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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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물론 내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임무만을 수행한다는 철칙 따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스의 명령을 들었을 때 나는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스를 바라보니 보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하게 내 시선을 받는다. 난 결국 보스의 명령에 말대꾸를 하게 되었다.
“괴물이요?”
“그래, 괴물.”
“보스.”
“왜?”
“그런 얘기를 듣기에는 제 나이가 좀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괴물과 용사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일 소녀 나이는 지났다고요.”
“동심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로군.”
“후우. 그래, 괴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괴물은 어떤 괴물입니까? 천 년 전에 멸종한 드래곤입니까, 아니면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바다괴물 크라켄입니까?”
“여자를 겁탈하는 괴물이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무리 내가 여자 같지 않다지만 어떻게 얼굴색하나 바뀌지 않고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난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할 말을 약간 정리하고, 심호흡을 한 뒤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어머! 보스, 제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하고 앙탈을 부려야합니까, 아니면 그런 괴물이 어디 있냐며 화를 내야 합니까?”
“둘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저도 그래요. 진짜 괴물이 있긴 있습니까?”
“모턴 시를 감싸고 있는 숲에서 출몰한다고 한다. 괴물에게 당한 당사자나 가족들이 쉬쉬하는 분위기라서 괴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네가 빨리 처리해야겠지?”
“해야죠. 그럼 그냥 숲을 돌아다니면서 괴물을 찾은 다음 죽이면 됩니까?”
“안 되지. 자, 드디어 네가 이걸 할 때가 되었구나.”
“뭐요?”
“미인계.”
…….
“아저씨아저씨 하면서 따라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네가 이렇게 자랐구나. 인생무상이로다. 그때만 해도 겨드랑이에 털도 안 났었는데…….”
가만 놔두면 더 위험한 말도 할 것 같기에 나는 얼른 보스의 상념을 끊었다.
“그럼 그 괴물은 어떤 놈인가요? 여자를 겁탈할 정도라면 힘이 꽤 세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자의 힘을 무시하지만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여자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런 여자들을 겁탈할 정도라면 적어도 힘이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응. 좆나 세.”
1. 이상한 괴물.
그래서 나는 그 좆나 세다는 괴물을 잡기 위해 모턴 시로 가는 중이다. 보통 좀 배운 인간들은 그림자의 원리가 광원이 물체보다 클 때 가려서 어쩌고 하는 복잡한 이론을 들이대는데 사실 그림자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생길 수 있다. 지금 여기는 달빛도 들지 않는 숲속인데도 내 등 뒤에 예쁜 그림자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본체는 못생겼어도 그림자는 참 예쁘단 말이야.
그리고 그 옆에 나타나는 새로운 그림자.
“어 잠깐만, 거기 아가씨.”
“혹시 괴물이세요?”
“응?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이렇게 멋진 남자에게.”
“그림자가 안 멋진 남자는 보기 드물죠. 게다가 달빛도 들지 않는 어두움 숲속을 혼자 돌아다닐 미친놈이 있을까요?”
“아가씨는 그럼 왜 돌아다니나요?”
“미친년입니다.”
“그럼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뒤질래요?”
“에이, 일단 뒤돌아보세요. 얼굴도 안 보고 얘기하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뒤돌아보면 쏘게요?”
“활도 없는데 쏘긴 뭘 쏴요?”
“그거 있잖아요. 오줌 말고 다른 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단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표적을 찾기도 전에 난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괴물과 눈이 마주쳤는데,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우라지게 잘 생겼다.
“잠깐. 당신 괴물 맞아?”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제가 뭐하는 괴물인지도 알죠?”
“여자를 겁탈하는 개새끼요.”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제 얼굴을 보니 어때요? 뭐 당해도 기분 나쁠 것 같진 않죠?”
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남자들의 착각이 뭔지 알아요? 자기가 좀 생겼다싶으면 여자들이 무조건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이제.”
말을 끝내기 전에 괴물의 그곳을 향해 발차기를 시도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실패를 예상해도 막상 실패가 다가오면 실망을 하게 된다. 괴물이 너무 태연하게 무릎으로 발차기를 막는 바람에 나는 적잖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괴물이 내 목과 귀를 향해 입술을 들이대기에 나는 적잖게 당황 하고 말았다. 하지만 프로는 당황 속에서도 침착을 찾는 법. 난 자유로운 왼손으로 나머지 단검 하나를 뽑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괴물의 옆구리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아오!”
괴물은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내 몸에서 떨어졌다. 난 잡혀있던 오른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맨날 박기만 하다가 박히니까 당황스럽지?”
괴물은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가, 다시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박히니까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
흠, 내 얼굴이 안 빨개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리 처음 듣나보네.”
젠장.
“뭐, 이렇게 강제로 하면 여자들은 다 싫어하는군.”
“당연하지 괴물아. 근데 너 생긴 건 멀쩡한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마음먹고 정상적으로 작업하면 넘어올 여자가 한 둘이 아닐 텐데.”
“꼬시는 건 괴물의 자존심이 허락 안 해.”
“옆구리에 단검 박아놓은 뒤 이렇게 사이좋게 대화하는 게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일단 좀 더 대화를 해보자. 네가 왜 괴물이야? 생긴 것도 그렇고 단검 박히는 거 가지고 쩔쩔 매는 것도 그렇고 사람 같은데?”
“이봐 아가씨. 옆구리에 단검 박혀볼래? 좆나 아파. 쩔쩔 안 매는 게 이상한 거야.”
“그래도 괴물이잖아? 말하는 거 보니 개념이 괴물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도 똑바로 할 수 있고. 네가 어딜 봐서 괴물이야?”
“이거 비밀인데, 사실 내 물건이 괴물이야.”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그렇다고 치지. 그런데 정말 그거 땜에 괴물이라고 불리는 거야?”
“글쎄…….”
“야. 어쨌든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난 괴물을 죽이러 왔거든? 근데 널 보니까 성교육만 제대로 받으면 꽤나 멀쩡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제 그 미친 짓 그만하고 멀쩡히 살아. 너 별로 안 죽이고 싶어.”
“이봐 아가씨.”
“왜?”
“언제부터 이 나라가 성적 취향을 범죄로 규정했나요?”
“남에게 피해를 주면 그건 무조건 범죄야. 내가 좋은 성교육센터 하나 소개해줄게.”
“에이, 싫어. 난 그냥 이대로 살래.”
“진짜? 그럼 난 이 남은 단검 하나를 네 심장에 꽂을 건데? 넌 맛이 갔지만 나쁜 놈 같지는 않으니 장검으로 죽이진 않을게. 괜찮겠어?”
“살살 박아줘.”
…오래 대화하면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으니 빨리 죽여야겠군. 난 내려찍기 편하게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단검을 심장에 쑤셔 박기 직전까지 괴물은 얼굴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나는 왠지 이 괴물을 죽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 일에 익숙해진 내 손은 이미 괴물의 심장에 단검을 쑤셔 박고 있었다.
욱, 괴물의 입에서 짧은 신음과 함께 피가 흘러나왔다. 괴물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기분과 계속 눈을 마주 치고 싶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괴물은 짧게 경련한 뒤, 나에게 몸을 기대듯 풀썩 쓰러졌다.
나는 문득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1.5.
보스가 요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한다.
“너 뭐하고 온 거냐?”
“네?”
“너 여자 겁탈하는 괴물 죽이러 갔던 거 맞지?”
“네.”
“그 괴물 죽이고 온 거 맞지?”
“…네.”
“근데 의뢰인은 왜 빨리 괴물을 안 죽이냐고 보채는 걸까?”
“네?”
“런스톰.”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새로 받은 내 이름이다. 그러나 보스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웬만하면 옛날 이름을 부른다. 저 이름을 불렀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난 네가 이 일을 시작한다 했을 때부터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 물론 ‘아이엠 유어 파더’ 어쩌고 하는 뻔한 반전대사를 하려는 건 아니다. 어쨌든 그만큼 내가 널 자식처럼 좋아했고, 또 그렇기에 널 못 말렸던 거였다. 그러나 이제 보스와 부하의 관계로서 이 말을 해야겠구나.
런스톰, 이 일을 그만둬라. 이런 일을 하기엔 넌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아. 사람이 너무 감성적이면 인생이 피곤해져. 인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먼저 해줬을 때, 기쁘기보다는 의외로 기분이 착잡해진다. 웃고 싶지만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나는 목소리가 안 떨리길 바라며 천천히 말했다.
“보스. 그럼 이번 일만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그만두겠습니다.”
보스는 표정을 무섭게 바꾸며 말한다.
“삐졌냐?”
난 보스의 가벼운 장난에 겨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방금 제 표정 볼만했죠?”
“콧구멍 벌렁 거리는 게 참 보기 흉하더라. 너 남자친구 앞에선 당황하지 마. 넌 당황하면 콧구멍이 커지는 타입이야.”
나는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2. 외로운 괴물.
두 번째로 찾아온 숲. 이 숲은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저번엔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뿐 이더니, 이번엔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는 안개뿐이구나. 안개의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숨 쉴 때 마다 폐 속으로 가득한 습기가 스며들어온다.
“거기 아가씨. 같이 헤엄치실래요?”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릿하게 사람 형태가 보인다. 난 장검을 뽑았다.
“흐릿한 모습이 참 멋지네요. 저번엔 그림자가 멋있더니.”
“그쪽도 가리니까 좀 예쁘네요. 또 얼굴 빨개졌나요?”
…별걸 다 기억하네.
“그나저나 정말 괴물은 괴물이군? 분명 심장이 멎은 것까지 확인했었는데……. 안 죽는 거야? 아니면 죽여도 계속 살아나는 건가?”
“후자죠. 아가씨, 신학에 관심 없죠? 관심 있으면 내 정체를 알 수도 있는데.”
“정체는 무슨……. 그냥 괴물이지.”
“비라코챠교 경전 69페이지 셋 째 줄. 인간 여자에게 배신당한 악마 에렛치가 자신의 생명력을 투자해 부하를 만들었다. 그는 부하의 이름을 모글이라고 짓고 끝없는 정력과 생명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생명력을 지나치게 사용한 에렛치는 죽고 말았고, 모글은 주인의 복수를 위해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게 너야?”
“근데 아가씨. 아가씨는 은근슬쩍 말을 놓는 경향이 있다? 중년아저씨들이나 하는 짓을 스무 살 초반 아가씨가 하니까 영 적응 안 돼.”
“나 아직 십대야 이 괴물아.”
“속일 걸 속여, 요 아가씨야. 지금 안개 속에서 보이는 주름살만 해도 세 개구만. 나는 개인적으로 아가씨를 만날 때마다 안개가 끼었으면 좋겠어. 아가씨 맨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그런 여자한테 저번에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더라?”
“여자는 얼굴보다 마음이 중요해. 그럼 이제 달려와 베이비.”
“이번엔 장검이야. 계속 죽이고 살아나다보면 둘 중 하나는 지치겠지. 간다?”
“잠깐 스톱.”
“내 이름은 스톱이 아니라 런스톰이야.”
“개그도 중년아저씨 수준이군. 일단 내 의견을 들어봐. 네가 날 아무리 죽여 봤자 난 계속 살아나. 날 만든 주인 에렛치는 꽤나 잘나가던 마족이었어. 그런 마족이 생명력 절반 이상을 투자해서 만든 게 바로 나란 말이야. 다시 살아나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그런데 너는 좀 힘들단 말이지. 길쭉하고 딱딱한 물건을 박아 넣는 건 언제나 고된 일이야. 알겠어? 이러면 자꾸 너만 힘들어져. 안 그래도 늙어 보이는 얼굴, 고생하면 더 빨리 늙는단 말이야. 그러면 좋겠어? 아니잖아. 자 이제 나랑 협상을 하자. 오케이?”
“더 죽이고 싶어졌어.”
“이런……. 내 말을 들어봐. 넌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아?”
“주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며?”
“그건 그냥 대외적인 핑계고. 사실 난 애정에 목마른 한 마리의 수사슴일 뿐이야. 사랑하는 여자와 장검과 단검이 아닌 신체무기를 사용해 박고 박히는 행위를 하고 나면 정말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럼 사랑하는 여자와 박으러 가면 되겠네, 잘 가.”
“사랑해 자기야.”
“참 나, 나 못 생겼다며?”
“그런 말은 안 했어. 게다가 여자는 얼굴보다는 마음이 예뻐야지.”
잠깐. 이게 말이 돼? 내 손으로 죽였던, 게다가 사람도 아닌 괴물과 그걸 한다고? 난 점점 가까워지는 괴물의 실루엣을 향해 장검을 세웠다. 그러나 괴물은 장검은 위협도 안 되는 듯 성큼성큼 걸어온다. 난 장검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말았다. 괴물이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이댄다. 이마가 닿는다. 코끝이 닿는다. 촉촉한 입술이 닿는다.
괴물의 손이 허리를 지나 등을 지나 가슴으로 향한다. 다른 남자가 하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행동을 이 괴물에게 당하니 그리 나쁘지는 않다. 입술이 괴물에게 봉해져있는 상태이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시팔! 세상에 이런 괴물이 어딨어?
2.5.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두텁게 깔린 안개 때문에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없지만 숲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이른 새벽쯤인 것 같다. 난 주섬주섬 옷을 입은 뒤, 느릿한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너무 느리게 걸은 탓에 열흘하고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보스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힘드냐?”
난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난 힘들다 인마. 너 대체 뭐하고 왔냐?”
“네? 괴물 죽이고 왔죠.”
“오늘 아침에 의뢰인한테 또 편지가 왔어. 빨리 괴물을 안 죽이는 바람에 3일 전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겼다고 하는군. 넌 맨날 뭘 죽이고 오는 거야? 런스톰. 이 일 하기 싫어?”
“아닙니다.”
“그럼 당장 모턴 시로 달려가서 괴물을 죽이고 오란 말이야. 아니면 다른 놈한테 이 일을 시킬까? 이제까지 잘 해오다가 마지막에 자꾸 실망시킬래?”
“죄송합니다. 이번엔 꼭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난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짜증과 피로가 겹쳐 머릿속에서 빈혈이 소용돌이쳤다.
3. 불쌍한 괴물.
옛 속담 중에 ‘기회는 최소한 세 번은 주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회의 횟수는 본인의 몫이다. 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고 오히려 적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기회를 가지냐가 아니라, 얼마나 확실한 기회를 가지냐다. 뛰어난 도박가들은 말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 맞는 말이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절실히 느꼈다.
난 괴물을 죽이기 위해 다시 숲으로 왔다. 오늘은 어둠도, 안개도 끼지 않았다. 나는 비라코챠교 경전을 꺼내 69페이지를 펼쳤다. 마지막 문단에 저번에 괴물이 읽어주면서 생략한 부분이 나와 있었다.
‘모글은 머리를 잘라도, 다리를 잘아도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모글 본인이 자살을 했을 경우에는 절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자살을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
“오, 자기. 누군가 말했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자기는 날 알아가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구나.”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놈의 얼굴을 보면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죽여 버릴 것만 같다.
“눈을 떠요, 자기.”
난 눈을 떴다. 그리고 동시에 준비해온 물건을 꺼내 모글에게 겨냥했다.
“모글. 이게 뭔지 알아?”
“뭐? 흐음. 독침이네? 이봐요 자기. 독으로 죽이든 장검으로 죽이든 내가 다시 살아나는 건 똑같아요. 뭐 자기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날 죽임으로써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쳐 희생할 수야 있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독침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독은 아니지.”
“그러면?”
“마취제. 이거 한 방이면 천 년 전에 멸종한 드래곤도 못 움직일 걸. 사람을 마취할 수 있는 양의 사십 배를 넣어놨거든.”
“잠깐. 자기 혹시 날 마취한 다음 가학 플레이를 즐기려는 거야?”
“비슷한 거야.”
“오, 그러면 어서 날.”
모글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내가 얼른 독침을 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빙하기 때의 맘모스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난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모글에게 다가갔다.
“말해봐. 말할 수 있어. 마취약 사십 배 어쩌고 한건 그냥 뻥이야.”
“휴우, 자기. 자기는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군.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쏴버리다니.”
“얼마 전엔 너도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쏴버렸잖아.”
“…내가 좀 참을성이 없는 편이야. 뭐 어쨌든, 자기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이대로 날 포박한 다음 배 위에 촛농을 떨어뜨리겠지. 아니면 혁대로 엉덩이를 때리려나?”
“아냐, 틀렸어. 너 혹시 거세라는 거 알아?”
“흐음. 잠깐. 대답을 듣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상상이 자기가 실천하고자 하는 그 행동이야?”
“뭘 그리 복잡하게 말을 해. 내가 간단하게 정리할게. 넌 머리를 잘라도 다시 살아난다고 했어.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만약 다리를 자르면? 다리만 도마뱀 꼬리처럼 다시 쑥하고 재생될까? 그건 아니지?”
“사실 나 도마뱀이야.”
“수작 부리지 마. 너는 죽으면 다시 살아나긴 하지만 도마뱀처럼 신체부분을 재생할 수는 없을 거야. 자, 만약 내가 네 거시기를 자른다 치자. 그럼 넌 어떻게 될까?”
“죽겠지. 과다출혈로.”
“그럴 줄 알고 치료도구도 가져왔어. 마취가 풀리면 죽을 정도로 아프긴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러지 마. 그러면 나 자살할 거야.”
“비라코챠교 경전 69페이지 마지막 문단 마지막 줄, 자살을 했을 경우에는 절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나에 대해 꽤나 열심히 공부했구나. 흐음. 그래. 자기가 내 거시기를 자른다고 쳐.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날 죽여 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럼 난 다시 너에게 찾아가서 너의 거시기를 자르면 되지. 잘리는 쪽이 피곤할까, 자르는 쪽이 피곤할까? 아무래도 잘리는 쪽이 더 피곤할 것 같은데. 거시기가 잘리는 고통을 앞으로 두 번, 세 번, 수십 번도 더 느낄 자신 있어?”
“없어.”
“사실 나도 계속 자를 자신은 없어.”
난 모글의 얼굴에 힘껏 주먹을 내려쳤다. 주먹이 아플 정도로 세게 쳤기 때문에 모글의 코가 뭉개져버렸다. 그러나 마취를 한 탓에 피를 홍수처럼 흘릴 뿐 아파하지는 않았다. 나는 주먹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이 더 아프다니. 난 주먹을 감싸고 아픔을 달랜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왜 날 속였어?”
“사랑은 속고 속이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박고 박는 행위를 하고 나면 그 짓을 그만둔다며? 근데 왜 또 한 거야?”
“사실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다니. 모글과 얘기할 때마다 나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바보가 되는 기분은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다. 어서 이 일을 끝내야지. 난 작고 날렵한 단검을 꺼냈다.
“아주 유명한 장인이 만든 단검이야. 날이 워낙 깨끗해서 거시기도 한 번에 자를 수 있을 거야. 자, 이제 바지 벗긴다?”
“잠깐. 자기야. 다시 생각해봐. 나 이제 진짜 여자 겁탈 안할게. 내 주인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난 대꾸하지 않고 모글의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차가운 단검 칼날로 모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모글. 이번 이야기의 교훈은 말이야. 그냥 간단해. 여자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는 거야. 오늘 집에 가서 일기장에 꼭 적어. 알겠지?”
그리고 최초의 칼질.
“으, 잠깐. 야. 우와. 야, 하지 마. 야. 우으. 아아아아아. 야. 그만해. 야이. 야,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 야, 나, 히히히히히히.”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다. 핏방울이 튀어 올라 얼굴에 달라붙는다. 피는 한참이나 튀어 오르고 솟은 뒤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휴지를 꺼내 꿈틀 거리는 피를 닦았다. 그리고 약과 붕대와 가위를 꺼낸 다음 응급처치를 했다. 그동안 모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두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모글은 대자로 누운 채 미친 사람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 으, 같은 의미 없는 신음들이 모글이 하는 말의 전부였다. 난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로 모글의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눈물 한 방울을 쥐어짜냈다.
오늘은 어둠도, 안개도 끼지 않았다. 정말 봄날처럼 화창한 날씨다.
물론 내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임무만을 수행한다는 철칙 따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스의 명령을 들었을 때 나는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스를 바라보니 보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하게 내 시선을 받는다. 난 결국 보스의 명령에 말대꾸를 하게 되었다.
“괴물이요?”
“그래, 괴물.”
“보스.”
“왜?”
“그런 얘기를 듣기에는 제 나이가 좀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괴물과 용사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일 소녀 나이는 지났다고요.”
“동심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로군.”
“후우. 그래, 괴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괴물은 어떤 괴물입니까? 천 년 전에 멸종한 드래곤입니까, 아니면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바다괴물 크라켄입니까?”
“여자를 겁탈하는 괴물이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무리 내가 여자 같지 않다지만 어떻게 얼굴색하나 바뀌지 않고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난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할 말을 약간 정리하고, 심호흡을 한 뒤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어머! 보스, 제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하고 앙탈을 부려야합니까, 아니면 그런 괴물이 어디 있냐며 화를 내야 합니까?”
“둘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저도 그래요. 진짜 괴물이 있긴 있습니까?”
“모턴 시를 감싸고 있는 숲에서 출몰한다고 한다. 괴물에게 당한 당사자나 가족들이 쉬쉬하는 분위기라서 괴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네가 빨리 처리해야겠지?”
“해야죠. 그럼 그냥 숲을 돌아다니면서 괴물을 찾은 다음 죽이면 됩니까?”
“안 되지. 자, 드디어 네가 이걸 할 때가 되었구나.”
“뭐요?”
“미인계.”
…….
“아저씨아저씨 하면서 따라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네가 이렇게 자랐구나. 인생무상이로다. 그때만 해도 겨드랑이에 털도 안 났었는데…….”
가만 놔두면 더 위험한 말도 할 것 같기에 나는 얼른 보스의 상념을 끊었다.
“그럼 그 괴물은 어떤 놈인가요? 여자를 겁탈할 정도라면 힘이 꽤 세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자의 힘을 무시하지만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여자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런 여자들을 겁탈할 정도라면 적어도 힘이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응. 좆나 세.”
1. 이상한 괴물.
그래서 나는 그 좆나 세다는 괴물을 잡기 위해 모턴 시로 가는 중이다. 보통 좀 배운 인간들은 그림자의 원리가 광원이 물체보다 클 때 가려서 어쩌고 하는 복잡한 이론을 들이대는데 사실 그림자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생길 수 있다. 지금 여기는 달빛도 들지 않는 숲속인데도 내 등 뒤에 예쁜 그림자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본체는 못생겼어도 그림자는 참 예쁘단 말이야.
그리고 그 옆에 나타나는 새로운 그림자.
“어 잠깐만, 거기 아가씨.”
“혹시 괴물이세요?”
“응?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이렇게 멋진 남자에게.”
“그림자가 안 멋진 남자는 보기 드물죠. 게다가 달빛도 들지 않는 어두움 숲속을 혼자 돌아다닐 미친놈이 있을까요?”
“아가씨는 그럼 왜 돌아다니나요?”
“미친년입니다.”
“그럼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뒤질래요?”
“에이, 일단 뒤돌아보세요. 얼굴도 안 보고 얘기하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뒤돌아보면 쏘게요?”
“활도 없는데 쏘긴 뭘 쏴요?”
“그거 있잖아요. 오줌 말고 다른 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단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표적을 찾기도 전에 난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괴물과 눈이 마주쳤는데,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우라지게 잘 생겼다.
“잠깐. 당신 괴물 맞아?”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제가 뭐하는 괴물인지도 알죠?”
“여자를 겁탈하는 개새끼요.”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제 얼굴을 보니 어때요? 뭐 당해도 기분 나쁠 것 같진 않죠?”
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남자들의 착각이 뭔지 알아요? 자기가 좀 생겼다싶으면 여자들이 무조건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이제.”
말을 끝내기 전에 괴물의 그곳을 향해 발차기를 시도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실패를 예상해도 막상 실패가 다가오면 실망을 하게 된다. 괴물이 너무 태연하게 무릎으로 발차기를 막는 바람에 나는 적잖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괴물이 내 목과 귀를 향해 입술을 들이대기에 나는 적잖게 당황 하고 말았다. 하지만 프로는 당황 속에서도 침착을 찾는 법. 난 자유로운 왼손으로 나머지 단검 하나를 뽑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괴물의 옆구리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아오!”
괴물은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내 몸에서 떨어졌다. 난 잡혀있던 오른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맨날 박기만 하다가 박히니까 당황스럽지?”
괴물은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가, 다시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박히니까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
흠, 내 얼굴이 안 빨개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리 처음 듣나보네.”
젠장.
“뭐, 이렇게 강제로 하면 여자들은 다 싫어하는군.”
“당연하지 괴물아. 근데 너 생긴 건 멀쩡한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마음먹고 정상적으로 작업하면 넘어올 여자가 한 둘이 아닐 텐데.”
“꼬시는 건 괴물의 자존심이 허락 안 해.”
“옆구리에 단검 박아놓은 뒤 이렇게 사이좋게 대화하는 게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일단 좀 더 대화를 해보자. 네가 왜 괴물이야? 생긴 것도 그렇고 단검 박히는 거 가지고 쩔쩔 매는 것도 그렇고 사람 같은데?”
“이봐 아가씨. 옆구리에 단검 박혀볼래? 좆나 아파. 쩔쩔 안 매는 게 이상한 거야.”
“그래도 괴물이잖아? 말하는 거 보니 개념이 괴물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도 똑바로 할 수 있고. 네가 어딜 봐서 괴물이야?”
“이거 비밀인데, 사실 내 물건이 괴물이야.”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그렇다고 치지. 그런데 정말 그거 땜에 괴물이라고 불리는 거야?”
“글쎄…….”
“야. 어쨌든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난 괴물을 죽이러 왔거든? 근데 널 보니까 성교육만 제대로 받으면 꽤나 멀쩡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제 그 미친 짓 그만하고 멀쩡히 살아. 너 별로 안 죽이고 싶어.”
“이봐 아가씨.”
“왜?”
“언제부터 이 나라가 성적 취향을 범죄로 규정했나요?”
“남에게 피해를 주면 그건 무조건 범죄야. 내가 좋은 성교육센터 하나 소개해줄게.”
“에이, 싫어. 난 그냥 이대로 살래.”
“진짜? 그럼 난 이 남은 단검 하나를 네 심장에 꽂을 건데? 넌 맛이 갔지만 나쁜 놈 같지는 않으니 장검으로 죽이진 않을게. 괜찮겠어?”
“살살 박아줘.”
…오래 대화하면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으니 빨리 죽여야겠군. 난 내려찍기 편하게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단검을 심장에 쑤셔 박기 직전까지 괴물은 얼굴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나는 왠지 이 괴물을 죽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 일에 익숙해진 내 손은 이미 괴물의 심장에 단검을 쑤셔 박고 있었다.
욱, 괴물의 입에서 짧은 신음과 함께 피가 흘러나왔다. 괴물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기분과 계속 눈을 마주 치고 싶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괴물은 짧게 경련한 뒤, 나에게 몸을 기대듯 풀썩 쓰러졌다.
나는 문득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1.5.
보스가 요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한다.
“너 뭐하고 온 거냐?”
“네?”
“너 여자 겁탈하는 괴물 죽이러 갔던 거 맞지?”
“네.”
“그 괴물 죽이고 온 거 맞지?”
“…네.”
“근데 의뢰인은 왜 빨리 괴물을 안 죽이냐고 보채는 걸까?”
“네?”
“런스톰.”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새로 받은 내 이름이다. 그러나 보스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웬만하면 옛날 이름을 부른다. 저 이름을 불렀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난 네가 이 일을 시작한다 했을 때부터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 물론 ‘아이엠 유어 파더’ 어쩌고 하는 뻔한 반전대사를 하려는 건 아니다. 어쨌든 그만큼 내가 널 자식처럼 좋아했고, 또 그렇기에 널 못 말렸던 거였다. 그러나 이제 보스와 부하의 관계로서 이 말을 해야겠구나.
런스톰, 이 일을 그만둬라. 이런 일을 하기엔 넌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아. 사람이 너무 감성적이면 인생이 피곤해져. 인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먼저 해줬을 때, 기쁘기보다는 의외로 기분이 착잡해진다. 웃고 싶지만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나는 목소리가 안 떨리길 바라며 천천히 말했다.
“보스. 그럼 이번 일만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그만두겠습니다.”
보스는 표정을 무섭게 바꾸며 말한다.
“삐졌냐?”
난 보스의 가벼운 장난에 겨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방금 제 표정 볼만했죠?”
“콧구멍 벌렁 거리는 게 참 보기 흉하더라. 너 남자친구 앞에선 당황하지 마. 넌 당황하면 콧구멍이 커지는 타입이야.”
나는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2. 외로운 괴물.
두 번째로 찾아온 숲. 이 숲은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저번엔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뿐 이더니, 이번엔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는 안개뿐이구나. 안개의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숨 쉴 때 마다 폐 속으로 가득한 습기가 스며들어온다.
“거기 아가씨. 같이 헤엄치실래요?”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릿하게 사람 형태가 보인다. 난 장검을 뽑았다.
“흐릿한 모습이 참 멋지네요. 저번엔 그림자가 멋있더니.”
“그쪽도 가리니까 좀 예쁘네요. 또 얼굴 빨개졌나요?”
…별걸 다 기억하네.
“그나저나 정말 괴물은 괴물이군? 분명 심장이 멎은 것까지 확인했었는데……. 안 죽는 거야? 아니면 죽여도 계속 살아나는 건가?”
“후자죠. 아가씨, 신학에 관심 없죠? 관심 있으면 내 정체를 알 수도 있는데.”
“정체는 무슨……. 그냥 괴물이지.”
“비라코챠교 경전 69페이지 셋 째 줄. 인간 여자에게 배신당한 악마 에렛치가 자신의 생명력을 투자해 부하를 만들었다. 그는 부하의 이름을 모글이라고 짓고 끝없는 정력과 생명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생명력을 지나치게 사용한 에렛치는 죽고 말았고, 모글은 주인의 복수를 위해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게 너야?”
“근데 아가씨. 아가씨는 은근슬쩍 말을 놓는 경향이 있다? 중년아저씨들이나 하는 짓을 스무 살 초반 아가씨가 하니까 영 적응 안 돼.”
“나 아직 십대야 이 괴물아.”
“속일 걸 속여, 요 아가씨야. 지금 안개 속에서 보이는 주름살만 해도 세 개구만. 나는 개인적으로 아가씨를 만날 때마다 안개가 끼었으면 좋겠어. 아가씨 맨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그런 여자한테 저번에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더라?”
“여자는 얼굴보다 마음이 중요해. 그럼 이제 달려와 베이비.”
“이번엔 장검이야. 계속 죽이고 살아나다보면 둘 중 하나는 지치겠지. 간다?”
“잠깐 스톱.”
“내 이름은 스톱이 아니라 런스톰이야.”
“개그도 중년아저씨 수준이군. 일단 내 의견을 들어봐. 네가 날 아무리 죽여 봤자 난 계속 살아나. 날 만든 주인 에렛치는 꽤나 잘나가던 마족이었어. 그런 마족이 생명력 절반 이상을 투자해서 만든 게 바로 나란 말이야. 다시 살아나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그런데 너는 좀 힘들단 말이지. 길쭉하고 딱딱한 물건을 박아 넣는 건 언제나 고된 일이야. 알겠어? 이러면 자꾸 너만 힘들어져. 안 그래도 늙어 보이는 얼굴, 고생하면 더 빨리 늙는단 말이야. 그러면 좋겠어? 아니잖아. 자 이제 나랑 협상을 하자. 오케이?”
“더 죽이고 싶어졌어.”
“이런……. 내 말을 들어봐. 넌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아?”
“주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며?”
“그건 그냥 대외적인 핑계고. 사실 난 애정에 목마른 한 마리의 수사슴일 뿐이야. 사랑하는 여자와 장검과 단검이 아닌 신체무기를 사용해 박고 박히는 행위를 하고 나면 정말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럼 사랑하는 여자와 박으러 가면 되겠네, 잘 가.”
“사랑해 자기야.”
“참 나, 나 못 생겼다며?”
“그런 말은 안 했어. 게다가 여자는 얼굴보다는 마음이 예뻐야지.”
잠깐. 이게 말이 돼? 내 손으로 죽였던, 게다가 사람도 아닌 괴물과 그걸 한다고? 난 점점 가까워지는 괴물의 실루엣을 향해 장검을 세웠다. 그러나 괴물은 장검은 위협도 안 되는 듯 성큼성큼 걸어온다. 난 장검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말았다. 괴물이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이댄다. 이마가 닿는다. 코끝이 닿는다. 촉촉한 입술이 닿는다.
괴물의 손이 허리를 지나 등을 지나 가슴으로 향한다. 다른 남자가 하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행동을 이 괴물에게 당하니 그리 나쁘지는 않다. 입술이 괴물에게 봉해져있는 상태이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시팔! 세상에 이런 괴물이 어딨어?
2.5.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두텁게 깔린 안개 때문에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없지만 숲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이른 새벽쯤인 것 같다. 난 주섬주섬 옷을 입은 뒤, 느릿한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너무 느리게 걸은 탓에 열흘하고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보스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힘드냐?”
난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난 힘들다 인마. 너 대체 뭐하고 왔냐?”
“네? 괴물 죽이고 왔죠.”
“오늘 아침에 의뢰인한테 또 편지가 왔어. 빨리 괴물을 안 죽이는 바람에 3일 전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겼다고 하는군. 넌 맨날 뭘 죽이고 오는 거야? 런스톰. 이 일 하기 싫어?”
“아닙니다.”
“그럼 당장 모턴 시로 달려가서 괴물을 죽이고 오란 말이야. 아니면 다른 놈한테 이 일을 시킬까? 이제까지 잘 해오다가 마지막에 자꾸 실망시킬래?”
“죄송합니다. 이번엔 꼭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난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짜증과 피로가 겹쳐 머릿속에서 빈혈이 소용돌이쳤다.
3. 불쌍한 괴물.
옛 속담 중에 ‘기회는 최소한 세 번은 주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회의 횟수는 본인의 몫이다. 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고 오히려 적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기회를 가지냐가 아니라, 얼마나 확실한 기회를 가지냐다. 뛰어난 도박가들은 말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 맞는 말이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절실히 느꼈다.
난 괴물을 죽이기 위해 다시 숲으로 왔다. 오늘은 어둠도, 안개도 끼지 않았다. 나는 비라코챠교 경전을 꺼내 69페이지를 펼쳤다. 마지막 문단에 저번에 괴물이 읽어주면서 생략한 부분이 나와 있었다.
‘모글은 머리를 잘라도, 다리를 잘아도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모글 본인이 자살을 했을 경우에는 절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자살을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
“오, 자기. 누군가 말했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자기는 날 알아가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구나.”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놈의 얼굴을 보면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죽여 버릴 것만 같다.
“눈을 떠요, 자기.”
난 눈을 떴다. 그리고 동시에 준비해온 물건을 꺼내 모글에게 겨냥했다.
“모글. 이게 뭔지 알아?”
“뭐? 흐음. 독침이네? 이봐요 자기. 독으로 죽이든 장검으로 죽이든 내가 다시 살아나는 건 똑같아요. 뭐 자기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날 죽임으로써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쳐 희생할 수야 있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독침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독은 아니지.”
“그러면?”
“마취제. 이거 한 방이면 천 년 전에 멸종한 드래곤도 못 움직일 걸. 사람을 마취할 수 있는 양의 사십 배를 넣어놨거든.”
“잠깐. 자기 혹시 날 마취한 다음 가학 플레이를 즐기려는 거야?”
“비슷한 거야.”
“오, 그러면 어서 날.”
모글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내가 얼른 독침을 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빙하기 때의 맘모스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난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모글에게 다가갔다.
“말해봐. 말할 수 있어. 마취약 사십 배 어쩌고 한건 그냥 뻥이야.”
“휴우, 자기. 자기는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군.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쏴버리다니.”
“얼마 전엔 너도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쏴버렸잖아.”
“…내가 좀 참을성이 없는 편이야. 뭐 어쨌든, 자기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이대로 날 포박한 다음 배 위에 촛농을 떨어뜨리겠지. 아니면 혁대로 엉덩이를 때리려나?”
“아냐, 틀렸어. 너 혹시 거세라는 거 알아?”
“흐음. 잠깐. 대답을 듣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상상이 자기가 실천하고자 하는 그 행동이야?”
“뭘 그리 복잡하게 말을 해. 내가 간단하게 정리할게. 넌 머리를 잘라도 다시 살아난다고 했어.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만약 다리를 자르면? 다리만 도마뱀 꼬리처럼 다시 쑥하고 재생될까? 그건 아니지?”
“사실 나 도마뱀이야.”
“수작 부리지 마. 너는 죽으면 다시 살아나긴 하지만 도마뱀처럼 신체부분을 재생할 수는 없을 거야. 자, 만약 내가 네 거시기를 자른다 치자. 그럼 넌 어떻게 될까?”
“죽겠지. 과다출혈로.”
“그럴 줄 알고 치료도구도 가져왔어. 마취가 풀리면 죽을 정도로 아프긴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러지 마. 그러면 나 자살할 거야.”
“비라코챠교 경전 69페이지 마지막 문단 마지막 줄, 자살을 했을 경우에는 절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나에 대해 꽤나 열심히 공부했구나. 흐음. 그래. 자기가 내 거시기를 자른다고 쳐.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날 죽여 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럼 난 다시 너에게 찾아가서 너의 거시기를 자르면 되지. 잘리는 쪽이 피곤할까, 자르는 쪽이 피곤할까? 아무래도 잘리는 쪽이 더 피곤할 것 같은데. 거시기가 잘리는 고통을 앞으로 두 번, 세 번, 수십 번도 더 느낄 자신 있어?”
“없어.”
“사실 나도 계속 자를 자신은 없어.”
난 모글의 얼굴에 힘껏 주먹을 내려쳤다. 주먹이 아플 정도로 세게 쳤기 때문에 모글의 코가 뭉개져버렸다. 그러나 마취를 한 탓에 피를 홍수처럼 흘릴 뿐 아파하지는 않았다. 나는 주먹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이 더 아프다니. 난 주먹을 감싸고 아픔을 달랜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왜 날 속였어?”
“사랑은 속고 속이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박고 박는 행위를 하고 나면 그 짓을 그만둔다며? 근데 왜 또 한 거야?”
“사실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다니. 모글과 얘기할 때마다 나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바보가 되는 기분은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다. 어서 이 일을 끝내야지. 난 작고 날렵한 단검을 꺼냈다.
“아주 유명한 장인이 만든 단검이야. 날이 워낙 깨끗해서 거시기도 한 번에 자를 수 있을 거야. 자, 이제 바지 벗긴다?”
“잠깐. 자기야. 다시 생각해봐. 나 이제 진짜 여자 겁탈 안할게. 내 주인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난 대꾸하지 않고 모글의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차가운 단검 칼날로 모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모글. 이번 이야기의 교훈은 말이야. 그냥 간단해. 여자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는 거야. 오늘 집에 가서 일기장에 꼭 적어. 알겠지?”
그리고 최초의 칼질.
“으, 잠깐. 야. 우와. 야, 하지 마. 야. 우으. 아아아아아. 야. 그만해. 야이. 야,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 야, 나, 히히히히히히.”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다. 핏방울이 튀어 올라 얼굴에 달라붙는다. 피는 한참이나 튀어 오르고 솟은 뒤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휴지를 꺼내 꿈틀 거리는 피를 닦았다. 그리고 약과 붕대와 가위를 꺼낸 다음 응급처치를 했다. 그동안 모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두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모글은 대자로 누운 채 미친 사람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 으, 같은 의미 없는 신음들이 모글이 하는 말의 전부였다. 난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로 모글의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눈물 한 방울을 쥐어짜냈다.
오늘은 어둠도, 안개도 끼지 않았다. 정말 봄날처럼 화창한 날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