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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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골목
스티븐킹 파크리 맞스빈다.
예전에 문지방에 발을 찧고 떠올린 작품
"선생은 지독한 악의, 그것도 무차별적인 악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문식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안경을 다시 고쳐썼다. 나이는 50쯤 되었을까. 딱 그 정도의 연륜이 묻어나오는 옷차림이었다. 회색의 어딘지 모르게 유행에 따라가지 못하는 패션의 양복과 그 위에 덧입은 항공점퍼. 짙은 감색의 넥타이 또한 약간 삐뚜루 해서 일에 찌든 샐러리맨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타입. 현장에서 발로 뛰는 형사라니 이해 할만 했다. 게다가 교양은 어디에 도맷가로 팔아넘긴듯 초면에 반말을 해왔다.
"글쎄요. 무차별적 악의는 불특정.."
"그런게 아니야... 주변 사물들이 만약에, 선생을 죽일려고 한다면?“
문식은 눈을 내리 깔면서 진료차트를 슬쩍 훑어보았다. 분명 진료차트에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찾아왔다고 돼 있었다. 확실히 정신이 나가기 일보직전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미 나갔다거나...
"만약, 이 볼펜이 선생에게 악의를 갖고 있다면, 선생님을 헤칠려고 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어?”
사내는 책상의 필기구꽂이에 있던 흰색 모나미 볼펜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묻는 다고 하여도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 볼펜은 저에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하군요 라고 대답할까? 그렇게 말해주어야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식은 침착하게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볼펜이 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구요? 글쎄요. 흥미로운 표현이군요. 아마 당신은
무생물이 감정을 가진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감정과 무생물의 감정을 동일시하는 환상을 통해서...”
쾅!
사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간호사가 바깥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 볼 정도였다. 문식 또한 눈이 동그란채 놀래 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려 사내를 향해 한마디 던지려는 순간, 문식은 눈앞의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에 마음을 고쳤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것 같이 일그러진 40대 남자의 얼굴이란 보기 좋은 편은 못됐다.
"선생도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문식은 안경을 고쳐 쓰며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해보건데, 환자분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많습니다”
"왜! 대체 왜!"
"환자분은 형사라고 하셨죠? 형사는 추정만으로는 범인을 체포할수 없는 것 아닙니까? 물증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이 볼펜이 살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볼펜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확인이 불가능하다면 볼펜을 살인범으로 체포한 형사는 누구에게나 비웃음을 사겠지요."
"그래... 선생말이 맞아... 당연히 맞고 말고. 맞으니까 내가 지금 여기에 와서 선생을 마
주대하고 있는 것이지..."
사내의 목소리에는 나지막한 흐느낌이 포함되어 있었고, 책상을 내려친 주먹은 여전히 꼭 쥐어진채 떨리고 있었다.
"어쨌든 자세하게 얘기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환자분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를 말이죠."
사내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자 문식은 맘속으로 혀를 찼다. 금새 이렇게 다시 표정이 달라진다니까. 확실히 불안해 보이는 정신상태에 놓인 환자였다. 문식은 정신과의사였지만, 그 때문일까 사람의 심리나 감정이라는 것이 가끔 보잘것 없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그는 실패한 의사, 아니 가짜 의사인가? 문식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사내의 구구절절한 얘기 까지도 모두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의사였다.
“저 또한 의사이기 이전에 한명의 사람입니다. 비록 환자분께서 나름의 고충, 그러니까 무생물이 감정을 가진다...”
“악의. 말야. 악할 악자에 뜻 의”
“네... 악의 말이죠.”
문식은 사내가 자신의 말을 잘라먹었음에도 얼굴에 화난 기색을 띄우지 않았다. 다름아닌 그가 말이다.
“환자분께서 얘기하시는 그 악의란 것에 대해 환자분이 자세히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무생물이 악의를 가진다는 환자분의 얘기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본다면 믿기 힘든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자세히 얘기해주십시오.”
사내는 마치 범죄를 추궁당하는 범인처럼 깍지낀 손을 연신 꿈틀거리며 묘한 모양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햋볕에 그을린 피부와 항공점퍼로 감싼 몸은, 비교적 작은 체격이었지만 탄탄해 보였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말야..."
사내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다고 느낀 문식은 몸을 조금더 앞으로 기울였다.
무엇이든 간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그것이 일상생활 처럼 몸에 익힐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혹 접하게 되는 일이라면 말이다. 예를 들자면, 수많은 일회용 라이터를 가지고 있지만, 외출 한뒤에는 라이터와 담배를 같이 챙기는 것을 잊어 버린다던가 하는. 비유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과연 부주의에 의한 사고사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강도살인이라고 판단해야 하나...
"그냥 단순한 강도일까요?"
번화가의 한복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면 으례 구경꾼이 생기게 마련이었지만 그 작은골목길에는 구경꾼은 고사하고 도둑고양이만 들락날락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적드문 길에도 사람은 다니는지, 가끔 지나가던 행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사건현장을 구경하거나, 골목길의 초라하고 오래된 상점을 출입하고는 했다.
"등신아. 천지에 어느 강도가 지갑의 돈도 안 빼가냐? 형사질 하루 이틀 해?"
지갑에 들어있는 돈보다 손목에 차고 있는 롤렉스 시계가 더 비싸보이는 데도 말이다. 박형사의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 보는 녀석은 박형사의 20년 후배인 김형사였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이제 은퇴를 앞둔 박형사에 비하면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전정가위로 자른듯 삐죽한 짧은 머리를 연신 긁어대며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눈앞의 시체만으로 정황을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시체는 발견당시, 우습게도 나찌의 십자가 모양과 흡사하게 사지를 뻗은채 누워 있었고 이마에는 심각한 타박상이 나 있었다. 글쎄,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 시체가 우리나라에는 있을리 없는 신나찌주의자들의 소행이라거나, 이 사건을 신나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돌리려는 과격파소수인종 젊은이들의 짓거리...쯔음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체를 발견한 것은 뒷문을 이 골목쪽으로 낸 싸구려 레스토랑의 종업원 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쓰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 했던 것이다. 원래 이런 경우는 신고자를 한번쯤 의심해 볼만 하지만, 갓 20을 넘긴 어리숙한 대학생이 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박형사는 자신의 오랜 경험과 직감을 신용하는 편이었다.
물론 원리원칙에 따라 두형사는 그 청년을 의심해보는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청년은 덕분에 1시간 내내 난처한 표정으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결론적으로 북적거리는 가게를 놔두고 밖에 나와서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행인을 내리치는 수고와 레스토랑 주인의 분노를 맞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어눌해 보이는 청년을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하게 만들었다.
감식반이 도착하고, 뭐라고 하기힘든 재수없는 피부를 가진 감식관이 자신의 법의학적 지식을 뽐내듯 사망시간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박형사는 레스토랑 주인에게서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종이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가 무척 감미롭게 들렸다
. 한껏 연기를 들이마신뒤에 내뿜으면 마치 허파의 부분부분에 타르가 달라붙는 듯한 느낌으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늘그막에,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박형사에게는 담배를 태우면서 거리의 고요함을 느끼며 고양되는 감각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이 취미 아닌 취미였다.
한 마디로, 그는 심한 애연가였다.
박형사는 유인원 처럼 털로 뒤덮인 팔로 팔짱을 낀채 사건현장을 바라보는 레스토랑 주인을 바라 보았다. 중고등학생들이 유난히 많이 찾는 레스토랑을 운영한지 10년째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왜 중고등학생들로 붐비는 지는 자신도 알수 없었지만 이 번화가에서 꽤나 돈을 만지게 된듯 했다.
"뭔 골목길에 강도가 이래 많은건지."
박형사는 그말에 입으로 담배를 가져가며 레스토랑 주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이 길은요, 저렇게 맞아죽은 사람이 꽤 되는데 돈 잃어버렸다는 사람도 없고, 전 부 멀쩡하게 죽었죠. 근데, 강도를 봤다는 사람도 없어요. 한번도."
주인은 한번도란 말을 강조하면서 담뱃재를 털었다. 바람이 한번 새차게 불자, 담뱃재가 휘휘 날린다. 박형사는 눈쌀을 찌푸리며 주인에게 되물었다.
"한번도 말입니까?"
"네. 한번도 말입니다."
박형사는 주인의 손등에 무성히 난 털에 담배불이 옮겨 붙지나 않을까 내심 궁금해 하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여기서 장사를 한지 한 10년 됐는데, 그동안 여러명 죽었죠. 근데, 어떻게 보면 강도도 아닌것 같애요. 차라리 저 사람들이 제풀에 넘어져서 죽었다고 보는게 더 믿을만 한거지. 어떻게 비명소리도, 강도 그림자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죽었다는 사람만 있으니까..."
"..."
"차라리 외계인이 와서 때렸다 그러는게 더 맞겠네요. 킥킥"
주인은 그 말과 함께 담뱃불을 땅바닥에 버리고는 비벼 껐다.
"저야 3층을 가정집으로 해서 살고 있으니까, 형사님이 뭐라도 물어볼 것 생기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던가, 찾아오시던가 하십쇼."
주인은 그다지 놀란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침착하면서, 마치 일상의 사건을 얘기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박형사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흉흉하다 할지라도, 이런 사건이 별일이 아니라니!
그는 그러려니 했지만, 감식반이 도착한뒤에 놀라운 사실을 듣고 말았다.
"전속해오셨지? 그럼 모르시겠네, 여기 원래 의문사 다발지역이야. 10년동안에 여기서 죽은 사람이 100명은 돼."
"!?"
"근데, 이젠 아무도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신경안써. 왠 줄 알아? 이젠 그냥 사고로 보는거야.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사고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거든? 어떤 둔기를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고, 반항한 흔적이나 도둑맞은 물품도 딱히 없어. 게다가 발길이 한적하긴 하지만 사람의 왕래도 제법 있는 곳인데 말야. 사고다발지역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두면 좋겠어. 무슨 사고 인지는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100명. 그 말이 계속해서 박형사의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혹시 여기 입간판에 머리를 부딪힌게 아닐까요?"
계장의 말을 듣고 있던 후배 녀석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 말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감식반원 몇명과 계장과 나는 순간 대화를 멈추고 후배를 쳐다보았다.
"아... 아니 그게..."
"푸하핫 등신, 그것도 추리라고 하는거냐?"
"하핫 이 친구 농담도 할줄 아는데?"
박형사와 계장의 면박에 후배녀석은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 해서 얼핏 시체의 키를 추측해보았다. 대충... 170대 중반. 그러나 입간판의 높이는 2미터 가까이 되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밑을 지나가다가 뛰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머리를 부딪힐리가 없겠지.
키득거리는 감식반원들을 뒤로 하고 서署로 돌아오면서 나는 천천히 머리를 굴려보았지. 현장에서는 폭소를 터뜨렸지만 감식반 계장의 "사고다발지역" 얘기가 머리속에 계속해서 떠올랐지. 어찌보면 그것이 가장 정확했던 추리일지도 몰라. 난 늙고 힘없는 형사지만 직감이란것도 믿고, 불가사의란것도 믿어. 그 만큼 세상에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가 안되는게 많다는거, 선생은 이해가 가?
집으로 돌아와서 TV를 켰지만, 10년동안 100명이나 죽은 골목길에 대해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던지 한마디도 없었어. 정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려도 될만한 걸까?
근데,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건 그날 저녁 TV에 방영된 한편의 영화 때문이었어. 아내와 둘째아이를 사고로 잃었었기에 난 혼자 지내고 있었어. 웃기는 사고였지. 아내와 아이와 함께 낚시를 갔었는데, 차안에서 잠든 아내와 아이를 놔둔채 혼자 밤낚시를 즐기고 돌아와 보니, 저 혼자 사이드브레이크가 풀린 차가 도로를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가서 바다속으로 뛰어들었던거야.
어쨌든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가볍게 술을 마시며 TV를 보다가 잠들어 버리곤 하는 편이었는데, 마침 그날 밤에는 재밌는 영화가 하나 하더라구.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죽는 영화였어. 근데 마치 그 죽는 상황들이 기가 막힌거야. 마치 너무나 심한 우연들이 반복되면서... 마치 온 세상이 주인공들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처럼 말이야. 결국 마지막에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데, 이 배가 글쎄 악마같은 놈이라서 사람들을 하나 둘씩 죽여대는 거지.
영화를 보고 나니까 술이 확 깨더라구. 게다가 선생,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아내와 아이가 죽은 사고가 떠오르더라구. 사이드 브레이크는 제멋대로 풀렸고, 물에 빠진 후에는 문짝까지 고장나서 열리지도 않았었지. 차를 끌어낸뒤 사고경위를 조사한답시고 자동차회사 직원이 차를 검사해본 후 한다는 소리가 '전혀 이상없음'이라는 거야. 그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 게다가 내가 아내와 아이를 보험금을 노리고 일부러 죽인게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들었단 말이야. 마음같아선 해머로 그놈의 차를 박살 내버리고 싶었지만 어쩌겠어?
문식은 사내의 물음에 답하진 않았다. 틀림없이, 신경쇠약이었다. 게다가 과대망상의 초기증상까지.
"선생도 말이야, 만약에 그런 사고가 생겼다면 어떻게 생각했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구. 그 왜, 급발진 사고 처럼 정말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아내와 아이를 잃긴 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자동차'가 아내와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생각은 못할거야. 그런데, 이건 사실이야! 내가 늙어서 잡념이 많아 진게 아니라구!"
"환자분의 말씀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자동차에게 살인죄를 적용시키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문식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상대를 비웃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선생은 이 퇴물 형사를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나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 했지. 다행히 대학교 후배놈이 자동차 연구소에 있길래, 믿을만한 자료를 구했지."
사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안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하얀색의 건식지에 마구잡이로 복사된 글씨와 도표들이 빼곡했다.
"잘 보라고 원인불명의 급발진 사고, 원인불명의 브레이크 고장, 원인불명 사건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사건의 대부분은 골고루 분포된게 아냐, 특별히 사고를 일으키는 몇몇놈들이 있지!"
문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인불명의 사고라도 자주 일어난다면 원인불명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결함이 있는 중고차를 사게 된다면 당연히 사고에 노출될 확률이 높을 텐데 이런 자료를 가지고 자동차가 악의를 가지고 사고를 일으켰다는 주장을 펼치다니... 마음속으로 그의 진단서에 과대망상이라는 글자를 써넣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식은 환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여 가며 자료를 훑어본 후, 다시 건네주었다. 사내는 마치 신주라도 되는양 그 서류를 둘둘말아, 품안에 넣었다. 문식은 그 모습이 측은하다 못해 불쌍하다고 느낄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골목길 사건은 어떻게 결론 지으신 겁니까?"
"어쨌든 나는 확신했지. 골목길은, 아니 살인골목은 맹수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후배놈이 내 설명을 듣고는...."
사내는 거기까지 말을 잇고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얼굴이 뻘게 졌다.
"몰래 반장에게 내가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일러바쳤던 거야!"
"그래서 여기에 오시게 된거로군요?"
"흥! 애송이가 뭘 알겠어!. 형사생활 30년 동안 내 감은 틀린적이 없었다구!"
사내는 팔짱을 끼고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완고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진료는 두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끝이났다. 사내, 늙은 형사는 할말을 다 했다는 듯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냈다.
"고맙네 선생. 내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들어준 사람은 자네 뿐일세."
"..."
사내는 문식과의 전투에서 승리라도 한듯 의기양양하게 걸어나갔고, 문식은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아무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론 머리속으로는 과대망상이라는 단어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무생물에 마음이 있고 그 중 악의가 사람을 공격한다? 문식은 그가 오랜 형사생활에 찌들었기 때문에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하게 된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XXX환자분 들어오세요"
간호사는 진찰실을 흘끗 쳐다보고는 다음환자를 호출했다.
그러나 순간 진찰실을 걸어나가는 사내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해보이더니 발로 문틀을 찧었다. 사내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앞으로 볼썽사납게 자빠지는 모습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는 화분을 머리에 부딪히며 쓰러졌고, 그 충격은 사내의 경추를 박살내고 두개골을 깨트릴 만큼 강했다.
"간호사! 사람이! 사람이!"
"꺄악!"
다른 환자가 황급히 간호사를 부르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바닥에 흐르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식은 사내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끝내는 자신마저 '악의'에 희생당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문식은 한동안 사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문가의 알로에 화분의 모서리가 자꾸 신경쓰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스티븐킹 파크리 맞스빈다.
예전에 문지방에 발을 찧고 떠올린 작품
"선생은 지독한 악의, 그것도 무차별적인 악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문식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안경을 다시 고쳐썼다. 나이는 50쯤 되었을까. 딱 그 정도의 연륜이 묻어나오는 옷차림이었다. 회색의 어딘지 모르게 유행에 따라가지 못하는 패션의 양복과 그 위에 덧입은 항공점퍼. 짙은 감색의 넥타이 또한 약간 삐뚜루 해서 일에 찌든 샐러리맨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타입. 현장에서 발로 뛰는 형사라니 이해 할만 했다. 게다가 교양은 어디에 도맷가로 팔아넘긴듯 초면에 반말을 해왔다.
"글쎄요. 무차별적 악의는 불특정.."
"그런게 아니야... 주변 사물들이 만약에, 선생을 죽일려고 한다면?“
문식은 눈을 내리 깔면서 진료차트를 슬쩍 훑어보았다. 분명 진료차트에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찾아왔다고 돼 있었다. 확실히 정신이 나가기 일보직전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미 나갔다거나...
"만약, 이 볼펜이 선생에게 악의를 갖고 있다면, 선생님을 헤칠려고 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어?”
사내는 책상의 필기구꽂이에 있던 흰색 모나미 볼펜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묻는 다고 하여도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 볼펜은 저에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하군요 라고 대답할까? 그렇게 말해주어야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식은 침착하게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볼펜이 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구요? 글쎄요. 흥미로운 표현이군요. 아마 당신은
무생물이 감정을 가진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감정과 무생물의 감정을 동일시하는 환상을 통해서...”
쾅!
사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간호사가 바깥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 볼 정도였다. 문식 또한 눈이 동그란채 놀래 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려 사내를 향해 한마디 던지려는 순간, 문식은 눈앞의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에 마음을 고쳤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것 같이 일그러진 40대 남자의 얼굴이란 보기 좋은 편은 못됐다.
"선생도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문식은 안경을 고쳐 쓰며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해보건데, 환자분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많습니다”
"왜! 대체 왜!"
"환자분은 형사라고 하셨죠? 형사는 추정만으로는 범인을 체포할수 없는 것 아닙니까? 물증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이 볼펜이 살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볼펜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확인이 불가능하다면 볼펜을 살인범으로 체포한 형사는 누구에게나 비웃음을 사겠지요."
"그래... 선생말이 맞아... 당연히 맞고 말고. 맞으니까 내가 지금 여기에 와서 선생을 마
주대하고 있는 것이지..."
사내의 목소리에는 나지막한 흐느낌이 포함되어 있었고, 책상을 내려친 주먹은 여전히 꼭 쥐어진채 떨리고 있었다.
"어쨌든 자세하게 얘기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환자분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를 말이죠."
사내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자 문식은 맘속으로 혀를 찼다. 금새 이렇게 다시 표정이 달라진다니까. 확실히 불안해 보이는 정신상태에 놓인 환자였다. 문식은 정신과의사였지만, 그 때문일까 사람의 심리나 감정이라는 것이 가끔 보잘것 없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그는 실패한 의사, 아니 가짜 의사인가? 문식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사내의 구구절절한 얘기 까지도 모두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의사였다.
“저 또한 의사이기 이전에 한명의 사람입니다. 비록 환자분께서 나름의 고충, 그러니까 무생물이 감정을 가진다...”
“악의. 말야. 악할 악자에 뜻 의”
“네... 악의 말이죠.”
문식은 사내가 자신의 말을 잘라먹었음에도 얼굴에 화난 기색을 띄우지 않았다. 다름아닌 그가 말이다.
“환자분께서 얘기하시는 그 악의란 것에 대해 환자분이 자세히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무생물이 악의를 가진다는 환자분의 얘기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본다면 믿기 힘든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자세히 얘기해주십시오.”
사내는 마치 범죄를 추궁당하는 범인처럼 깍지낀 손을 연신 꿈틀거리며 묘한 모양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햋볕에 그을린 피부와 항공점퍼로 감싼 몸은, 비교적 작은 체격이었지만 탄탄해 보였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말야..."
사내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다고 느낀 문식은 몸을 조금더 앞으로 기울였다.
무엇이든 간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그것이 일상생활 처럼 몸에 익힐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혹 접하게 되는 일이라면 말이다. 예를 들자면, 수많은 일회용 라이터를 가지고 있지만, 외출 한뒤에는 라이터와 담배를 같이 챙기는 것을 잊어 버린다던가 하는. 비유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과연 부주의에 의한 사고사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강도살인이라고 판단해야 하나...
"그냥 단순한 강도일까요?"
번화가의 한복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면 으례 구경꾼이 생기게 마련이었지만 그 작은골목길에는 구경꾼은 고사하고 도둑고양이만 들락날락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적드문 길에도 사람은 다니는지, 가끔 지나가던 행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사건현장을 구경하거나, 골목길의 초라하고 오래된 상점을 출입하고는 했다.
"등신아. 천지에 어느 강도가 지갑의 돈도 안 빼가냐? 형사질 하루 이틀 해?"
지갑에 들어있는 돈보다 손목에 차고 있는 롤렉스 시계가 더 비싸보이는 데도 말이다. 박형사의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 보는 녀석은 박형사의 20년 후배인 김형사였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이제 은퇴를 앞둔 박형사에 비하면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전정가위로 자른듯 삐죽한 짧은 머리를 연신 긁어대며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눈앞의 시체만으로 정황을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시체는 발견당시, 우습게도 나찌의 십자가 모양과 흡사하게 사지를 뻗은채 누워 있었고 이마에는 심각한 타박상이 나 있었다. 글쎄,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 시체가 우리나라에는 있을리 없는 신나찌주의자들의 소행이라거나, 이 사건을 신나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돌리려는 과격파소수인종 젊은이들의 짓거리...쯔음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체를 발견한 것은 뒷문을 이 골목쪽으로 낸 싸구려 레스토랑의 종업원 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쓰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 했던 것이다. 원래 이런 경우는 신고자를 한번쯤 의심해 볼만 하지만, 갓 20을 넘긴 어리숙한 대학생이 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박형사는 자신의 오랜 경험과 직감을 신용하는 편이었다.
물론 원리원칙에 따라 두형사는 그 청년을 의심해보는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청년은 덕분에 1시간 내내 난처한 표정으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결론적으로 북적거리는 가게를 놔두고 밖에 나와서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행인을 내리치는 수고와 레스토랑 주인의 분노를 맞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어눌해 보이는 청년을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하게 만들었다.
감식반이 도착하고, 뭐라고 하기힘든 재수없는 피부를 가진 감식관이 자신의 법의학적 지식을 뽐내듯 사망시간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박형사는 레스토랑 주인에게서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종이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가 무척 감미롭게 들렸다
. 한껏 연기를 들이마신뒤에 내뿜으면 마치 허파의 부분부분에 타르가 달라붙는 듯한 느낌으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늘그막에,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박형사에게는 담배를 태우면서 거리의 고요함을 느끼며 고양되는 감각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이 취미 아닌 취미였다.
한 마디로, 그는 심한 애연가였다.
박형사는 유인원 처럼 털로 뒤덮인 팔로 팔짱을 낀채 사건현장을 바라보는 레스토랑 주인을 바라 보았다. 중고등학생들이 유난히 많이 찾는 레스토랑을 운영한지 10년째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왜 중고등학생들로 붐비는 지는 자신도 알수 없었지만 이 번화가에서 꽤나 돈을 만지게 된듯 했다.
"뭔 골목길에 강도가 이래 많은건지."
박형사는 그말에 입으로 담배를 가져가며 레스토랑 주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이 길은요, 저렇게 맞아죽은 사람이 꽤 되는데 돈 잃어버렸다는 사람도 없고, 전 부 멀쩡하게 죽었죠. 근데, 강도를 봤다는 사람도 없어요. 한번도."
주인은 한번도란 말을 강조하면서 담뱃재를 털었다. 바람이 한번 새차게 불자, 담뱃재가 휘휘 날린다. 박형사는 눈쌀을 찌푸리며 주인에게 되물었다.
"한번도 말입니까?"
"네. 한번도 말입니다."
박형사는 주인의 손등에 무성히 난 털에 담배불이 옮겨 붙지나 않을까 내심 궁금해 하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여기서 장사를 한지 한 10년 됐는데, 그동안 여러명 죽었죠. 근데, 어떻게 보면 강도도 아닌것 같애요. 차라리 저 사람들이 제풀에 넘어져서 죽었다고 보는게 더 믿을만 한거지. 어떻게 비명소리도, 강도 그림자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죽었다는 사람만 있으니까..."
"..."
"차라리 외계인이 와서 때렸다 그러는게 더 맞겠네요. 킥킥"
주인은 그 말과 함께 담뱃불을 땅바닥에 버리고는 비벼 껐다.
"저야 3층을 가정집으로 해서 살고 있으니까, 형사님이 뭐라도 물어볼 것 생기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던가, 찾아오시던가 하십쇼."
주인은 그다지 놀란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침착하면서, 마치 일상의 사건을 얘기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박형사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흉흉하다 할지라도, 이런 사건이 별일이 아니라니!
그는 그러려니 했지만, 감식반이 도착한뒤에 놀라운 사실을 듣고 말았다.
"전속해오셨지? 그럼 모르시겠네, 여기 원래 의문사 다발지역이야. 10년동안에 여기서 죽은 사람이 100명은 돼."
"!?"
"근데, 이젠 아무도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신경안써. 왠 줄 알아? 이젠 그냥 사고로 보는거야.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사고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거든? 어떤 둔기를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고, 반항한 흔적이나 도둑맞은 물품도 딱히 없어. 게다가 발길이 한적하긴 하지만 사람의 왕래도 제법 있는 곳인데 말야. 사고다발지역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두면 좋겠어. 무슨 사고 인지는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100명. 그 말이 계속해서 박형사의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혹시 여기 입간판에 머리를 부딪힌게 아닐까요?"
계장의 말을 듣고 있던 후배 녀석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 말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감식반원 몇명과 계장과 나는 순간 대화를 멈추고 후배를 쳐다보았다.
"아... 아니 그게..."
"푸하핫 등신, 그것도 추리라고 하는거냐?"
"하핫 이 친구 농담도 할줄 아는데?"
박형사와 계장의 면박에 후배녀석은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 해서 얼핏 시체의 키를 추측해보았다. 대충... 170대 중반. 그러나 입간판의 높이는 2미터 가까이 되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밑을 지나가다가 뛰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머리를 부딪힐리가 없겠지.
키득거리는 감식반원들을 뒤로 하고 서署로 돌아오면서 나는 천천히 머리를 굴려보았지. 현장에서는 폭소를 터뜨렸지만 감식반 계장의 "사고다발지역" 얘기가 머리속에 계속해서 떠올랐지. 어찌보면 그것이 가장 정확했던 추리일지도 몰라. 난 늙고 힘없는 형사지만 직감이란것도 믿고, 불가사의란것도 믿어. 그 만큼 세상에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가 안되는게 많다는거, 선생은 이해가 가?
집으로 돌아와서 TV를 켰지만, 10년동안 100명이나 죽은 골목길에 대해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던지 한마디도 없었어. 정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려도 될만한 걸까?
근데,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건 그날 저녁 TV에 방영된 한편의 영화 때문이었어. 아내와 둘째아이를 사고로 잃었었기에 난 혼자 지내고 있었어. 웃기는 사고였지. 아내와 아이와 함께 낚시를 갔었는데, 차안에서 잠든 아내와 아이를 놔둔채 혼자 밤낚시를 즐기고 돌아와 보니, 저 혼자 사이드브레이크가 풀린 차가 도로를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가서 바다속으로 뛰어들었던거야.
어쨌든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가볍게 술을 마시며 TV를 보다가 잠들어 버리곤 하는 편이었는데, 마침 그날 밤에는 재밌는 영화가 하나 하더라구.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죽는 영화였어. 근데 마치 그 죽는 상황들이 기가 막힌거야. 마치 너무나 심한 우연들이 반복되면서... 마치 온 세상이 주인공들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처럼 말이야. 결국 마지막에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데, 이 배가 글쎄 악마같은 놈이라서 사람들을 하나 둘씩 죽여대는 거지.
영화를 보고 나니까 술이 확 깨더라구. 게다가 선생,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아내와 아이가 죽은 사고가 떠오르더라구. 사이드 브레이크는 제멋대로 풀렸고, 물에 빠진 후에는 문짝까지 고장나서 열리지도 않았었지. 차를 끌어낸뒤 사고경위를 조사한답시고 자동차회사 직원이 차를 검사해본 후 한다는 소리가 '전혀 이상없음'이라는 거야. 그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 게다가 내가 아내와 아이를 보험금을 노리고 일부러 죽인게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들었단 말이야. 마음같아선 해머로 그놈의 차를 박살 내버리고 싶었지만 어쩌겠어?
문식은 사내의 물음에 답하진 않았다. 틀림없이, 신경쇠약이었다. 게다가 과대망상의 초기증상까지.
"선생도 말이야, 만약에 그런 사고가 생겼다면 어떻게 생각했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구. 그 왜, 급발진 사고 처럼 정말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아내와 아이를 잃긴 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자동차'가 아내와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생각은 못할거야. 그런데, 이건 사실이야! 내가 늙어서 잡념이 많아 진게 아니라구!"
"환자분의 말씀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자동차에게 살인죄를 적용시키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문식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상대를 비웃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선생은 이 퇴물 형사를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나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 했지. 다행히 대학교 후배놈이 자동차 연구소에 있길래, 믿을만한 자료를 구했지."
사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안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하얀색의 건식지에 마구잡이로 복사된 글씨와 도표들이 빼곡했다.
"잘 보라고 원인불명의 급발진 사고, 원인불명의 브레이크 고장, 원인불명 사건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사건의 대부분은 골고루 분포된게 아냐, 특별히 사고를 일으키는 몇몇놈들이 있지!"
문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인불명의 사고라도 자주 일어난다면 원인불명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결함이 있는 중고차를 사게 된다면 당연히 사고에 노출될 확률이 높을 텐데 이런 자료를 가지고 자동차가 악의를 가지고 사고를 일으켰다는 주장을 펼치다니... 마음속으로 그의 진단서에 과대망상이라는 글자를 써넣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식은 환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여 가며 자료를 훑어본 후, 다시 건네주었다. 사내는 마치 신주라도 되는양 그 서류를 둘둘말아, 품안에 넣었다. 문식은 그 모습이 측은하다 못해 불쌍하다고 느낄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골목길 사건은 어떻게 결론 지으신 겁니까?"
"어쨌든 나는 확신했지. 골목길은, 아니 살인골목은 맹수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후배놈이 내 설명을 듣고는...."
사내는 거기까지 말을 잇고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얼굴이 뻘게 졌다.
"몰래 반장에게 내가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일러바쳤던 거야!"
"그래서 여기에 오시게 된거로군요?"
"흥! 애송이가 뭘 알겠어!. 형사생활 30년 동안 내 감은 틀린적이 없었다구!"
사내는 팔짱을 끼고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완고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진료는 두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끝이났다. 사내, 늙은 형사는 할말을 다 했다는 듯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냈다.
"고맙네 선생. 내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들어준 사람은 자네 뿐일세."
"..."
사내는 문식과의 전투에서 승리라도 한듯 의기양양하게 걸어나갔고, 문식은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아무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론 머리속으로는 과대망상이라는 단어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무생물에 마음이 있고 그 중 악의가 사람을 공격한다? 문식은 그가 오랜 형사생활에 찌들었기 때문에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하게 된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XXX환자분 들어오세요"
간호사는 진찰실을 흘끗 쳐다보고는 다음환자를 호출했다.
그러나 순간 진찰실을 걸어나가는 사내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해보이더니 발로 문틀을 찧었다. 사내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앞으로 볼썽사납게 자빠지는 모습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는 화분을 머리에 부딪히며 쓰러졌고, 그 충격은 사내의 경추를 박살내고 두개골을 깨트릴 만큼 강했다.
"간호사! 사람이! 사람이!"
"꺄악!"
다른 환자가 황급히 간호사를 부르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바닥에 흐르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식은 사내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끝내는 자신마저 '악의'에 희생당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문식은 한동안 사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문가의 알로에 화분의 모서리가 자꾸 신경쓰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