자만이 살아남아 이상한 아공간에 갖힌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이상한 SM취향의 여자가 나타나 자기가 신인데 이제부터 그 자리를 내게 넘겨준다고 한다. 내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태초의 법칙으로 정해져 있다. 진정으로 우주의 멸망을 원하는 자가 나타나면 YHWH는 우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를 그에게 넘길 수 있다. 그리고 YHWH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는 새로 우주를 창조시켜야 하지.”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무슨 말인지 정리 좀 합시다. 그러니까 일단 당신이 세상을, 아니 우주를 창조한 YHWH라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아직도 못 믿겠지만 넘어가죠. 그리고… 당신 말은 그러니까… 우주가 멸망했다는 건가요?”
“그래.”
그녀는 잔혹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한 말때문에?”
“그래. ‘이따위 세상 그냥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는데…….’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래. 기억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멸망해버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말 한 마디때문에 우주가 멸망할 수도 있나요?”
“애시당초 말 한 마디로 시작된 우주니까.”
그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종말에도 말이 있었군.
“그건 그렇다치고 왜 하필 저죠? 지금까지 우주가 시작된 이래 그정도 막말을 씨부린 인간이 줄잡아 억단위는 넘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내가 이 구제불능의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때마침 네가 그런 말을 한 거다. 그래서 멸망시켜버렸지. 그리고 너는 지금부터 YHWH가 된 거야.”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제가 운이 없어서 걸린 거로군요.”
YHWH도 이 말에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다른 질문을 했다.
“그래서…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제가 우주를 창조해야 한다고요?”
“그래. 네가 이제부터 YHWH다. 그리고 새로 우주를 창조해야 한다. 얼떨결에 신이 된 소년.”
“어째서요?”
“그게 법칙이니까. YHWH가 우주를 멸망시키고 나면 누군가가 그 이름을 이어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해야 해.”
미치겠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나는 그냥 홧김에 악담을 한 것뿐이다. ‘이따위 세상 망해버려’ 이런 말정도도 입에 안 담아 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해야 하느냔 말이다.
“다시 돌려줘요.”
내가 말했다.
“뭐?”
“다시 우주가 망하기 전으로 돌려달라고요. 누가 신이 되고 싶댔나요? 멋대로 우주를 멸망시켜놓고, 멋대로 신으로 만들어놓고 우주를 창조하라고요? 저는요, 신이 되고 싶지도 않고 우주창조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살던 우주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참고 살 테니까 다시 멸망시키기 전으로 돌려줘요.”
YHWH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왜요? 신이라면서요.”
“우주가 멸망해버렸으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신이라면 시공정도는 맘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시공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지. 그렇지만 우주가 멸망해버린 이상 나의 시공은 끝난 셈이야. 지금 이곳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 셈이니까.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아무리 다른 곳으로 가 봐도 지금 여기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어. 적어도 네가 우주를 창조하기 전까지는.”
“쳇. 무슨 신이 그래?”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자면 우주의 멸망은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싫어요.”
“뭐?”
“싫다구요. 그래, 우주가 멸망한 게 사실이라 칩시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거죠? 싫어요. 우주창조따위 제 알 바 아니에요.”
내 말에 YHWH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주창조란 거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게 뭐든 현실로 이뤄질 수 있어. 만약 네가 원한다면 2차대전에서 히틀러가 승리하는 세계를 만들 수도 있고, 인간따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도 있지. 어쩌면 엘프와 나가가 공존시킬 수도 있고, 마법과 과학기술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도, 온갖 미녀를 모아 할렘을 만들 수도 있지. 아니면 원래 살고 있던 세상과 똑같은…….”
“싫어.”
나는 말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나는 한참동안을 입에 싫어라는 말을 되뇌이며 절규했다. 사실 무엇이 싫은 지 나도 잘 몰랐다. 단지……. 싫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이 싫었다. 싫어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끝났냐?”
내 절규가 끝났을 때, YHWH가 말했다. 어느사이엔가 나는 귀에 손을 댄 채 웅크리고 있었다.
“어린애 투정은 그만 부려.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두려워 할 거 없어. 넌 이제부터 신이라고. 만들어. 네 욕망대로 만들어. 네 갈비뼈를 떼내던 흙으로 빚던 만들라고. 이게 네가 원했던 거잖아.”
네가 원했던 거라고?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이건 어때?”
YHWH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흔드는 손의 움직임은 점차 인간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가는 그녀의 모습은 경이를 느끼게 하며 그녀와 만난 후 처음으로 그녀가 신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만들어낸 인간이었다. 내 허리에 닿을락 말락 한 그 여자아이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체구를 하고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나는 로리콘이나 오타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한 목소리에는 가슴이 녹아내렸다. YHWH는 자랑스러운 듯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항간에 유행하는 여동생모에다. 어때?”
“필요없어!”
필요없다는 내 말에 여동생모에(?)는 뿅하고 사라졌다. YHWH는 묘한 비웃음을 만들며 말했다.
“오. 여동생모에는 취향이 아닌가 보네. 그럼 이건 어때?”
그녀는 또다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여자의 모습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나는 차마 할 말을 찾지 못 했다. 잠시 후에 겨우 YHWH에게 화를 낼 수 있었다.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후훗. 네가 좋아하던 박혜미양이다. 우주가 멸망하기 전에는 너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넌 신이야. 네가 원한다면 이 여자는 네 거다.”
내 앞에는 우주가 망하기 전에 좋아했던 혜미가 있었다. 살았을 때와 똑같이 화려한 복장에 늘씬한 몸매, 황갈색의 머리, 뚜렷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평소에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눈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 혜미는… 죽었어.”
“난 장난치는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원하는 걸 현실로 만들었을 뿐이지.”
“난 원하지 않아.”
내가 외쳤다.
“원하지 않는다고? 어째서지? 좋아하고 있잖아.”
“혜미는 죽었어. 그 빌어먹을 우주멸망때문에 죽었다고. 네가 만들어낸 건 허상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난 허상따위 좋아할 생각은 들지 않아.”
“아냐. 허상따위가 아냐. 진실이야. 네가 만드는 건 뭐든 진실이 된다고.”
YHWH가 말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다.
“치워줘요.”
“뭐?”
나는 혜미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치워달라고요. 그거.”
“몇번을 말해야겠어? 이건…….”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뇨. 그건 진실이 될 수 없어요. 우주는 멸망했고 혜미는 죽었어요. 아무리 혜미를 다시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건 혜미가 될 수 없어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밖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YHWH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는지 혜미를 없애주었다.
“그냥 이거 꿈이라고 해 주시지 않을래요? 아니면 우주의 소중함을 모르는 아이를 위한 교훈극이었다는 결말은 없나요?”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홧김에 말도 안 되는 말을 해 버렸다.
“그런 결말을 원하니?”
“예?”
“이게 꿈이기를 바라냐고?”
“설마 이게 꿈이었다는 건가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YHWH, 당신 죽여버릴 거야.
그렇지만 YHWH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그렇진 않아.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할 수는 있지. 다시 네가 살던 세상과 똑같은 세상을 창조한 다음, 네가 살던 모습대로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우주의 멸망따위 없었다고 믿는 거야.”
헉. 신이 그런 짓 해도 되는 거냐.
“아뇨. 말했잖아요.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아까부터 진실진실하는데, 몇번을 말해야겠니? 네가 만드는 건 뭐든 진실이 된다니까. 어차피 네가 살던 세계따위 내 망상으로 만든 세계에 지나지 않아.”
“설사 그렇다 해도…….”
YHWH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두려운 거지?”
“아니에요.”
나는 정색을 했다.
“솔직히 말해봐. 두렵지? 두렵잖아.”
그녀의 몸이 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얼굴의 그녀의 가슴에 안겼다.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해봐.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진심이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두려워요. 두려워요.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아요.”
“그래. 알아.”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이 났다.
“어째서……. 어째서인가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만들어.”
“만약에 제가 우주를 창조하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그렇게 되면 내 역할은 끝나고,”
끝나고?
“사라지는 거지.”
“죽는 건가요?”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죽겠니? 노병은 죽지 않아. 단지 사라질 뿐이지.”
“싫어요!”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 싫다구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따위 필요없어요.”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훗. 우주를 끝장낸 녀석이 마음 약하기는. 걱정마. 나는 희생되는 게 아니니까.”
나는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너도 이 짓 오래 하다보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은 누군가의 피와 눈물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가장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 널 거야.”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미안해.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그녀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만들어. 네가 원하는 세상을.”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주를 창조했다.
(8/29)
언제나 진지하게 한줄감상을 써 주시는 귀우혁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무도 모르는 채 묻히는 제 단편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네요.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으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길을 가다가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교수가 최악의 성적을 내렸고, 혜미는 여전히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게 나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 것도 이유중 하나지만 그보다 더 마크로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싸이고 싸여가는 세계의 역사가 나를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짜증났다. 이 세상이.
그렇지만 진짜로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재고했을 것이다.
제길,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건 실언이었다.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말해두지만 이건 결코 잘못된 표현이나 과장이 아니다. 말그대로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주변에 부산하게 걸어가던 사람들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자동차들, 하늘을 우러러 보게 만들던 고층빌딩들, 그 하늘자체와 땅마저도 무너져 내렸다.
잠시 후 나는 세상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사라졌다. 말그대로 세상이 사라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세상은 완전한 무색의 아공간으로 변했다. 전후좌우, 상하까지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내 손을 쳐다보았지만 나만은 세상이 사라지기 전과 다름없이 같은 옷,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유령은 아니었고 아직 살아있었다.
잠시 패닉상태에 빠졌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파악했다. 세상은 멸망하고 나만 살아남았다. 알고 있다. 정말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내릴 수 있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래. 정답이야.”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가죽옷을 입고 검은 채찍을 든 흑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외모였지만, 그 복장센스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나이외의 인간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누구시죠?”
나는 되도록 침착하게 보이도록 애쓰며 말했다.
“YHWH다.”
여자가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내 이름은 YHWH다. 와이-에이치-더블유-에이치. 인간들은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부르더군.”
세상에. 기독교 신자들이 들었으면 미치고 환장할 만한 얘기였다.
“와우. 신이셨군요.”
나는 짐짓 놀란 척 해 보았다.
“못 믿겠다는 건가?”
여자는 나를 째려보았다.
“그런 복장으로 신의 위엄을 주장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차라리 서큐버스라고 하면 믿겠군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옷은 노출이 상당히 심했다. 건전한 청년인 나로써는 검은 가죽옷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몸매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
“뭐? 지금 SM을 무시하는 거냐?”
… 결국 그 컨셉이었던 거냐!
“저……. 조금 더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다음에 자기 존재를 주장하시는 편이 설득력있을텐데요.”
“쳇. 아브라함때만 해도 먹혔었는데…….”
“도대체 뭐 하러 나타난 겁니까!”
평소 길가다가 이런 여자가 다가와서 자기가 신이라는 얘기를 했다면 정신병자로 취급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상한 공간에서 뜬금없이 나타난 그녀의 말은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와이-에이치-더블유-에이치씨.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좀 해 주실까요?”
“너는 선택받았다.”
그녀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사람도 아니라서요, 그다지 기쁘지 않은데요.”
시답잖은 농담으로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심각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너는 선택받았다. 네가 이제부터 YHWH다.”
“예?”
그녀의 말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미불명의 알파벳나열도 이상하거니와 내가 이제부터 신이라고?
“네가 이제부터 신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도대체 왜?”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고 나혼자만이 살아남아 이상한 아공간에 갖힌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이상한 SM취향의 여자가 나타나 자기가 신인데 이제부터 그 자리를 내게 넘겨준다고 한다. 내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태초의 법칙으로 정해져 있다. 진정으로 우주의 멸망을 원하는 자가 나타나면 YHWH는 우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를 그에게 넘길 수 있다. 그리고 YHWH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는 새로 우주를 창조시켜야 하지.”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무슨 말인지 정리 좀 합시다. 그러니까 일단 당신이 세상을, 아니 우주를 창조한 YHWH라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아직도 못 믿겠지만 넘어가죠. 그리고… 당신 말은 그러니까… 우주가 멸망했다는 건가요?”
“그래.”
그녀는 잔혹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한 말때문에?”
“그래. ‘이따위 세상 그냥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는데…….’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래. 기억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멸망해버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말 한 마디때문에 우주가 멸망할 수도 있나요?”
“애시당초 말 한 마디로 시작된 우주니까.”
그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종말에도 말이 있었군.
“그건 그렇다치고 왜 하필 저죠? 지금까지 우주가 시작된 이래 그정도 막말을 씨부린 인간이 줄잡아 억단위는 넘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내가 이 구제불능의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때마침 네가 그런 말을 한 거다. 그래서 멸망시켜버렸지. 그리고 너는 지금부터 YHWH가 된 거야.”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제가 운이 없어서 걸린 거로군요.”
YHWH도 이 말에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다른 질문을 했다.
“그래서…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제가 우주를 창조해야 한다고요?”
“그래. 네가 이제부터 YHWH다. 그리고 새로 우주를 창조해야 한다. 얼떨결에 신이 된 소년.”
“어째서요?”
“그게 법칙이니까. YHWH가 우주를 멸망시키고 나면 누군가가 그 이름을 이어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해야 해.”
미치겠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나는 그냥 홧김에 악담을 한 것뿐이다. ‘이따위 세상 망해버려’ 이런 말정도도 입에 안 담아 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해야 하느냔 말이다.
“다시 돌려줘요.”
내가 말했다.
“뭐?”
“다시 우주가 망하기 전으로 돌려달라고요. 누가 신이 되고 싶댔나요? 멋대로 우주를 멸망시켜놓고, 멋대로 신으로 만들어놓고 우주를 창조하라고요? 저는요, 신이 되고 싶지도 않고 우주창조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살던 우주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참고 살 테니까 다시 멸망시키기 전으로 돌려줘요.”
YHWH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왜요? 신이라면서요.”
“우주가 멸망해버렸으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신이라면 시공정도는 맘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시공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지. 그렇지만 우주가 멸망해버린 이상 나의 시공은 끝난 셈이야. 지금 이곳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 셈이니까.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아무리 다른 곳으로 가 봐도 지금 여기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어. 적어도 네가 우주를 창조하기 전까지는.”
“쳇. 무슨 신이 그래?”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자면 우주의 멸망은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싫어요.”
“뭐?”
“싫다구요. 그래, 우주가 멸망한 게 사실이라 칩시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거죠? 싫어요. 우주창조따위 제 알 바 아니에요.”
내 말에 YHWH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주창조란 거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게 뭐든 현실로 이뤄질 수 있어. 만약 네가 원한다면 2차대전에서 히틀러가 승리하는 세계를 만들 수도 있고, 인간따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도 있지. 어쩌면 엘프와 나가가 공존시킬 수도 있고, 마법과 과학기술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도, 온갖 미녀를 모아 할렘을 만들 수도 있지. 아니면 원래 살고 있던 세상과 똑같은…….”
“싫어.”
나는 말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나는 한참동안을 입에 싫어라는 말을 되뇌이며 절규했다. 사실 무엇이 싫은 지 나도 잘 몰랐다. 단지……. 싫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이 싫었다. 싫어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끝났냐?”
내 절규가 끝났을 때, YHWH가 말했다. 어느사이엔가 나는 귀에 손을 댄 채 웅크리고 있었다.
“어린애 투정은 그만 부려.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두려워 할 거 없어. 넌 이제부터 신이라고. 만들어. 네 욕망대로 만들어. 네 갈비뼈를 떼내던 흙으로 빚던 만들라고. 이게 네가 원했던 거잖아.”
네가 원했던 거라고?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이건 어때?”
YHWH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흔드는 손의 움직임은 점차 인간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가는 그녀의 모습은 경이를 느끼게 하며 그녀와 만난 후 처음으로 그녀가 신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만들어낸 인간이었다. 내 허리에 닿을락 말락 한 그 여자아이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체구를 하고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나는 로리콘이나 오타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한 목소리에는 가슴이 녹아내렸다. YHWH는 자랑스러운 듯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항간에 유행하는 여동생모에다. 어때?”
“필요없어!”
필요없다는 내 말에 여동생모에(?)는 뿅하고 사라졌다. YHWH는 묘한 비웃음을 만들며 말했다.
“오. 여동생모에는 취향이 아닌가 보네. 그럼 이건 어때?”
그녀는 또다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여자의 모습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나는 차마 할 말을 찾지 못 했다. 잠시 후에 겨우 YHWH에게 화를 낼 수 있었다.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후훗. 네가 좋아하던 박혜미양이다. 우주가 멸망하기 전에는 너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넌 신이야. 네가 원한다면 이 여자는 네 거다.”
내 앞에는 우주가 망하기 전에 좋아했던 혜미가 있었다. 살았을 때와 똑같이 화려한 복장에 늘씬한 몸매, 황갈색의 머리, 뚜렷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평소에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눈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 혜미는… 죽었어.”
“난 장난치는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원하는 걸 현실로 만들었을 뿐이지.”
“난 원하지 않아.”
내가 외쳤다.
“원하지 않는다고? 어째서지? 좋아하고 있잖아.”
“혜미는 죽었어. 그 빌어먹을 우주멸망때문에 죽었다고. 네가 만들어낸 건 허상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난 허상따위 좋아할 생각은 들지 않아.”
“아냐. 허상따위가 아냐. 진실이야. 네가 만드는 건 뭐든 진실이 된다고.”
YHWH가 말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다.
“치워줘요.”
“뭐?”
나는 혜미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치워달라고요. 그거.”
“몇번을 말해야겠어? 이건…….”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뇨. 그건 진실이 될 수 없어요. 우주는 멸망했고 혜미는 죽었어요. 아무리 혜미를 다시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건 혜미가 될 수 없어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밖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YHWH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는지 혜미를 없애주었다.
“그냥 이거 꿈이라고 해 주시지 않을래요? 아니면 우주의 소중함을 모르는 아이를 위한 교훈극이었다는 결말은 없나요?”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홧김에 말도 안 되는 말을 해 버렸다.
“그런 결말을 원하니?”
“예?”
“이게 꿈이기를 바라냐고?”
“설마 이게 꿈이었다는 건가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YHWH, 당신 죽여버릴 거야.
그렇지만 YHWH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그렇진 않아.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할 수는 있지. 다시 네가 살던 세상과 똑같은 세상을 창조한 다음, 네가 살던 모습대로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우주의 멸망따위 없었다고 믿는 거야.”
헉. 신이 그런 짓 해도 되는 거냐.
“아뇨. 말했잖아요.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아까부터 진실진실하는데, 몇번을 말해야겠니? 네가 만드는 건 뭐든 진실이 된다니까. 어차피 네가 살던 세계따위 내 망상으로 만든 세계에 지나지 않아.”
“설사 그렇다 해도…….”
YHWH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두려운 거지?”
“아니에요.”
나는 정색을 했다.
“솔직히 말해봐. 두렵지? 두렵잖아.”
그녀의 몸이 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얼굴의 그녀의 가슴에 안겼다.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해봐.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진심이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두려워요. 두려워요.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아요.”
“그래. 알아.”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이 났다.
“어째서……. 어째서인가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만들어.”
“만약에 제가 우주를 창조하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그렇게 되면 내 역할은 끝나고,”
끝나고?
“사라지는 거지.”
“죽는 건가요?”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죽겠니? 노병은 죽지 않아. 단지 사라질 뿐이지.”
“싫어요!”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 싫다구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따위 필요없어요.”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훗. 우주를 끝장낸 녀석이 마음 약하기는. 걱정마. 나는 희생되는 게 아니니까.”
나는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너도 이 짓 오래 하다보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은 누군가의 피와 눈물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가장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 널 거야.”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미안해.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그녀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만들어. 네가 원하는 세상을.”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주를 창조했다.
(8/29)
언제나 진지하게 한줄감상을 써 주시는 귀우혁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무도 모르는 채 묻히는 제 단편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