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스트레이트 플러쉬. 그게 내 이름이다.
R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누가 지어준 이름인지 몰라도 참 기똥찬 이름이다. 센스가 철철 흘러넘
치다 못해 남에게 민폐를 끼칠정도다. 내 이름을 말할때는 뻔뻔한 나 마저도 죄송스러운 마음마저
들 정도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내 이름이다. R. 스트레이트 플러쉬. 다섯가지 스페이드
가 나를 가호한다.
비 내리는 오후의 길드는 꽤나 적적했다. 말상대가 될만한 상대는 타닥타닥 단조로운 소리를 내는
장작불뿐이었지만 장작불이랑 얘기하는걸 길드장에게 들켰다간 쫓겨나기 십상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런 짓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엔실라, 뭐 시킬거 없어? 오늘은 특별히 싼데."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말했다. 내 눈앞에는 거꾸로 뒤집혀 있는 아름다운 여인, 엔실라
가 있었다. 길드의 카운터이자 얼굴, 바텐더인 그녀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채 검은 머리카락
을 귀 뒤로 넘기며 컵을 닦고 있었다.
"글쎄요. 당신에게 시킬만한 것은 없습니다."
"컵 닦아줄까?"
"뭔가 부술게 있다면 부탁드리죠."
언제나 웃고있지만 엔실라는 항상 나를 무시하려 했다. 그녀는 나를 싫어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녀
의 노련한 눈매는 가까이 할 사람과 가까이 해선 안될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정도
눈매는 나도 있다. 다른 사람 주위에 쉽게 다가가선 안된다는 것쯤은 눈깔이 없어도 알지. 황금을
쫓는 눈동자는 어느새 배신자를 옆에 두고 있다.
"커피?"
오늘은 왠일로 엔실라가 끊어진 대화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놀랍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건가?!
"커피콩이 좀 남는군요. 오늘은 일거리가 없을 것 같으니 이거 드시고 돌아가세요."
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내쫓으려는 뇌물이었군. 엔실라의 말이 틀린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미친듯이 뜨거웠지만 참을만했다... 참아선 안될 부분이라고 생각했지
만.
"음. 맛있었어."
"내일 다시오세요. 비내린 후에는 일거리가 많더군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하늘이 미친것처럼 X랄발광을 하며 비를 흩뿌리
고 있었다. 지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후두둑 다리께를 적신다. 집까지 뛰어가면 얼마나 젖
을지 걱정하며 로브 후드를 눌러 썼다. 달린다.
찰박찰박 물이 튀어오르며 바지를 더럽혔다. 입에선 단내 대신 달짝지근한 엔실라의 커피향이 느껴
졌다. 냉커피를 탈때는 새끼손가락으로 저어주던데, 냉커피로 타달라고 할 걸 그랬다. 성벽 너머에서
번개가 쳤다. 가까운 곳에 떨어진 듯 천둥소리가 금방 들렸다. 뛸때마다 검이 허벅지께에서 절그럭거
렸다.
집은 거지도 피해간다는 수도령 제 13구역에 있었다. 강 하구에 있어 맑은 날에도 멀쩡한 땅보다 진
창이 더 많은 곳. 비오면 말할 것도 없이 불쾌해지는 곳이다. 어디서 떠내려온건지 역겨운 오물들에
발디딜틈 하나없는 진창, 끈적끈적한 진흙, 해가 지면 한번도 거스르지 않고 들려오는 비명소리, 재수
가 안좋으면 눈깔 뒤집힌 시체와 만나기도 하지만 적어도 강도는 없는 곳이다. 털어버릴 상대가 없으
니까.
그러니까 골목에서 마주친 검은 실루엣은 강도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오크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희미하게나마 남은 빛에 번뜩이며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내 머리보다 더 큰 양손 워해머가 나를 조금 기죽게 했지만 당당한 척 가슴을 폈다. 네
이빨은 무디지만 적어도 내 이빨은 더 더 날카롭고 많다. 오크.
무기가 있다는 표시로 내 망토를 살짝 들어올려보았다.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다섯자루의 검이 녀석
에게 비춰졌다. 모두들 공통적으로 검정색 스페이드 마크가 새겨져있다.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가호하는 나의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하지만 녀석은 내 패를 보고도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이녀
석,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보고도 덤벼들 패가 있단 말인가? 대단한데? 판을 뒤집어 엎을 생각인
가?
"R. 스트레이트, 맞지?"
오크 녀석은 정중하게도 내 이름을 약어로 불렀다. 풀 네임을 불렀다면 나는 굉장히 부끄러워 했을
것이다.
"그래. 맞아. 오크... 음, 너는 누구지?"
"기억 못하는 모양이지? 3년 전 넌 내 여동생을 죽였다. 이름은..."
"...미안하지만 오크 여자라면 더욱 기억 못하겠어. 짐작조차 안잡히는걸."
무례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오크 녀석은 낮은 저음으로 으르렁거렸지
만 덤벼들진 않았다. 아무래도 말로 해결하긴 힘들거라는 생각에 검으로 손이 갔다. 녀석의 눈이 내
손을 쫓았다.
"내 이름은 라헬 크누트다. R. 죽어가는 네 눈동자에 내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도록 해주지."
라헬이라, 좋은 이름이다. 어쨌든 좋은 이름을 가진 오크는 큰 함성을 지르며 내게 뛰어들었다. 순식
간에 두자루의 검이 내 손에 쥐어졌다. 아아, 오늘 첫번째 비명을 내가 만드는군. 손에 긴장이 확 붙었
다. 광기어린 오크의 눈빛, 여동생을 잃은 슬픔과 나에 대한 분노겠지.
황금을 쫓는 눈동자는 적을 만든다.
좁은 골목에 작은 번개가 쳤다. 오크의 단 한번의 일격에 내 검 한자루가 부러졌다. 그리고 내 왼손
검지도 부러진 것 같았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다급히 뒤로 빠졌지만 결국 왼손가락이 얼얼한 감촉
이 느껴졌다. 이상한 각도로 구부러진 검지가 보였다. 오크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장소를 잘 잡았군."
"생각을 많이했지."
"오크치곤 제법이야. 동생도 좀 더 똑똑했다면 항복해서 살았을텐데."
오크는 분노의 함성을 터뜨리며 다시 그 망할놈의 워해머를 마구 휘둘러댔다. 좁은 골목에서는 내
다섯자루의 검을 소비하며 휘둘러대는 방식의 공격을 전개하기 힘들었다. 다섯자루를 한꺼번에 원활
하게 사용하려면 휘두르는 공격이 대부분인데 여기선 찌르기밖에 할 수 없었다. 세로 각도로 휘두르
자니 저 커다란 워해머에 막힐게 뻔했다.
하지만 녀석의 커다란 워해머에도 한가지 약점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여기선 저 큰 덩치를 움
직이기 힘들다는 것...
쾅! 쿠르르릉...
틀렸군. 귀 바로 옆에서 천둥이 쳤다. 머리 전체를 울리는 통증이 짜르르 흘렀지만 비틀거리면서 물
러났다. ...젠장. 녀석이 워해머를 휘두르기 힘들거라고 생각했던건 오산이다. 녀석은 그 큰 마울러를
주변 골목을 마구 때려부수며 나한테 오고 있었다. 벽같은건 아무래도 문제가 안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녀석은 끊임없이 쫓아왔다. 골목은 길다. 넓은 대로로 나
가면 좀 나을까 싶었지만 다른 사람을 마주치고 싶진 않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도시 안에서 나는 적
들이 제법 많다. 이 골목은 그나마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도망치던 중,
갑자기 시계가 흔들렸다.
"어?"
휘청하고 꼬인 왼발이 오른발에 태클을 걸어 나를 넘어뜨렸다. 레드카드를 들기 전에 내 얼굴은 이
미 진창에 처박혔다. 역겨운 진흙 물이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끈적끈적한 쓰레기과 진흙들이 나를
붙잡아챘다. 진흙탕속에서 버둥거리는 내가 얼마나 꼴사나워 버릴지는 알고싶지도 않았다.
"성공했군."
오크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하지만 녀석은 워해머를 휘두르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이거... 약인가?"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지만 그 단순한 행동마저 힘에 부쳤다. 온몸의 근육이 노곤노곤해지며 녹아
다는 느낌이다 꽤나 행복하긴 한데 이대로 가다간 똥오줌을 싼 채 죽어버릴 것 같아 곤란스럽기도 하
다. 비슷한 종류의 약을 써본 적 있어서 잘 알고 있다. 꽤나 추한 죽음이다.
언제 약을 먹은거지? 오늘 뭐 먹었더라? 아침에 호밀빵에 물, 점심때 쫄쫄 굶다가 엔실라에게 커피
를 얻어마셨지. 나의 내면에 숨겨진 제 3인격 같은게 컵속에 약을 탄게 아닌 한 범인은 엔실라밖에 없
다. 검은 색 긴 찰랑찰랑 흔들리는게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여자. 살 쪘다는 얘기하면 커피에 설탕 대
신 소금 타주는 여자. 마른 몸매면서도 소식하기 좋아하는 여자. 길드에서 가장 많은 남자들의 고백
을 받은 여자. 살면서 처음으로 오늘 내게 커피를 타준 여자.
"엔...실라?"
"드디어 기억했군. 그래, 그 아이의 이름은 엔실라 크누트. 내 여동생이다."
워해머가 하늘로 솟았다.
잠깐. 뭔가 이상하잖아. 엔실라는 분명히 인간이라고. 오크 오빠 같은건 두고 있지 않아. 그런 얘기
를 한 적도 없고. 죽는 순간까지 이렇게 기막히게 머리가 꼬이는 건 또 생각지도 못했다. 죽으면 생의
모든 비밀이 풀리지 않을까 했는데 이건 더 기가 막히잖아. 하지만 오크의 워해머는 쓸데없는 설명을
하지 않을정도로 삭막했다.
선혈이 뺨에 튀었다.
오크는 이상하다는 듯 자신의 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삐죽이 튀어나온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젖
을 후벼파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설명에 대해서 듣고싶어도 못 듣겠다고 생각했
다. 오크는 그대로 워해머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검날을 움켜쥐려 했다.
"컥.. 커, 컥!"
검은 세게 요동치며 오크의 목 안에서 난잡하게 요동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크는 목을 삐딱하
게 꺾은 채 몸을 허물어뜨렸다. 검을 꽂은 범인은 오크의 목을 반쯤 잘라내면서 검을 빼냈다.
"이것 봐, 괜찮아?"
누구지?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이지만 그중 말 할 줄 아는 친구는 좀 적었다. 집에 놓인 두개의 목박
힌 지푸라기 인형과 장작불, 콧김 내뿜길 좋아하는 갈색 말 정도? 단번에 누군지 알기 힘들만큼 목소
리는 낯설었다. 녀석은 내 몸을 뒤집더니 내 눈동자를 확인했다.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녀석의 기대
를 충족시켜주었다.
이름 모를 그 친구는 나를 재빨리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 이봐. 그런데 너 이름이 뭐지?"
"뭐? 이녀석 어이없네. 친구 이름도 기억 못하냐? 베네트잖아."
모르는 이름이다. 친구가 워낙 없다보니 이름정도는 잘 외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아예
이름 자체를 기억 안하다보니까 그럴수도 있겠군.
"사방에 놈들이 좍 깔렸어! 이 자식들 오늘 널 죽이려고 아주 날 잡은 모양인데. 별별 듣도 보도 못
한 도시의 녀석들까지 왔다니까. 얼른 이 도시를 빠져나가야 해. 도망칠 길은 내가 알고 있어."
듣자마자 이름을 까먹어버린 나의 친절한 친구는 열성적으로 떠들어댔다. 고마워. 지푸라기 인형에
게는 기대하기 힘든 배려로군. 나는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다리의 근육에 어떻게든 힘을 주며 걸
으려 애썼다. 이 친구 말대로 적들이 사방에 깔려있다면 죽는건 시간 문제다. 다리에 힘이 돌아오면
그 시간은 제법 고무적으로 늘어날테고.
"도망가기 전에 중요한 짐만 챙겨서 얼른 빠져나와. 내가 바래다주지."
친구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비에 흠뻑
젖은 나의 초라한 집. 행복한 마이 스윗 홈이라고 부르긴 꽤 부족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겹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그때 친구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고는 어딨어? 들어줄게."
"......"
아아, 나의 친절한 친구여. 그대는 정말 친절한 친구일세.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해주다니. 그정도
배려심은 기대하지 못했는데 나는 아주 잠깐 그대에게 기대했군.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녀석의 눈동자
를 보며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마음에..."
"뭐?"
나는 녀석의 마음을 확인하기 좋게 심장에 찔러넣은 단검을 북 잡아당겼다. 가슴의 상처가 크게 벌
어지며 벌떡거리는 근육과 신경 더미들이 보였다. 심장은 피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미안. 비에 씻으
면 잘 보일거야. 이름 까먹은 나의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피투성이 손과 피투성이 스페이드 마
크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안녕. 이름은 기억해둘게, 친절한 친구. 버나드 맞나?"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긍정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
렸다. 심장까지 단검이 들어가는데 힘을 소비해버린 것만으로 온몸의 힘이 빠져버려 탈진했다. 한동
안 움직이지 못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친절한 친구의 말은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목을
노릴 녀석들은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가야할 곳이 있다.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패를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문을 열어 젖히는 순간, 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깜짝 놀라는 엔실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금 머리를 감은 듯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아
쉽게도 알몸이라거나 하는건 아니었지만 눈을 즐겁게 하는 얇고 큰 옷을 걸쳐입고 있었다. 엔실라는
피투성이인채로 바닥을 나뒹구는 나를 보며 다급히 다가왔다.
솔직히 그녀가 걱정한게 피투성이가 될 카펫인지 피투성이인 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녀를 멈춰세웠다.
"멈춰."
손목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부들부들 떨렸지만 검날은 날카로웠다. 명백히 적의가 담긴 검 끝이 향
한 쪽은 맨손의 엔실라였다. 평소때라면 맨손 계집애를 상대로 칼을 뽑는 일은 없을테지만 지금은 그
것도 불안했다. 실제로 엔실라의 집까지 오기까지 마주친 사람중에는 계집애도 있었다.
"무슨 일이죠?"
그 와중에도 엔실라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저게 연극일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걸까?
"...엔실라. 내가 뭘 잘못했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떨렸다. 꼴사납다. 하지만 그 대답은 꼭 듣고싶었다.
"왜 날 죽이려고 했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
턱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내 이빨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엔실라는 망설이다가 결국 내게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살짝 검 면을 붙잡아 밀쳐냈다. 그것조차
막아내지 못할정도로 나는 이미 진이 다 빠져있었다.
엔실라는 내 몸 이곳저곳을 살쳐보고 상처들을 가늠했다. 옷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몸에서는 기분좋은 냄새가 났다. 나따위보다는 훨씬 더 좋은 냄새다.
"상처는 별로 없네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엔실라는 놀랍다는 눈빛을 했다.
"알고 계시나요?"
"약을 먹었잖아. 이건 시간이 좀 오래 걸릴뿐이지, 죽는건 마찬가지야."
"맞아요. 좀 악랄한 근육이완제네요. 처음에는 좀 배 아래가 아릿아릿하다가 하반신이 먼저 마비될
거에요. 그리고 점점 늪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하반신부터 상반신까지 차가워지면서 마비될거구요.
좀 격렬하게 움직인다면 체온이 높아져서 반응이 느리긴 하겠지만 심장까지 올라오면 천천히 심장 박
동이 느려지기 시작해요. 그러다 얼마 안가서 죽지요."
거기까지는 몰랐지만 엔실라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엔실라가 내게 이렇게 말을 많이 해준건 오
늘이 처음이다. 커피를 타준것도 처음이고. 나름대로 좋은 분위기가 앞으로도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난 오늘 죽을 것 같다.
"해독제는?"
"저기 있어요."
엔실라가 가리킨 작은 찬장 안에는조그마한 약병이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녀의 팔을 껴안았
다.
"살려줄래?"
"아뇨. 미안해요."
엔실라는 조용히 거절했다. 나의 목을 받치고 든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체온이 내려가긴 내려가는
모양이다. 온몸의 힘이 풀려 노곤노곤한 느낌이다. 이게 얼마만에 느끼는 편안한 감정이지? 햇수로
쳐도 두손은 넘어갈거다.
"당신은 좀 더 착하게 살았어야 했어요."
"엄마 아빠가 늘 그렇게 말하더군. 하지만 두분 다 착한 사람은 아니었어."
"칼을 다섯자루나 가지고 있다고 죽지 않는건 아니에요. R. 사람을 살려주는건 평판이죠. 그런 식이
라면 언젠가는 더 많은 칼을 가진 사람에게 죽을거에요."
"흐응.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든 사람이 죽을 이유는 없지."
"지금 죽고 있잖아요."
할 말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좀 살고 싶어."
"살려줄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더라? 아까 어떤 놈은 내가 기억도 안나는 오크를 죽였다고 날 죽이
려고 하더군. 아마 당신도 그런 식으로 연관지어 있을까? 사돈의 팔촌쯤?"
"그건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기억도 못할테지만."
"그럼 엔실라, 당신이 황금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알고 있겠지만 나한테는 내가 쌓은 악
명만큼이나 황금도 많아. 내 검은 정의보다 황금을 더 좋아해. 더 의미있게 쓰이지. 그 황금이 모두 어
디에 쌓여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엔실라의 눈에는 동요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내 목에서 손을 떼냈다. 따뜻한 체온이 사라지자 더
럭 겁이 났다. 차가워진 목이 힘없이 널부러졌지만 그녀의 손길로 부드럽게 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처
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런건 알고 싶지 않아요. R. 안녕.
하지만 난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약을 탄건 내가 아니에요."
그럼 누구?라고 묻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내 목에 압박을 가했다. 엔실라의 말랑말랑한 손은 목조르
는 손임에도 불구하고 애무하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나는 얄팍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목을 뒤
로 젖혔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주마등을 본다지. 별로 감미로운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 누가 날 죽였
을까?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에 호밀빵을 팔러 온 할머니, 유난히 사달라고 애원했었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R은 죽었다. 엔실라는 힘없이 손을 떼내고 널부러진 R를 내려다보았
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때 방안에 역겨운 악취가 돌기 시작
했다. 엔실라는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그의 하반신을 보았다. 그곳에는 분변더미가 흘러나와 악취를
풍겨대고 있었다.
엔실라는 인상을 찡그린 채 R의 상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거칠게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목덜미에
걸쳐진 금빛 열쇠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그 열쇠를 거칠게 잡아당겨 떼냈다. 금빛 열쇠는 영롱
한 빛깔로 램프의 빛을 반사시켰다. 엔실라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든 사람의 눈동자는 황금을 쫓는다. 황금을 쫓는 눈동자는 배신자를 보
지 못한다. 배신자를 보지 못한 자는 칼을 맞는다. 칼은 정의보다 황금을 좋아한다. 다섯 개의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든 사람의 눈동자는 황금을 쫓는다.